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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알의 소리> 창간호
 <씨알의 소리> 창간호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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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901-1989)은 4.19혁명 10주년을 맞은 1970년 4월 19일 사재를 털어 월간지 <씨알의소리>를 창간한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민간인을 사찰하고 언론인을 탄압한 상황에서 <씨알의 소리>는 어두운 시대에 불의한 권력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씨알(민초)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유일한 민주주의의 파수꾼 역할을 했다. 이때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 "우리의 내세우는 것" 여덟 가지를 발표하는데 그 중 하나가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습니다"이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력으로 죄 없는 시민과 대학교수, 언론인 등을 체포, 구금하고 잔인하게 고문하여 평생불구자로 만들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런 박정희 정권에 대항해 무력 게릴라전을 구상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줄곧 '비폭력'을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일부 세인의 비난처럼 그가 너무 순진하리만치 '이상주의적' 이었고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는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와 전쟁의 전성시대였고 국내적으로는 고문, 민간인학살, 국가폭력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부국강병'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궤변이 한반도는 물론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고 아직도 인류는 이러한 궤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는 이념적으로는 반공, 획일주의, 군사주의, 흑백논리가 독재체제를 바탕으로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했다. 그러나 권력의 간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사회적 주변부라 할 수 있는 평북용천 시골마을에서 자란 함석헌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사상, 종교와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인으로서, 그는 유교, 불교, 노장사상 그리고 전통 무속신앙과 친숙했다. 또한 그는 소용돌이와 같았던 그의 인생여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념들을 직접 체험할 기회가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일본식민주의는 평화주의에 반대되는 폭력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3.1운동을 통해서 그가 어려서부터 비폭력운동과 종교인의 사회참여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해방 후 소련군정하에서의 북한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물질주의로 함석헌 앞에 나타났고 그것은 그의 비폭력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었다. 1947년 월남 후 기독교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이 보여준 독선, 불의, 부패는 그의 종교적 보편주의에 대치되는 기독교 편애주의였다.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유교의 절대적 가부장주의를 재강조하는 박정희의 '충효'이념은 함석헌의 자유초월사상과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종교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념·정치적 다원주의를 주창한 함석헌의 사상이 결국은 비폭력 민주화운동으로 20세기 한반도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함석헌의 사상에 조직과 제도를 기피하는 성향과 무정부주의적인면이 많았음에도 그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일본유학시절 불의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폭력과 테러도 불사하겠다는 과격파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직접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 종교윤리를 받아드려야 할 것이냐, 혹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정치이념을 선택해야 할 것이냐를 두고 함석헌은 깊이 번민했다. 그 결과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더욱 '효율성'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결국 '덜 효율적인' 기독교를 택하게 된다. 그때 함석헌은 자신이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자'가 되더라도 비폭력의 길을 결코 포기 할 수 없었다.

2차세계대전 중인 일제강점기 함석헌은 독립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한다. 감옥에서 그는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결국 세계를 국가주의로 몰아간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인 국가다. 힘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는 그래서 조폭깡패 집단사이의 관계와 별 차이가 없다. 결국 경제적, 군사적 의미에서 각 국가는 서로 긴장 대치 되어있다. 이 긴장 대치 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추구하고 있다.

국가주의에 대해 평생 반기를 든 함석헌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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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강한 국가주의사회에서는 전체 시민이 철저하게 중앙정부의 통제와 감시아래 놓이게 된다(에드워드 스노든의 고발). 이런 면에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국가이기주의(트럼프가 주장한 'America First'는 그 한예다)와 군사력을 그 근본으로 한다. 이런 집단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석헌은 평생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국가주의는 또한 그 체제유지를 위해 폭력의 사용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때문에, 함석헌의 비폭력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기적인 국가주의를 반대했고 노장의 초월사상을 좋아했다. 그는 민족과 국가 간의 평화는 하느님과 역사의 '절대명령' 이라고 믿었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라고 함석헌은 늘 주장했다. 

예수는 "혁명적이었지만 혁명은 안 했다"라고 함석헌은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혁명적 사상을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치밀한 조직과 엄격한 명령체계다. 그러나 함석헌은 남에게 "이것을 하시오"라고 주문하기를 너무나 싫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씨알의 소리>을 내며 "사상적 게릴라전"은 벌였지만 체 게바라나 호지민 처럼 "무력 게릴라전"은 전혀 구상하지 않았다. 그는 또 평화를 중시하는 퀘이커사상과 간디의 비폭력사상에 매료되었지만 "비폭력을 할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칼을 들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기를, 비폭력 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본다. 한데 한 가지 문제는 '이북에서 당장에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된다면 부지깽이라도 가지고 나가서 맞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당장 눈앞에서 많은 사람이 살인, 강간을 당하는데도, 죽는다는 게 아까워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그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퀘이커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이렇듯 비폭력은 그저 가만히 있는 비겁자의 길이 아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선 그래서 부단한 행동과 용기가 필요하고 고도의 자기 조절과 억제능력이 필요하다. 함석헌의 비폭력은 이렇게 무조건적인 혹은 절대적인 비폭력이 아니었다. 그는 때로 '자기방어'를 위한 완력사용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철저하게 절대자의 힘을 믿었지만 동시에 또한 철저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사람 없이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즉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의 구별을 짓지 않았다. 예수 역시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 이라는 말을 남겼다.

비폭력 국민운동을 일으킨 함석헌

간디(1869-1948)는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간디의 방법을 또한 한국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간디가 사회의 불의에 대해 비폭력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했기에 그런 간디를 존경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3년 독일여행에서 귀국한 함석헌은 곧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투쟁을 하기로. 비폭력 국민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나야 정치가는 아니지만 여론을 일으키도록 하렵니다. 지방순회도 생각하고....1963년 7월 24일."

함석헌은 그의 직접적인 사회참여의 대원칙으로 '비폭력 국민운동'을 일으켜(박정희 군사독재로부터) 민정을 수립하겠노라고 그 결의를 밝힌 것이다.

그래서 1970년 함석헌이 월간지 <씨알의 소리> 를 창간했을 때나, 그후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위해 활동 할 때,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은 그를 따르는 씨알들에게 항상 비폭력원칙을 강조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을 "사회악과 싸워서 세상을 건질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그의 조국이 사회·정치악에 의해서 전복 당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사회·정치악을 소멸시키려고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기독교관 혹은 종교관을 한국의 극우보수층 기독교인은 "너무 정치적" 이거나 "너무 정치 간섭주의" 신앙관으로 보았다. 반면에, 과격한 재야 측과 운동권에서는 함석헌의 민주화 운동을 위한 비폭력원칙을 "너무 종교적" 이거나 "너무 수동적"인 저항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종류의 폭력사용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올바른 목표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법이었다, 비록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실패를 하더라도 함석헌에게 실패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함석헌의 비폭력철학의 뿌리는 노자와 퀘이커의 평화사상 그리고 종교적, 이념적 다원주의라고 평가한다. 그의 다원적 사상은 여러 종교, 정치집단 간의 상호 포용성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향하여서는 폭넓은 인도주의적 관심을 가지게 했다. 종교적 관용주의 입장을 취한 그는 엄격하고 경직된 한국의 종교적 풍토를 부드럽고 탄력 있게 완화시키고자 힘썼다. 이런 그에게 오늘날 남아있는 세계의 주요 종교는 다 인류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정신적 자원이었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종교를 더욱 깊게 이해한 함석헌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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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교를 통해서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개석상에 그는 자신의 종교관을 선포했지만 동시에 모든 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고 힘썼다. 그는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결국 하나라고 느꼈고,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진리도 받아들였다. 그는 기독교를 유일한 인류의 종교나 진리로 보기보다는 진리를 소유한 많은 인류의 종교중의 하나로 이해했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 심지어 과학의 길을 통해서도 성취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그에게 인간이 궁극적 진리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함석헌의 비폭력 휴머니즘은 결국 자신의 종교와 이념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남의 종교와 이념도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는 영감을 내게 주었다.

1974년 11월, 함석헌은 윤보선(1897-1990), 김대중(1924-2009)과 공동으로 민주회복국민협의회(아래 민협)를 설립하고 공동의장이 되었다. 유신 선포 후에 야당인 신민당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민협은 사실상 재야에서 집권당인 박정희의 공화당 독주에 대항해 야당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 민협은 또한 도와 시를 포함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1975년 3월에 이르러 민협은 전국적으로 50여 개 지방본부를 두고 있었다. 이 민협에선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요지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모든 법적, 제도적인 조직기구에 대항해 민주시민은 저항해야할 것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민주적 저항운동으로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세력간의 총단결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 이와 같이 함석헌이 평소 믿던 비폭력원칙이 준정치단체의 행동방침에도 적용된 예가 위와 같은 민협의 경우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그의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공개강연, 공중집회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85년 인천사태 이후 재야는 크게 급진파와 온건파 양극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점차 급진파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어떤 급진파에선 전두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로서 폭력과 테러를 바탕으로 한 사회혁명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함석헌은 독재정권에 반대해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활동했지만, 그는 동시에 어떤 종류의 폭력행사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급진파와 함석헌의 갈등은 불가피 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1988년 서울평화올림픽 위원장의 자리를 수락하고 평화대회에 참석한 함석헌의 행위는 그와 절친한 안병무로 부터도 "거짓 평화주의자인 노태우 정권에 이용당하는 행동"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평화는 '절대명령' 이었고, 그에게 노태우 정권보다 큰 가치는 대한민국 민족이었고, 대한민국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세계평화였다. 1980년 모스코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이 절름발이 올림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이 왜 그렇게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중요시 했나 짐작할 만하다.

함석헌 비폭력사상의 뿌리는 모든 생명전체에 대한 사랑

함석헌 비폭력사상의 뿌리는 모든 생명전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씨앗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형의 사회는 약자가 보호받고 강자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사회였다.

비록 우리는 오늘도 폭력이 판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함석헌이 추구한 이상적인 세계, 폭력 없는 세계는 인간이 영원히 추구할 가치가 아닐까? 힘이 강하고 우세한자가 선택을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힘이 약하고 열등한자 역시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외모나 두뇌를 선택해서 태어난 인생이 어디 있는가? 그런 면에서 모든 인생,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하고 귀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는 흑백논리가 강요되던 20세기였다. 그는 좌 혹은 우, 적 혹은 동지, 기독교인 또는 비기독교인, 폭력 아니면 비폭력 등등의 끊임없는 흑백논리를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세계가 좁아진 21세기는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사람, 문명과 어울려 살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원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시대다. 나와 입장, 믿음, 문화가 다른 개인 혹은 집단과 싫든 좋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가 21세기다. 내가 귀한 만큼 남이 귀하고 내 종교, 내 민족, 내 신념, 내 의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 남의 민족, 남의 신념, 남의 의견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함석헌이 추구한 길은 흑백논리를 뛰어넘고 초월한 21세기에 필요한 다원적인 세계였다. '글쎄요'란 모호한 답변으로 그는 흑백논리를 거부한 '회색분자'로 한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세계, 미래의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강을 약으로 제하고 악을 선으로 다스리는 길 그것이 곧 함석헌이 보여 준 비폭력의 길이었다.

함석헌은 다가올 인류문명도 비폭력을 바탕으로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다원주의를 이뤄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여러 종교와 이념에 대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던 만큼, 그는 세계와 인간의 삶은 다원적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 야요?" 라고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그에게 단지 누구만을 의한 종교나 이념은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각 인간 속에 내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본' 그였기에 이런 '하느님' 에게 고문이나 폭력이 자행되는 것을 그는 결코 용인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거부'가 그로 하여금 독재 권력의 폭력에 의해 시달리는 씨알을 위해 맨몸으로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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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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