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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이후부터 1948년 9월 9일까지 한반도는 미소 군정기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좌우익이 극심하게 난립한 때였다. 이 시기에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온 지사, 국내 감옥에서 또는 지하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해방의 그날을 묵묵히 기다려온 지사들도 세상 밖으로 나와 새나라 건설에 저마다 힘을 보탰다.

그 가운데 신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초대 내각 수상이 된 김일성은 북위 38도 이남과 이북에서 정권을 쟁취한 독보적 인물이었다. '이승만과 김일성'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프로필과 남과 북에서 집권한 배경을 요약 정리한다. - 기자 말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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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1875~1965)은 누구?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했다.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899년 1월 고종 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돼 5년 남짓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1904년 8월 9일 특별사면령을 받고 석방됐다. 그해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D.C.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한 뒤 그해 8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했다. 1910년 8월 귀국 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일제의 압박을 받자, 그해 4월 다시 도미했다.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후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했다. 또한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했다. 1918년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신혼시절 이승만 부부
 신혼시절 이승만 부부
ⓒ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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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러시아령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외무총장으로 임명됐고, 그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에 임명됐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 직을 박탈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데다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했다는 것을 탄핵 사유로 꼽았다. 1933년 1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했다.

1933년 11월, 이승만은 국제연맹에서 활동한 것을 인정받으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됐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됐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했고, 그해 9월에는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일성(1912~1994)은 누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김일성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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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현 평양시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다. 어린 시절 보통학교인 창덕학교를 거쳐 1926년 부모가 있는 만주로 건너가 길림에 있는 육문중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타도제국주의동맹·반제청년동맹·공산주의청년동맹 등을 조직하고, 1929년에는 만주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활동하다가 그해 10월 일본 관헌에 체포돼 길림 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1932년 4월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해 장백산맥과 송화강 유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4년에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있는 항일유격부대와 연합해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제1로 2군의 지휘간부로 활동했다. 제2군은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도 불렸다.

1936년에는 통일전선 조직이며 지하혁명 조직인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10대 강령'을 발표, 국내에 광복회 지하조직망을 구축하는 공작을 전개했다. 1937년 6월에는 국내 조직과 연계해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했다. 이후 두만강 일대의 국경지대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그 뒤 소조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일본 토벌군의 추격으로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대원들을 인솔하고 원산으로 상륙했다.

이렇게 입북한 항일유격대들은 북한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그리고 김일성은 처음부터 당과 국가, 군의 우두머리로 자리하면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주도했다. 1945년 10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조직됐는데, 그해 11월에 책임비서로 선출됐다. 이에 앞서 10월 14일에는 평양에서 '김일성 장군 개선환영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일성 부부와 아들 김정일(해방 후 자택 앞)
 김일성 부부와 아들 김정일(해방 후 자택 앞)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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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각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바탕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됐고,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밝힌 11개조 과업과 20개조 정강에 기초하여 반제·반봉건 과제인 지주제를 청산하는 토지개혁과 일본인 소유인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실시했다. 아울러 남녀평등권 법령과 노동법을 발표했다.

1946년 8월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그해 말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돼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됐다.

1948년 3월에 개최된 제2차 북조선노동당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해 4월에는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한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했다.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내각 수상으로 선출됐다.

이승만-김일성 집권 배경 공통점, '신임'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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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포츠담회담 수락으로 갑작스럽게 종전을 맞은 미국은 한반도 남쪽에 친미정권 수립을 위해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웅할거 하는 수많은 인사를 하나하나 저울질했다. 그 가운데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 쟁쟁한 인사들이 물망에 올랐다. 최종 낙점은 이승만이 받았는데 거기에는 군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는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 이승만은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만났다. 이들과 회합을 한 뒤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모두 거절했다.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됐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한 반공주의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했다.

동대문구 갑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이후 대통령 되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이승만은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승만은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라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됐다. 그 즈음 미국은 매카시즘 선풍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반공 일변도인 이승만은 미 군부에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 등 미 펜타곤(군부)의 절대 지지를 받는 이승만이 남한에서 집권하기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 무렵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이승만은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의장에 선출됐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의원들의 선거로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됐다.

 소련대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
 소련대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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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독일은 연합군에게 손을 들었다. 그 이전인 1945년 2월, 소련은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낸 뒤, 180일 이내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키로 서로 양해했다.

1945년 8월 8일은 소련이 미국에게 태평양전쟁에 참전키로 약속한 최종일이었다. 스탈린은 대독일 전에서 승전한 뒤 전쟁으로 지친 소련군의 전력을 한동안 추스르며 그동안 느긋하게 일본 관동군이 중국 만주(동북지방)에서 지치도록 동북아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원자탄을 터트려 하루아침에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거머쥐었다. 그러자 소련은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기로 약속한 대로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기지를 보이며 한반도에 상륙했다. 소련은 이런 날을 대비해 일찍이 만주지방의 동북항일연군을 자기네 영내로 받아들여 소련극동군 소속 동북항일연군 교도려(88여단)를 편성해뒀다.

이 부대는 소련의 조선 진공에 대비하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290여 명의 조선인으로 구성됐다. '조선공작단위원회'가 조직된 것. 이 위원회는 서기에 최용건, 위원에 김일성·김책·안길·서철·박덕산·최현 등을 선출했다. 1945년 9월 19일, 최용건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와 대원들은 소련군 선발대와 함께 원산으로 귀국했다.

최용건과 김책에 앞서다

그때부터 소련은 북조선에 세울 친소정권을 누구에게 맡기느냐를 두고 여러 인물들에 대한 발탁 작업에 돌입했다. 항일연군 출신 가운데는 뛰어난 인물로 최용건·김책 등이 있었다. 최용건은 1900년생으로 김일성보다 나이도, 투쟁 경력도 더 많았다. 김책도 1903년생으로 김일성보다 9세 위였고, 투쟁경력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두 사람을 제치고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로 떠올랐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최용건과 김책은 주로 북만주에서 활동해 조선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견줘 봤을 때 김일성은 동만주와 남만주에서 활동했으며 조선 북부로 진공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둘째, 김일성은 소련 군부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사실은 그 이전 소련은 최종적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두고 고심했으나, 인텔리겐치아 출신 박헌영보다 젊은 빨치산 출신 김일성에 더 호감이 갔다.

일설에는 1945년 9월 김일성이 소련군 측 특별수송기로 모스크바에 비밀리 방문해 스탈린 별장에서 4시간 동안 면담한 뒤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낙점 받았다고도 한다. 아무튼 김일성은 그 즈음 소련 군부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김일성은 입북에서부터 북한에서 집권할 때까지 소련군 군부의 각별하고도 막강한 후원과 배려 그리고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젊은 김일성은 이를 바탕으로 북한 최고지도자 자리에 '땅 짚고 헤엄치듯'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대중 앞에 나타난 이승만-김일성

 연합국 환영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1945. 10.)
 연합국 환영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1945. 10.)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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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의 날 평양학생들에게 연설하는 김일성(1945. 11.)
 학생의 날 평양학생들에게 연설하는 김일성(1945. 11.)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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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김일성은 이승만보다 먼저 고국에 돌아왔다. 김일성은 귀국한 지 20여 일 뒤 비로소 평양시민 앞에 나타났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조선해방경축 집회가 열렸다. 이날 김일성은 레베데프 소련정치사령관과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 연설자로 나섰다. 그는 '모든 힘을 새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인민 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 발전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참다운 인민정권을 건설하자. …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자."

이날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연설 내용보다 그가 젊은 데 무척 놀랐다. 하지만 젊은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는 일은 순탄했다. 게다가 김일성에게는 든든한 항일연군 동지요, 후원자인 최용건과 김책 등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이에 뒤질세라 미국도 김일성이 귀국한 지 한 달 후쯤인 1945년 10월 10일,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직에서 탄핵당한 뒤 그동안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이승만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경유시켜 10월 16일 맥아더 전용기로 귀국시켰다. 나흘 후인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은 이승만을 서울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가운데 조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 그는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웠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큰 세력을 가진 분입니다. 개인의 야심은 추호도 없고, 다만 국제관계에 일생을 바치고 노력하신 분이며, 따라서 군정부 정당에도 아무련 관련이 없고, 다만 개인 자격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하지는 이승만을 극구 추켜세웠다. 이에 호응하면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승만 역시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덕택에 남한에서 정권을 잡는 일은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일과 같았다.

(* 이번 회에서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소장된 이승만, 김일성의 사진 가운데 그 일부를 골라 싣는다.)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재일 동포로부터 환송 꽃다발을 받고 있다(1950. 2. 18.).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재일 동포로부터 환송 꽃다발을 받고 있다(1950. 2. 1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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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수복기념대회 직전의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1950. 9. 29.).
 서울 수복기념대회 직전의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1950. 9. 29.).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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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대통령을 비롯한 유엔군 고위층이 한국 해병부대를 사열하고 있다(가운데 이승만대통령, 왼쪽 밴프리트 미 8군사령관)
 이승만대통령을 비롯한 유엔군 고위층이 한국 해병부대를 사열하고 있다(가운데 이승만대통령, 왼쪽 밴프리트 미 8군사령관)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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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8. 22.).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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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한미 수뇌부(1951. 8. 22. 왼쪽부터 손원일 제독, 토마스 장군, 이승만 대통령, 밴프리트 장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전방부대를 시찰 하는 한미 수뇌부(1951. 8. 22. 왼쪽부터 손원일 제독, 토마스 장군, 이승만 대통령, 밴프리트 장군, 무초 주한 미국대사).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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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항일 빨치산 시절의 김일성 부부
 항일 빨치산 시절의 김일성 부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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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 간부 일동(앞열 중앙 김일성)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 간부 일동(앞열 중앙 김일성)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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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군창립1주년기념대회(앞열 중앙 김일성)
 조선인민군창립1주년기념대회(앞열 중앙 김일성)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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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조선 노동당 중앙당학교 제4기 1년 갑을반 졸업생 일동(앞열 중앙, 교장 김두봉, 그 오른쪽 김일성.)
 북조선 노동당 중앙당학교 제4기 1년 갑을반 졸업생 일동(앞열 중앙, 교장 김두봉, 그 오른쪽 김일성.)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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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4주년기념,  조선화보에 실린 김일성 내각 수상(1949. 8. 30.)
 해방4주년기념, 조선화보에 실린 김일성 내각 수상(1949. 8. 3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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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엮음 <미군정 3년사>에 수록된 글을 다시 가다듬어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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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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