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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소식 없어?"

아이가 두 돌이 지나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다. 둘째를 갖고 싶단 간절한 바람이나 계획은 없었지만, 0.01%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글쎄요. 생기면 낳고요" 하고 어물쩍 웃으며 넘어갔다. 우리 아이와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슬슬 두 살 터울 동생이 생길 무렵, 심사 숙소 끝에 결단을 내렸다. 둘째는 없다.

둘 이상을 키운 분들에겐 나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둘째를 낳아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준다.

"둘째 안 낳으면 계속 놀아줘야 해."

딸이 중학생 될 때까지 친구 노릇해줘야 한다며 겁준다.

"외롭잖아."

가뜩이나 아이와 잘 못 놀아주는 엄마라는 혐의가 있는데, 찔린다.

"남편이 둘째 원하지 않아?"

그가 원하면 내가 낳아줘야 하나?

"둘 중 하나의 생식기능이 끝나지 않는 한 아이는 생길 수 있어."

폐경 직전까지 묻겠다는 거다.

"하나도 진짜 힘들었다"라고 하면, "네가 너무 힘들여 키워 그런다"라고 말한다. "남편이 너무 늦게 온다, 둘 키우면서 독박 육아는 못 한다"라고 하면 자기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했다고, 주변에 도와줄 가족 하나 없었다고, 그래도 혼자 셋 키웠다고 말한다. "2년만 고생하면 그 뒤로는 신세계"라지만, 그 2년간 10년 늙을 거 같다.

우리 아이와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슬슬 두 살 터울 동생이 생길 무렵, 심사 숙소 끝에 결단을 내렸다. 둘째는 없다.
 우리 아이와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슬슬 두 살 터울 동생이 생길 무렵, 심사 숙소 끝에 결단을 내렸다. 둘째는 없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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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악의가 없다고 믿어본다. 너도 당해봐라, 라는 심보로 말하진 않았으리라. 둘 이상 키워보니 결과적으로 더 좋았기 때문에 권하는 거라고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낳고 키울 본인이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든 오지랖을 꽉 다물게 할 한방의 말이 절실하다. "노력하는데 안 생겨요", "전 아이가 싫어요", "하나 낳은 것도 후회해요"... 뭔 말을 해야 할까?

하나 겨우 키워 숨 돌릴만한데 둘째라니. 지금이 딱 좋다! 하나로 족하다는 마음이다. 왜 진심을 받아들여주지 못할까.

가장 얄미운 공모자는 남편이었다. 틈만 나면 둘째 타령을 했다. 친구들에게 둘째 소식이 연이어 들리자 언제 가지냐며 졸랐다. 한두 번은 농담처럼 '됐다'고 말하곤 했는데 반복되자 약이 올랐다. 집에서 잠만 자고 가는 주제에, 아이를 낳는 고통과 키우는 수고가 무엇인지 공감도 못 하던 주제에 둘째라니.

곱게 거절하는 것으론 설득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둘째 타령을 쏙 들어가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아이가 열이 나는 밤이면 그를 흔들어 깨워 같이 밤새웠고, 나까지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가 출근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누워 버렸다.

둘째를 원한다면, 조건을 충족시키라 했다.

'육아휴직 1년 이상 내고, 복직 후엔 매일 오후 7시 전에 집에 올 것.'

그는 어느 것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엉덩이 붙일 새 없이 부려먹은 결과, 이제는 누가 둘째 안 낳냐고 물어보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우, 어우, 둘째 절대 절대 없습니다. 힘들어서 못 키워요"라고 손사래 친다. 돈은 두 번째 문제였다. 아빠로서 감당해야 할 육아의 짐, 그 역시 하나도 족하게 된 것이다.

하나 낳은 것도 미안하다

나는 이왕 낳을 거면, 둘, 셋이 좋다던 사람이었다. 형제, 자매, 남매끼리 서로 싸우고 의지하고 알콩달콩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둘 혹은 셋까지 키우는 엄마들이 부럽다. 분명 하나 키울 때보단 힘들어도 든든하고 충만해 보인다. 자식이 주는 기쁨이 배가 되니 오죽할까. 육아의 고통이 점점 잊히고, 아기 티를 벗고 어린이가 되어가는 딸을 볼 때면, 아기 젖내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면, 꼬물꼬물 아가들에게 눈을 뗄 수 없을 때면, 매일 친구를 찾는 아이를 볼 때면, 또 아이 놀이 상대가 되어 온종일 붙잡혀 탈진할 지경에 이를 때면, 남편과 내가 세상을 뜬 후 혼자 남을 자식을 상상할 때면, 가끔 흔들린다. 그래도, 어렵겠다. 나부터, 살고 싶다.

한 생명을 품은 대가로 치러야 하는 혹독한 입덧, 능지처참 같던 출산. 수시로 겪는 아찔한 순간들, 눈 질끈 감고 다시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와 단둘이 보내야 했던 감옥 같던 독박 육아는 또 겪고 싶지 않다. 근처에 부모님이라도 산다면, 남편이 육아에 더 참여할 수 있다면, 내 체력이 좋았다면, 육아가 할 만했다면?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면서도 행복하게 키우는 엄마들도 많지만 나는 그러한 그릇이 못 된다. 아이 하나도 벅찼다. 안팎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덜컥 낳고 보니 내가 세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정규직 직장인이었던 나는 '헬조선'을 피부로 실감 못 했다. 개인의 '노오력', 능력, 의지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철없이 믿었다. '경력단절 애 엄마'가 되고, 남편은 '돈 버는 노예'가 되어 새벽까지 일하며 '저녁이 없는 삶'을 살면서 실감했다. 원하던 삶이 아니라며, 이게 가족이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탈출하지 못하면서 알았다.

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하면서, 어떻게 아이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지, 아이들을 '인질'로 희망이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건 아닌지.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하자는 말이 죄책감을 덜기 위한 공허한 구호는 아닌지, 회의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잘나서 외국 가서 낳겠네' 하고 속으로 이죽거렸지만, 이 땅에 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만으로도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의 결정이 용기로 와닿았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하자 있는 사람, 완성되지 않은 인생, 성숙하지 못한 어른으로 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인생을 선택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응원하고 싶다. 보편을 따르지 않으면 손가락질당하는 사회에서 소신을 유지해 나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이가 없던 사 년간 매번 적당한 대답을 만들어내는 건 귀찮고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가족, 친척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는다는 통념을 받아들이고 타협했기에, 또 그저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아이를 낳았다.

'외동 고수'가 이리 어려운 줄이야

"아이 키우기에 좋은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 인구를 더 이상 보태지 않겠다. 이런 세상을 지속시키기 위한 재생산을 하지 않겠다."
 "아이 키우기에 좋은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 인구를 더 이상 보태지 않겠다. 이런 세상을 지속시키기 위한 재생산을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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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낳았더니 또 낳으란다. 전방위적 '둘째 타령'에 시달리다 보니 아이를 아예 안 낳는 것만큼이나 외동을 견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한민국 저출산의 원인은 가임기 여성수 감소, 비혼과 만혼, 최근에는 기혼여성 중 무자녀 비율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월간 <노동리뷰> 2017년 12월 호에 재미있는 분석이 보인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녀를 아예 낳지 않는 대신, 자녀를 둘 이상 낳는 비중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내 주변만 봐도 외동보다 둘 이상이 많다.

"외동, 둘째 고민"이란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글이 쏟아진다. 압도적으로 둘째를 낳으라고 권하고, 낳는 거로 결론 난다. 아예 안 낳거나. 아니면 둘, 셋 낳거나로 양극화(?)되는 출산 풍토에서 달랑 자식 하나는 어정쩡해 보인다. 둘까지 낳은 엄마들이 "숙제를 다 한 기분"이라고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세상은 자식 없는 기쁨보다 자식 있는 기쁨을 더 많이 얘기하고 하나보다 둘일 때 기쁨을 더 크게 얘기한다. 자식이 없어도 후회할 거라지만, 자식이 하나만 있어도 후회할 거란다. 외동은 어떤 점에서 부족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낱낱이 지적한다. 4인 가족 이상이 완성된 형태이고 외동은 결핍으로 보는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온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데 왜 다른 선택을 한 타인에게서 단점을 찾아 깎아내리려 하는 걸까?

자식 하나라서 감당해야 할 것, 잃는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저 둘 키울 그릇과 역량, 환경이 안 되기에 낳지 않을 뿐이다. 나에겐 아기를 키우며 얻는 기쁨보다 일하는 기쁨과 성취가 이제 더 절박하다. 둘째를 낳게 되면 다시 최소 2년은 아무것도 못할 테고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할지,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얼마나 전가할지, 남편을 또 얼마나 괴롭힐지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키우는 사람이 못하겠다는데 왜 키워주지도 않을 사람들이 낳으라고 하는 걸까? 

'출산 자주권'을 실행하고 싶다

이제 출산은 가임기 여성 혹은 기혼 여성이 해내야 할 임무가 아니다. 선택지 중 하나가 되었다. 여성의 몸이 출산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당연함도 무너지고 있다. 출산은 여성 스스로가 자기 몸의 결정권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자의 몸'에 간섭하고 참견한다. 마치 '공공재'라도 된다는 듯. 남편이 아이를 원해서, 부모가 손자를 원해서, 또는 사람들이 나를 질타해서, 아이를 억지로 가질 순 없다. 왜 그들의 바람을 '내 몸을 통해' 실현해줘야 하는가. 아이 낳지 않는 여성들을 모성이 없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할 권리, 외동을 고수하는 엄마들에게 애국하라며 하나 더 낳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아이 키우기 힘든 세상에서, 한 몸 보살피는 것조차 버거운 세상에서,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다.

'저출산'으로 나라가 존폐 위기에 처한다고? 책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고요?>에선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손해 보는 건 재계밖에 없다고 한다. 인구가 감소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면 그에 맞춰 사회 구조를 바꾸면 된다고 말한다. 위기에 처한 사회를 살리기 위해 '여성의 몸'을 담보로 잡을 수 없다. 인구 수를 늘리기 위해 여성들을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으로 옥죄느니, 인구가 적어도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지, 어떤 포기를 감당해야 하는지, 평생 어떤 짐을 짊어져야 하는지 낳기 전엔 몰랐다. 아이를 낳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이, 나의 힘이 너무 미약해 절망했다. 남편의 야근을 막을 수 없었고, 나날이 오르는 전세도 막을 수 없었다. 숨조차 마음껏 못 쉬게 하는 미세먼지도 막을 수 없었다. 여성에게 과하게 부여되는 가사 노동에 항거하겠다며 아이를 두고 살림을 무한정 파업할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다 얼렁뚱땅 엄마가 되어버린 나는, 이제야 알게 된 나는, 그래서 더 이상의 출산을 거부한다.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차라리 낳지 않겠다. 아이 키우기에 좋은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 인구를 더 이상 보태지 않겠다. 이런 세상을 지속시키기 위한 재생산을 하지 않겠다.

출산 거부. 이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기가 어떤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며, 살기 힘든 세상에 적극적으로 적응한 결과이다. 각자의 삶, 자신의 몸을 걸고 하는 극렬하며 결정적인 시위다. 그 선택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가임기 여성 모두가 딱 1년간 임신과 출산을 멈출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짜릿한 상상을 한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수한 세상에서 온전한 내 힘으로 통제하고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자 권력으로써 출산 거부를 응원한다. 당신의 비출산을 지지한다. 나는 둘째 아이 출산을 파업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shinnarious/53)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저출산, #출산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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