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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올 때까지 그날이 올 때까지/우리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지들이여/외로워마(하) 서러워마(하) 우리가 있다/그대 남긴 깃발 들고 나 여기 서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날이 올 때까지/우리의 투쟁을 멈출 수 없다/싸우다가 쓰러져간 형제들이여/외로워마(하) 서러워마(하) 우리가 있다/찢긴 깃발 휘날리며 나 여기 서있다."

민중가요 "동지여 내가 있다"의 가사다. 일부에서는 '그 날'을 '새 날'로, '찢긴 깃발'을 '힘찬 깃발'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요즘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다룬 영화 <1987>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이 민중가요가 새삼 관심을 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박종철 열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동지여 내가 있다"는 김영만(74) '적폐청산과 민주사회건설 경남운동본부' 상임의장이 1987년에 만든 노래다. 김 의장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를 듣고 탄식하며 읊었고, 뒤에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던 노래다.

민중가요사를 연구해온 노동가수 최도은씨는 "노동운동과 노래"라는 글에서 "이 노래는 1987년 1월 14일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의 비보를 듣고 마산지역 사회운동가 김영만이 읊은 탄식의 노래"라며 "노동자들의 입에서 불리어지기 시작하다 전국으로 입소문을 타고 전달되어 1988년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라 했다.

요즘도 지역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김영만 의장은 영화 <1987> 이야기를 하면서 "동지여 내가 있다"는 노래를 지었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영화가 개봉된 뒤 바로 집사람과 같이 영화관에 가서 봤다. 6월항쟁 참여자로서 영화를 봤는데, 당시 길거리의 생생한 현장을 잘 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런 과정의 끝에 우리 국민들이 촛불혁명을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일어서지를 못했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고 감개무량했다. 눈물이 많이 나더라"며 "옆에 관객들을 보니 마찬가지로 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는데,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라 했다.

"동지여 내가 있다" 노래는 어떻게?

"동지여 내가 있다"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 의장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당시 내가 본 신문이 첫 보도는 아니었으며, 천주교 신부들이 사건 조작을 발표한 내용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배달된 신문을 펼치는 순간 내 눈길을 확 끌어당긴 기사가 있었고,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기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꾸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고, 신문이 눈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나중엔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김영만 의장은 1981년 부산 대연동에 있었던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지하실에 끌려가 곤욕을 당한 일이 있었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기사를 보는 순간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김 의장은 "당시 마산자유무역지역 노동자와 산업선교회, 초록회 등 활동을 할 때였다. 누군가 나를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고, 안기부가 6개월 가량 나를 감시했다는 것을 그 뒤에 알았다"며 "심지어 집 앞 가게까지 감시했던 것"이라 했다.

그는 "아침에 아이들한테 밥을 챙겨주려고 하는데, 검정색 양복을 입은 3명이 와서 체포영장을 들이밀며 잡아갔다"며 "승용차 가운데 앉아 잡혀가 온갖 고초를 당했다"고 술회했다.

김영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
 김영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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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받은 김 의장은 잡혀간 지 3일 만에 나왔다. 김 의장은 월남전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사실이 간첩 혐의를 벗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김영만 의장은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짜빈둥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김 의장은 월남전 참전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월남인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지 않기도 했다.

김 의장은 "내가 집회 등에서 전두환 욕을 하고 광주민주항쟁 이야기를 하니까 누군가 간첩 신고를 한 것 같았다"며 "3일째 풀어주면서, 안기부 수사관이 '베트남 참전용사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5년은 구속돼 있어야 하는데 봐준다'고 하더라"고 했다.

"당시 나올 때 다시는 그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글을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썼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런 글을 쓰고 나왔다는 사실이 늘 내 가슴 속에 억울함으로 남아 있었다. 폭력에 의해 아무 잘못이 없는 내가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김 의장은 "박종철 기사를 보는데, 나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글을 쓰고 나왔지만, 젊은 친구는 폭력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키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미안함도 생겼고, 심정이 복잡했다"며 "그래서 당시 기사를 보고 울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젊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리 속에 곡이 떠올랐다. 가사도 바로 따라 나왔다. 그날 떠오른 곡과 가사를 하루 종일 흥얼거리다가 그날 저녁 집에 가서 악보로 옮겼다."

김 의장은 "젊은 친구의 영전에 장송곡이라도 하나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락 치듯 머릿속에서 힘차고 빠른 행진곡풍의 곡이 떠올랐다. 뒤에 생각해 보니 '접신'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김영만 작사·작곡 "동지여 내가 있다" 악보.
 김영만 작사·작곡 "동지여 내가 있다" 악보.
ⓒ 열린사회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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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의장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마산자유무역지역 노동자들한테 가르쳐 주었고,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기타도 좀 치고 하모니카도 부를 줄 안다. 노동자 모임에 가서 기타를 치면서 그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 뒤에 6월항쟁이 일어났고, 시민들은 주로 '흔들리지 않게'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불렀다. 그 때 사람들 입으로 이 노래가 전파되었던 것 같다."

왜 처음부터 작사·작곡자가 밝혀지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김영만 의장은 "당시만 해도 민중가요를 지으면 작사와 작곡자를 제대로 밝히기도 했지만 가명을 쓰거나 이름 없이 불리어지기도 했다"며 "소위 말하는 '운동권 노래'를 만들면 요시찰 인물이 되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녹음테이프나 악보를 통해 알려진 게 아니라, 순전히 사람들 입으로만 전해지다 보니 작사·작곡 미상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김 의장은 "사람들 입으로 전파되면서 노래가 더 다듬어진 것 같고, 일부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이기도 한 김영만 의장은 민주주의민족통일경남연합 상임의장,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초대회장,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마산) 회장 등을 지냈고, 친일청산운동 공로로 '임종국상'(2005년)을 받기도 했다.


태그:#박종철 열사, #김영만 의장, #6월항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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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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