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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동안 200회 정도로 나누어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지 답사 여행기사를 연재했습니다. 지역별로 중요 유적지를 소재했는데,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독자들의 요구가 있어 1592년 4월 13일 있어 임진왜란 시작일부터 사진으로 읽는 임진왜란 7년사를 연재합니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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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율곡로 99의 돈화문(敦化門)은 보물 383호로, 남대문과 동대문 같은 도성의 성문이 아니라 하나의 궁궐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동대문과 같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돈화는 '공자의 덕은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중용>의 표현을 따온 것으로,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라는 의미로 옮겨 쓰인 것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세워졌고, 1609년(광해군 1)에 중수되었다.
돈화문의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서 정오,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 때는 28번 종을 쳤고,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는 33번 종을 쳤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위 사진)을 지나, 다시 도성 서문인 돈의문을 지나 명나라 쪽을 향해 피란을 떠났다.  현재 돈의문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돈화문은 선조가 피란을 갈 때 이용한 유적을 답사할 때 꼭 가볼 곳이다.
▲ 돈화문 종로구 율곡로 99의 돈화문(敦化門)은 보물 383호로, 남대문과 동대문 같은 도성의 성문이 아니라 하나의 궁궐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동대문과 같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돈화는 '공자의 덕은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중용>의 표현을 따온 것으로,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라는 의미로 옮겨 쓰인 것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세워졌고, 1609년(광해군 1)에 중수되었다. 돈화문의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서 정오,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 때는 28번 종을 쳤고,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는 33번 종을 쳤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위 사진)을 지나, 다시 도성 서문인 돈의문을 지나 명나라 쪽을 향해 피란을 떠났다. 현재 돈의문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돈화문은 선조가 피란을 갈 때 이용한 유적을 답사할 때 꼭 가볼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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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30일 새벽 2시경, 선조는 도승지 이항복이 치켜든 등불의 인도에 따라 서울을 탈출했다. 임금 일행은 돈의문을 지나 북쪽으로 달아났다. 선조의 뒤를 따르는 일행은 내시들까지 다 합쳐도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선조 일행은 경기도 고양시와 파주군 광탄면 경계의 혜음령을 지난 뒤 임진강을 향해 줄달음쳤다. 전날 밤부터 퍼붓던 비는 이 무렵 들어 더 심하게 몰아쳤다. 수행원 수도 줄어 있었다. 임금을 따라가 봐야 고생만 더 심할 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여긴 신하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춘 탓이었다.

저물 무렵 화석정에 당도한 선조, 인가를 불태우고

이들 일행은 저물 무렵 화석정에 당도했다. 사람들은 율곡 이이가 머물렀던 화석정을 헐어 그 나무로 강변의 어둠을 밝혔다. 선조는 강을 건너면서 '이 일대의 집들을 모두 부수고, 나루도 폐쇄하라.'고 명했다. 일본군이 민가들을 허물어 그 목재로 강을 건널 나룻배를 만들까 걱정한 끝에 내린 지시였다.

1592년 4월 15일, 이순신은 진해루(진남관의 전신)에서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처음 듣는다. 사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규모가 큰 단층 목조 건물 진남관이다. 국보 304호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군대를 지휘했던 진해루 터에 세워졌다. 오늘날 보는 진남관은 171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1592년 4월 15일, 이순신은 진해루(진남관의 전신)에서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처음 듣는다. 사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규모가 큰 단층 목조 건물 진남관이다. 국보 304호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군대를 지휘했던 진해루 터에 세워졌다. 오늘날 보는 진남관은 171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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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선조 일행은 개성에 도착했다. 그날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 앞바다에 휘하 장졸들을 모았다. 방답 첨사 이순신,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등이 (진남관의 전신인) 진해루로 집결했다. 장수들은 왜적이 침입해 와서 부산진성과 동래성 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에 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들은 아직 임금과 대신들이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간 것을 알지 못했다.

도원수 김명원, 한 번도 싸우지 않고 그냥 도주

5월 2일, 도원수 김명원은 군사들을 이끌고 한강 북쪽에 머물다가 일본군이 강남에 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그냥 달아나버렸다. 부원수 신각 등이 만류했지만 김명원은 "임금의 수레를 지키러 간다."면서 일반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는 단신으로 도주했다. 이에 한강변에 남아 있던 조선 군사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이순신은 이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진을 쳤다. 전라 좌수영 장수들은 어제에 이어 다시 회의를 속개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꺼이 싸울 뜻을 가졌다.(당일 난중일기의 표현)'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날 우리 군사들끼리 사용하는 암호로는 '용호'와 '산수'가 정해졌다.

'서울 숭례문(남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1호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보물 1호였다. 1933년 일본은 국보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숭례문을 우리나라 보물 1호로 지정했다. 그들은 일본 본토 아닌 곳에는 국보가 있을 수 없다고 인식했다.
'서울 흥인지문(동대문)'은 보물 1호이다. 1933년 일본은 '서울 숭례문'에 이어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했다. 
남대문이 보물 1호로 지정된 것은 가등청정이 한양을 접수할 때 통과한 성문이기 때문이고, 동대문이 보물 2호로 지정된 것은 소서행장이 입성한 통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결국 일본이 정한 보물 1호와 2호를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나누어서 재지정한 셈이다. 
사진은, 가등청정이 1592년 5월 3일 새벽에 통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남대문의 (새벽 무렵) 모습이다.
▲ 새벽에 본 남대문 '서울 숭례문(남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1호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보물 1호였다. 1933년 일본은 국보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숭례문을 우리나라 보물 1호로 지정했다. 그들은 일본 본토 아닌 곳에는 국보가 있을 수 없다고 인식했다. '서울 흥인지문(동대문)'은 보물 1호이다. 1933년 일본은 '서울 숭례문'에 이어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했다. 남대문이 보물 1호로 지정된 것은 가등청정이 한양을 접수할 때 통과한 성문이기 때문이고, 동대문이 보물 2호로 지정된 것은 소서행장이 입성한 통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결국 일본이 정한 보물 1호와 2호를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나누어서 재지정한 셈이다. 사진은, 가등청정이 1592년 5월 3일 새벽에 통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남대문의 (새벽 무렵) 모습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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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새벽 무렵 일본군이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과하여 한성에 입성했다. 맞서 싸우는 조선 군대는 없었다. 적은 처음에는 복병이 있지 않나 생각하여 조심했으나 방어하는 조선군이 없는 것을 알고는 희희낙락하며 '조선의 서울'을 휘저었다.

이날 이순신은 "내일(5월 4일) 출정한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녹도 만호 정운이 (조정의 분명한 출정 지시도 없고, 전라 우수영의 군대도 도착하지 않아) 망설이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강력히 출정을 주장했다. 이순신은 탈영한 수군 황옥천을 잡아 목을 벤 다음 군중 앞에 효시했다. 군기를 다잡기 위한 조치였다. (계속)


태그:#이순신, #광해군, #선조, #정운, #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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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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