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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하며 성장하다

키에 관련한 다큐멘터리 준비를 한 적이 있다. 잠, 음식, 운동같이 키를 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내용부터, 높여 보이기 위해 쓰는 깔창, 키 제한이 있는 직업, 키가 작아 결혼정보업체에 등록조차 못 하는 사람 등 외모지상주의라는 사회 문제까지. 키를 키우기 위해 생다리를 자르는 수술을 알고 나서는 경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비 작업을 하면서 차츰 그 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개인 문제보다는 그 사람이 그렇게 선택하게 되기까지 사회적 책임 쪽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그때 취재를 했던 열정페이 관련 패션 쪽 관계자를 보면서 '우리가 더 억울한데'라는 생각을 했고, 0.5cm가 모자라 키 제한이 있는 경찰시험을 포기해야 했던 대학생이 신문고에 글을 올리면서 2년 뒤 키 제한이 폐지된 사례를 보며 '한 사람의 힘으로 많은 걸 바꿀 수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은 벌어놓지 못했지만, 방송을 준비하며 사회 문제와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에 대하여 나만의 의식을 보이지 않게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미래 남자친구에 대한 키 제한을 풀었다.

노조 만든 비정규직, 그 안에서 또 비정규직을 만들다?

그런 내 안의 목소리들이 쌓일 때쯤 상위노조 언론노조 아래 방송작가 지부를 만들게 되었다. 출범 전과 이후 활동을 하며 작가들은 왜 노조 가입 많이 안 할까,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 걸까, 계속하여 고민하였다. 그런데 최근 노조 안에서 생긴 에피소드에서 뭔가 깨달았던 점이 있다.

최근 우리 노조 안에서 상근자에 대한 할 만한, 할 수 있는 사람을 정해두고 얘기를 나누었다. 노조 안에서 잘 할 수 있는 것과 부족한 것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었다(그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은 망각하였다). "장점은 놔두고 단점은 다른 사람이 보완하는 게 어떨까" "월급과 시간도 나누고" 그러한 의견들에 그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였다. 필요한, 적당한 시간에 그 사람의 장점만 취하고 약간의 돈은 지불하지만 생계는 보장하지 않는 그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우리는 마치 예비 상근자에게 돈을 주는 사장처럼 굴었고,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 사람은 스스로를 '나는 그것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변하는 우스운 꼴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방송계가 말한 보장하지 않는 비정규직이었다. 본사 제작이 아닌 하청에 하청을 주는 시스템 속에서 스태프들의 고혈을 짜내는 방송 <6시 내 고향>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는 그의 장점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단점만 인정하겠다는 거였다. 상근자에게 노조 일을 A부터 Z까지 다 맡기려고 했던 우리들은 노조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도 이윤을 위한 일이라기보다 조합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그런 일 말이다. 장점만 취하고 단점만큼은 월급에서 깎고,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사고방식.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사람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장점만 가지고 있지 않듯이, 노조 상근자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잘할 수 없다. 단점은 보완하려고 하면 되고, 장점은 극대화하면 더 좋고. 아니, 그냥 있는 그대로도 좋다. 우리는 그의 노력으로 노조에 좀 더 많은 노동자들이 힘을 모으고, 그 힘을 키워나가는데 능력을 펼쳐주길 바라는 상근자, 사람 1명을 바라는 것이지 아이언맨을 지원받는 게 아니다.

나 또한 그 부조리한 구조에 세뇌되어 있었다. 비정규직이 무서웠던 건 내 정신에까지 침범했다는 것이다. 요즘 서점가에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퇴사하겠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그래"가 안 되는 이유> 등이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있다. 그만큼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번 일을 겪으며 난 화들짝 놀라 나인지, 방송작가들인지,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 알 수 없는 메모를 쭉 남겼다.

"자기까지 자기를 쉽게 생각하지 마라. 너는 소중한 존재이다. 
회사, 방송, 죽을 둥 살 둥 만들지 마라.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버려라. 
최선을 다하지 마라. 적당히 해라. 너무 힘들면 관둬라. 
만약 정말 이 일을 통해야 내가 원하는 꿈으로 가는 거라면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말은 하며 살아라." 

비정규직 문제는 철저히 사람을 배제시키고 효율성과 능력 그리고 수치로 사람을 매기는 기업 마인드, 그리고 견고한 정규직들의 리그 바깥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스스로를 창피해했던 우리 안의 작은 마음들이 이런 구조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면 억측일까.

상근자에 대한 기준 합일이 필요하다. 운영위를 서포트하는 역할일지, 서류처리를 중점으로 할지, 내가 생각하는 상근자는 운영위면서도 조합원들과의 다리 역할을 하는, 그러면서 조직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는 활동가와 같은 사람. 직장으로서의 기본은 지키되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월급 받는 사람이라 해도 지적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나? 설사 있다고 해도 큰 피해를 주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당한 비판을 주고받는 자리를 따로 마련하여 서로의 보완이 필요한 점을 논의하면 어떨까. 물론 우린 이제 막 출범했고, 이른 시일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초심, 기본은 지켜야 한다. 

몇몇 노조나 시민단체 외엔 만들어지다가 또는 만들어지고 나서도 좌절된 사례가 많다. 초기부터 내부토론을 통한 합일, 그리고 계속해서 되돌아보는, 누구나 실수 및 생각이 틀릴 수 있지만 우리는 서로 교환하며 시정할 건 시정해야 한다. 그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전체 조직보다는 먼저여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소중하다. 비전을 공유하고, 비전에 대한 소통도 계속해야 한다. 이번 상근자 사건이 우리가 노동에 대해 무엇을 '중하게' 여기는지 신랄하게 보여주었고, 다시 한번 노동자, 노조, 노동에 의미에 대해 한번은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다고 상근자도 정규직처럼, 우리 작가들도 정규직이 되면 다 해결되는 건가?
노동자 인정받으면 끝나는 것인가? 

만약 정규직이 된다면 예전보다는 대우가 나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일 시키고, 최선을 다해, 감사해 하며 일을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건가? 경찰이나 119가 존재하듯이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최소한의 보호기관이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얇은 막이 생긴 것일 뿐. 지금의 우리가 부러워할 필요도, 더 감사해야 할 존재도 아닌, 당연히 있어야 할 보호막이 그동안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정규직이라는 장치를 장착한다 해도 그건 우리 노동에 있어서 사회로부터의 최소한의 방어인 것이지 전체 처우를 다 아우를 수 없다.

왜 그만두지 못하나?

제자 똥 먹인 교수, 겨울날 단체로 옷 벗고 학교 앞에서 서 있어야 했던 체대생들, 땅콩회황 사건에서 등등 갑질을 했던 사람들 욕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궁금하다. 그걸 당한 사람들은 왜?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 친구도 아닌 갑을끼리 길들여진 걸까? 민망하지만 나도 비슷한 맥락의 경험을 하였다. 그날도 늦은 밤 회사에 있었다. 그런데 예정치 않게 갑자기 생리가 터졌고, 천으로 된 의자에 표시를 남겼다. 그걸 옆에서 본 같은 여성이었던 메인 작가님께 나는 죄송해하며 옷으로 가리고(뭐가 그렇게 죄송했을까) 그렇게 회사에서 밤을 새웠다. 왜 집에 갔다가 다시 오겠다, 집에서 일을 하겠다 말하지 못했을까. 그들이 집에 가라고 말하지 않은 걸 탓하고 싶지 않다. 갑은, 굳이, 알아서 챙겨주지 않는다.

우리도 노동자다! 라고 외치지만
노동, 노동자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본 시간이 얼마나 될까.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합당한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왜 회사 그만 못 둬?' '왜 당하고 살아?' '왜 메인 작가한테 그건 못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다 말하지 못해?' 등등 우리 작가들에게 품었던 궁금증들이다. 우리는 내가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여기 아니어도 일 할 수 있다는 상황을 망각하고, '돈'이라는 매개에 묶인 관계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상식 밖의 일도 서로 주고받으며 그 속에 매몰되어 시간이 지나면 누가 뭘 잘못하는 건지도 불분명해지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만, 사장만 바뀌었다고 전체가 다 바뀌는 게 아니듯 조합원, 아직 가입하지 않았지만, 소식 듣는 작가들, 피디들, 우리 운영위들, 시청자들까지. 다 그게 맞물려야 한다. 모든 노동문제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전체 다 바뀌어야 우리도 바뀌는 것이니 노조 안 해'라는 오류에는 빠지지 마시길. 쿨해 보일 수는 있으나 그건 스스로 내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자기 신뢰 부족을 변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일을 왜 하는가. 정말 좋아서? 생계? 진실로 묻자. 어설픈 대답을 하며 무조건 참고 있는 거라면…방송계 갑질 시스템에 나도 한 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노조 외에 다른 노조 모임에도 가면 서로들 억울함을 토로한다. 우리는 다 억울하다. 하지만 억울함 대마왕을 고르기 전에, 나는 그 상을 만드는데 일조한 면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내 일터, 노조 안에서 건강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자.



태그:#방송작가유니온,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퇴사하겠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그래가 안되,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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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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