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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답게 살아가는 그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몇 해 전 모 노숙관련기관 정신건강팀에서 일할 때 만났습니다.

"저 상담 약속하고 왔는데요. 팀장님이라고..."

긴장된 모습으로 들어오던 그녀.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서울역 좁은 사무실에서 우리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첫 만남
 첫 만남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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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뽀얀 얼굴에 말이 없고 눈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부끄럼 많은 아가씨였습니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몇 번을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하고 싶은 말만 하라고 안심시킨 기억이 납니다.

노숙인이라는 단어도 낯설어하는 젊은 그녀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혹시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 거리에 있는 다른 노숙인에 비해 젊고 일을 하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녀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있었고 독립생활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그녀는 직장을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는 정신과적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 또한 숨기고 일을 했으나,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장에서 곧 눈치챘습니다.

정신과 증상으로 기억력이 떨어져 가게에서 주문받는 일에 어려움이 있었고(나중에 그녀가 말하길, 저와 처음 만나 상담했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환청 등으로 대인관계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직장을 유지하지 못해 그만둔 것이 2년 동안 열 군데나 되었습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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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시기인 청년기에 그녀는 늘 이방인처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녀를 지지하고 도울 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지만, 당장에 지지체계가 되기엔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장녀로 자랐던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일을 하면서 가족에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정신건강에 독이 되었습니다.

부모님 소유의 집도 있었지만, 매달 은행빚을 갚느라 허덕이는 '하우스푸어'였습니다. 그나마 있는 집에도 그녀가 지낼 공간은 없어서, 갈 곳 없던 그녀는 한동안 노숙인 쉼터에 들어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집과 가족이 없는 전형적인 노숙인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분명히 '홈리스' 상태에 놓여있음에도, 원칙적으로 한다면 정신과 무료진료도 주거지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상황이 더 나빠질 때까지 방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족의 도움을 얻기 힘들다는 판단에 홀로 설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강점은 자신의 병을 알고 있고, 치료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신과 치료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꾸준하게 주치의와 관계 형성이 되어 있고, 치료도 긍정적이었습니다.

먼저 일자리 구하는 것을 돕기로 했습니다. 어떤 직종이 그녀와 어울릴까? 함께 찾아보기로 했지요. 우선은 일에 적응을 하기 위해 단순직종이면서 시간제 일이 좋겠다고 서로 의논이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상담하는 동안 그녀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약간 들뜨고 좋아했습니다.

시간제로 일을 할 수 있고 그녀가 가진 여러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노숙인 자립을 위한 카페가 있어 그녀와 함께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카페의 분위기를 보고 직원들을 만난 후 일을 하기로 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는 잘 맺을 수 있을지 걱정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녀를 이해하는 매니저 덕분에 그녀는 빠르게 적응해나갔습니다. 주문을 받고 메뉴를 외우는 것에 힘들어했던 그녀는 하나씩 천천히 일을 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화카페 '길'
 문화카페 '길'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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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진행되는 문화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동료간에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웃기도 잘 하고 농담도 잘 한다는 것을... 그녀의 밝아진 모습이 동료들에게도 활력이 되었습니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에서 그림과 말로 표현하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현재 심리를 담담히 드러내었습니다. 간단한 역할극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나 행동에 점점 자신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카페에는 안정적으로 적응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독립적인 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해 그녀는 또 힘들어했습니다. 안정적인 주거지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지만, 낮은 월급에 맞는 집을 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마침,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 자립 의지가 있는 홈리스를 위한 지원주택에 기회가 있어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원자의 수에 비해, 지원주택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꼼꼼하게 계획서를 쓰고 강한 자립 의지를 보여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집을 처음 본 날 너무나 만족해하는 그녀의 미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독립생활을 원했지만 한편으로 혼자서 모든 걸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보였습니다. 다행히 지원주택에는 그녀를 위해 일상생활, 약물관리 등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있어 한결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지원주택에 입주하고, 그녀는 처음 몇 개월간은 카페에 나가는 것 외에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일을 다녀오면 하루종일 잠만 잤습니다. 마치 유칼리툽스 잎을 먹고 잠을 자는 코알라처럼요.

"팀장님, 저는 코알라 같아요"

잠을 자며 독을 해독하는 코알라
 잠을 자며 독을 해독하는 코알라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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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그거 아세요? 저는 꼭 코알라 같아요. 코알라는 독성이 함유된 유칼리툽스 잎을 먹고 독을 해독하려고 잠을 자죠. 근데 그걸 보는 사람들은 코알라가 게을러서 잔다고 오해해요. 육체적인 질병은 눈에 보이지만 정신적인 질병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도 항상 오해를 받아요."

그녀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지원주택의 사회복지사 분들은 그녀를 염려하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녀가 시리얼만 사먹는 모습을 보고 밥 끼니를 챙겨주기도 하고, 아파서 누워있을 때는 호박죽을 만들어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도 따뜻한 관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카페 일을 하면서 배운 관계 훈련도 지원주택 적응에 힘이 되었습니다. 각자 독립 세대로 구성되어 있으나, 저마다 다양한 어려움을 가진 이들과 한 건물에서 공동체로 생활하는 것에 낯설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열자 다른 입주민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예전에 비해 더 밝아지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정신과 주치의와 상담을 하면서 직장을 유지하기 위한 그녀의 노력도 뒤따랐습니다. 카페에서 일한 지 6개월쯤 되었을까요.

"팀장님, 저 이제 다른 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혼자서 다른 일도 찾아보고 싶어요."

그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제 직장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그 힘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OO회사 공채 면접
 OO회사 공채 면접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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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저 회사에 합격했어요. 공채로 모집했는데 제가 되었어요. 제일 먼저 팀장님이 떠올랐어요."

"축하해요. 얼굴 봐야지. 내일 올 수 있어요? 내일 정신장애 당사자들을 위한 행사도 있는데 와서 도와주고... 너무 축하해요."

짧은 전화통화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그녀는 들뜨고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녀는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됐어요!"
 "제가 됐어요!"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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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맞는 일과 안정적인 주거가 자신감을 길러주어 세상 속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기회가 되었고, 이제는 다른 정신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자신이 가진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노숙인은 아니었어요. 특수케이스죠. 고등교육도 받았고, 상황이 아주 나빠지기 전에 도움을 받았고, 어쨌든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었죠. 이런 저도 회복에 5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사실 지금도 회복 중이죠. 그런데 저보다 여건이 더 어려운 분들은 어떨까요? 그분들을 위해 지원주택이 더 많이 생기도록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려고 하는 그녀가 또 다른 모습으로 어느 날 행복하다며 전화할 것 같습니다.

당당히 자신의 삶에 집을 짓다
 당당히 자신의 삶에 집을 짓다
ⓒ 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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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삶에 따스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녀를 언제까지나 응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저는 동사무소와 복지기관에 수없이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거절 당했죠.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요. 가슴이 아팠지만, 포기하진 않았어요. 절실히,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니, 결국 도와주시는 분들을 만났어요. 혹시 그때의 저처럼 어려움에 처하신 분이 있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걸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지원주택 입주민들과 함께 하는 토크콘서트에 초대합니다.
 지원주택 입주민들과 함께 하는 토크콘서트에 초대합니다.
ⓒ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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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지원주택, #홈리스, #노숙인, #정신장애, #탈시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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