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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이낙연 총리는 '제주 4.3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반란'이라고 정의한 이영조씨를 총리자문기구인 시민사회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했다.( 관련기사 : 제주 4.3은 폭동-광주 5.18은 민중반란" 이영조 진실위위원장의 기막힌 역사인식 )

이러한 이 총리의 인사조치에 대해 '제주 4·3 위원회'는 "적폐를 청산하겠다던 문재인 정부가 4·3을 폄훼해 온 적폐 인물을 시민사회발전위원으로 위촉한 것은 자가당착 이며 미래가 아닌 잘못된 과거로 회귀하겠다는 인사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규탄했다.(관련기사 : 제주4.3 폄훼 이영조, 문재인 정부 시민사회발전위 위촉)

이영조씨는 지난 2012년 총선시 새누리당 강남을에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제주 4.3 폭동'과 '광주반란' 발언이 문제가 되어 당시 새누리당에서 조차 이영조의 공천을 취소한바 있다. 또한 이영조씨는 이명박 정권시절 진실화해위원회 영문보고서를 '영어가 엉터리'라는 허위주장으로 '금서조치'를 함으로써 기자를 포함한 번역, 감수자들에게 명예훼손을 당하여 패소한 바 있다.   (관련기사 "뉴라이트 출신의 황당 지시, 이제라도 사과하라" )

더욱이 이영조씨는 지난해 촛불항쟁에 대해서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대규모 촛불 시위를 보는 내 눈에는 이명박 정부 초기 벌어진 광우병 사태가 겹쳐 보였다. 그때도 확인되지 않은 괴담 수준의 의혹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한국경제, 2016년 10월 30일)"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낙연 총리는 새누리당에서도 역사인식이 문제가 있다고 공천을 취소한 이영조를 국무총리 자문기구인 시민사회발전위원으로 위촉한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는 독이 되어 현실로 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총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있는 것일까?

이런 어두운 소식 가운데 노무현 정부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던 임영태 선생이 최근 과거사정리에 관한 그의 연구서인 <한국에서의 학살 - 한국 현대사, 기억과의 투쟁>을 발간했다. 그는 진실위에서 국문조사보고서 발간을 총괄했고 나는 진실위에서 영문보고서 발간을 총괄했다. 그래서 우리는 '업무상' 가까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이번 저서는 기자에게도 개인적으로 더욱 의미가 깊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시기까지의 민간인 학살을 최초로 총정리했고, 특히 좌익에 의한 학살까지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다음은 지난 16일부터 이 책에 관하여 저자와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은 국가의 책무를 원천적으로 지키지 않은 것"

 임영태
 임영태
ⓒ 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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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저 책 발간을 축하드린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끄러운 우리역사의 한 부분이다"라고 했는데, 저자가 이 책에 실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역사의 한 부분"을 선정했던 기준은 무엇이었나?

"국가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대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기로 암묵적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수 없는 국가의 폭력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경우,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이라고 하는 국가의 책무를 원천적으로 지키지 않은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인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보도연맹원들에게 전향해 생각을 바꾸면 생명을 보장하고 안전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전부터 보도연맹원들을 믿지 않고 감시했고, '특별한 존재'로 구분해서 취급했다. 그리고 전쟁이 나자 평소 관리하던 명부를 바탕으로 예비검속해서 학살했다. 국가가 국민을 기만하고 위기상황에 처하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서 집단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는 부끄러운 것을 넘어서는 국가의 전쟁범죄행위로써 처벌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20세기 후반의 전쟁범죄행위로 비난받았으며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처벌받은 구유고연방의 '보스니아 학살 사건'이나 '코소보 학살 사건'보다 훨씬 심각하고 엄중하다.

다른 민간인 학살 사건도 본질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이 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먼저 도망갔다. 이승만은 시민들에게 거짓방송으로 피난조차 못 가게 만들었다. 유일한 도피길인 한강철교마저 끊어버려서 도망갈 길도 막아버렸다. 그런 이승만이 돌아와서는 도피하지 못한 시민을 처벌했다. '부역혐의자 처벌'이라는 것인데, 이는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를 탓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리산, 덕유산 등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빨치산 토벌을 하는 과정에서 젖먹이 어린애와 어린아이들, 부녀자, 노인 등 무장이나 저항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을 주로 학살한 행위는 전쟁 범죄행위다. 전쟁 전에 있었던 10월 항쟁과 여순사건, 제주4.3사건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과 함께 국민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에 대한 학살,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재소자에 대한 학살, 그리고 직접적인 학살행위는 아니지만 한홍구 교수의 표현처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실상의 학살 행위와 다름없는 국민방위군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거기에 좌익에 의한 학살과 미군에 의한 학살까지 모두 부끄러운 우리역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정선거를 수사하는 것이 어째서 과거에 발목이 잡히는 일인가?"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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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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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과거청산의 중요성을 많이 언급했는데,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나라가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며 '과거' 보다는 '안보'와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역사가로서 이런 이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드는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지난 2012년 12월에 있었던 18대 대선은 명백한 부정선거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이른바 민주국가다. 그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바로 선거다. 그래서 '대의제 민주국가'라고 한다. 따라서 선거의 공정성이 훼손되면 민주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부정선거는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가장 엄중한 범죄행위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뒤흔든 부정선거 행위를 수사하는 것이 어째서 과거에 발목이 잡히는 일인가? 대선 부정행위와 4대강 사업의 비리, 자원외교라는 명목으로 벌인 사익 챙기기 등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처벌 공소시효도 지나지 않은 사건들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많은 폐해들은 당시에 처벌받아야 할 인간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그냥 넘어간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대선 개입과 부정선거 행위를 엄중하게 처벌했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리고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과거사 청산은 역사에서 정의를 세우는 문제로 한국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이는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대량학살, 식민지 지배, 파시즘 또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 건설적인 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사적인 보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백인정권의 인종차별로 고통 받았던 남아공을 비롯해 군사독재정권 시절 심각한 학살과 인권침해가 있었던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엘살바도르 등의 중남미국가, 내전으로 집단학살이 자행된 우간다,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시에라리온, 르완다 등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과거사 청산을 위한 활동이 있었거나 아직도 진행 중이다. 또 유럽 국가이지만 뒤늦게 민주화를 이룬 스페인도 내전과정과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있었던 학살과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거사 청산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과거사 청산 문제는 제3세계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이룬 선진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파시즘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등의 구유고연방 전쟁과정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과 캄보디아(크메르)에서 있었던 크메르 루주군에 의한 인종청소와 집단학살(킬링필드),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한 국제전범재판도 과거사 청산 활동의 하나다.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전쟁범죄행위를 다룬 도쿄전범재판(극동전범재판)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의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에서 많은 것들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은폐되고 왜곡된 한국 현대사의 모든 진실이 바로 잡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를 잊어버리면 그 민족이나 국가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왜 지금까지도 역사의 정의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가? 바로 친일파청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출발점이 잘못 되니까 그 뒤가 엉망이다. 이제는 과거사가 되어 버린 역사적 사건에 대해 현실의 법정에 세울 수 없다면 역사의 법정에라도 세워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자손들이, 또 앞으로 우리들의 자손들이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 4.19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부정선거관련자의 처벌,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 제한, 부정축재자처리 등을 위한 입법조치는 취했으나 민간인 학살 등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이 문제는 장면 정부의 근간인 민주당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장면 정부는 1955년 통합야당으로 출범한 민주당 신파가 기반이다. 민주당 신파는 장면을 중심으로 한 흥사단계, 자유당 탈당파 등의 반이승만세력으로 형성되었다. 민주당 구파는 해방 후 김성수, 조병옥 등 친일지주 출신의 보수세력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민당(한국민주당)과 신익희 등 범임정계 일부가 결합한 민국당(민주국민당)이 그 뿌리다. 따라서 민주당은 구파든 신파든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반공적이다. 노동과 토지 등 사회문제만 놓고 보면 이승만보다 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측면도 있다. 이승만과 민주당 신구파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는 공산당(남로당), 인민당 등 좌익세력과 김규식(민족자주연맹), 홍명희 등 중도세력, 김구(한독당) 등 저항적 민족주의세력 등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힘을 합쳤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에는 권력배분을 놓고 갈등·대립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신파+구파)은 야당이 되고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모인 자유당은 여당이 되는 것이다. 당시의 민주당은 본질적으로 이승만과 차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인사들 중에는 민간인 학살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인물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주당 구파의 영수인 조병옥이다. 민주당의 많은 인사들은 친일혐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장면 정부가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이나 친일파 청산 등 과거사 정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에게 민간인학살 문제는 목 안의 가시와도 같았다"

- 5.16 쿠데타 후 박정희는 경북 유족회에서 활동하던 이원식씨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데 그 이유는? 또 민간인 학살유족회 간부들을 대거 체포, 탄압하는데 왜 그랬을까?
"박정희를 비롯한 5.16쿠데타 세력에게도 민간인학살 문제는 목 안의 가시와도 같았다.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들은 군과 경찰 등의 국가무력, 특히 그 가운데서 군 CIC(특무대), 헌병대, 경찰(사찰, 정보), 그리고 청년방위대·서북청년회·대한청년단 등의 우익단체, 자유당·민국당(한민당) 인사들이다. 당연히 5.16세력들 가운데도 민간인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정보계통에 있었던 인사들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5.16의 최고지도자인 박정희와 김종필도 민간인학살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민간인학살 사건에는 미군 첩보기관도 깊이 관련돼 있다. 결국 민간인학살유족회가 이 문제를 들춰내게 되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문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5.16주체와 미국 등도 자신들의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은 경북 유족회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민간인 학살유족회 관련자들에게 엄청난 폭력과 테러, 린치를 가한다. 이원식씨처럼 사형선고를 내리고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역단위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엄청난 폭력과 고문, 린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5.16 이후 거의 전국에 걸쳐 이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된다. 그 결과 이 같은 폭력과 고문에 의해 사망하는 사람들도 여럿 생겼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렇게 고초를 겪은 사람들은 후에 민간인학살 관련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된다. 너무나 큰 폭력 앞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지난 노무현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을 하지 않은 유족들 가운데는 이 같은 과거의 경험이 주요하게 작용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신청을 했다가 또 다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학살자는 떵떵거리며 살았고 피해유족들은 숨죽이며 살았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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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경주 내남면 명계리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가족 30여명이 경찰관 이홍열, 대한청년단장 겸 민보단장 이협우 등 10여명에게 총살당한 황당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
"역사의 도시,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유적의 도시 경주 외곽에 가면 일가친척 30여명이 한 순간에 몰살당한 장소가 있다. 내남면 명계리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이 이들에 걸쳐 경찰관 이홍열, 대한청년단장 겸 민보단장 이협우 등 10여명에게 총살당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6.25전쟁도 일어나기 전인 1949년 7월 30일~8월 1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힌다. 1947년경 이 마을로 이사를 온 박세현이라는 사람이 1948년경 손씨네 벼 다섯 가마를 훔쳤다가 이장 김원도에게 발각되어 마을을 떠날 것을 종용받고 악감정을 품게 된다. 그 뒤 박세현의 친동생 박도환이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에 가입하면서 이장 김원도 집안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여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 사건의 주범인 이협우는 다른 곳에서도 학살을 자행해 모두 98명을 학살한 혐의로 4.19 직후에 검찰에 고소되었다. 이협우는 이 사건으로 장면 정권 시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쿠데타 후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5.16쿠데타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반면에 4.19 후 시신을 발굴, 수습하고 경주지구 양민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해 활동한 김하종은 5.16 직후 구속되어 7년을 선고받았다. 학살자 이협우가 이승만 정권 아래서 2대, 3대, 4대 국회의원으로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유족들은 숨죽이며 살았고, 4.19혁명을 맞아 가까스로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으나 5.16으로 다시 숨죽이며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 그동안 1946년 일어난 '10월 항쟁'을 두고는 대구폭동, 10.1소요 등으로 지칭해왔다. 미군정의 경우는 '소요'로, 보수는 '폭동'으로, 또 진보는 '항쟁'으로 표현해왔다. 저자는 '10월 항쟁'을 어떻게 보는가? 또 왜 그렇게 보는가?
"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저명한 한국 현대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보는 것처럼 농민만이 주체였던 것도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항쟁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학생, 지식인이 함께 참여하였다. 소수 사람들의 즉자적인 반항이 아니라 대규모 민중이 참여하는 거대한 항쟁이 가능했던 것은 일제시기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직후의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 변혁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0월 항쟁은 전국적인 조직성과 체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경북지역의 군 차원에서는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좌파 인물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은 변혁운동세력의 조직성과 대중의 자연발생적 폭발력이 혼재되어 나타났으며, 인민대중의 변혁적 열망과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인민(민중)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10월 인민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과 좌익세력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시위와 봉기 등의 저항운동으로,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10월 초 경북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미군정의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등 주변지역 경찰 증원과 전술군 동원, 나아가 우익청년단의 지원 등 압도적인 물리력에 의해 대구·경북의 항쟁은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12월까지 남한 전역에 이어졌다. 10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가혹한 강제식량공출 등 정책적 실패였다. 여기에 친일경찰의 발호와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지연이 근본원인으로 작용했다." 

"여순사건도 근본원인은 대구 10월 항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 박정희도 가담한 1948년 여순사건은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왜 국가무력의 근간인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고 보나?
"여순사건도 근본원인은 대구 10월 항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친일파의 발호,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지연, 통일정부 대신 단독정부 수립, 식량난 등 경제정책 실패 등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미군정 대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이런 잘못된 정책기조는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남한의 민중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수주둔 14연대 군인들에게 제주도 주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동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남로당 조직원이 중심이 되어 동족상잔을 거부하며 봉기를 시도했고 군인들이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군인들이 쉽게 소수의 사람들의 선동에도 동조했던 것은 여수14연대의 경우 특히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던 경찰에 대해 반감이 컸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경찰은 친일파 일색으로 반민중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으나 국방경비대 시절부터 군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상층부는 박정희를 포함한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었지만 사병들과 중하급 간부들 중에는 학병출신 등 민족의식이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 친일경찰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순봉기 주동자들이 친일경찰 척결을 주장하자 쉽게 동조했던 것이다. 결국 14연대 군인들은 동족학살을 거부하며 봉기해 여수를 장악하게 되었고, 여기에 남로당 등 좌익조직과 대중단체 등이 결합하면서 민중봉기,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 1948년 11월 1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이승만은 한 달 보름간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다. 왜 이승만은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제주도 계엄령에 대해 언론에 숨길 정도로 비밀에 부쳤다고 보나?
"계엄령은 군인들도 그랬지만 민간인들에게도 제주도민을 재판절차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즉결처형해도 되는 여의봉처럼 여겨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동안 군경은 3,4세의 어린아이에서부터 80대에 이르는 노인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총살했고 그 때문에 희생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제주희생자 대다수가 이 시기에 학살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로 계엄령 선포는 사실상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이었다. 그 때문에 제주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고 있던 계엄사령관인 제9연대장 송요찬은 계엄령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한국군은 계엄령에 대해 무지했다.

계엄령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것은 미군이었다. 미군은 계엄령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내려 강경진압과 무차별적인 학살을 사실상 방조, 지원, 교사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최고 지도부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이승만 정권의 최고지도부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계엄령'이 위헌이라는 인식하고 그 책임을 현지 군사령관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계엄령 선포 사실조차 쉬쉬하며 숨겼던 것이다. 마치 현장 책임자인 사령관이 계엄령을 내린 것처럼 인식하게 한 것으로 고도의 기만책이고 책임회피다."

"역사의 단죄까지 비켜가게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나?"

- 지금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아래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위원회에 대한 소개와 현재 편찬위에서 하고 있는 일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한국현대사를 통해 민주국가의 기본정신과 질서를 훼손하고 인권을 파괴하는 등 반헌법적 행위를 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원과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반헌법적 행위와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른 인간을 단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들의 모습을 역사에 기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법적으로 처벌 가능한 인물들이야 당연히 법의 심판과 단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역사의 심판, 역사의 단죄까지 비켜가게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맹자의 말처럼 역사의 엄중함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위원회는 올해 2월 16일 반헌법행위자 열전 집중검토 대상자 405인의 명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반헌법적 행위를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405명을 집중검토대상자로 선정해 그들의 반헌법적 행위를 집중적으로 조사, 검토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최종 확정되면 그들의 행적을 정리해 역사에 남기려는 것이다.

위원회가 집중검토 대상자를 선정한 기준은 '대한민국의 공직자 또는 공권력의 위임을 받아 일정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그 직위와 공권력을 이용하여,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를 지시 또는 교사한 자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에서 주요 임무를 수행한 자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를 방지하거나 고발할 책임이 있으면서 이를 적극 묵인 또는 은폐한 자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 또는 행위자를 적극 비호한 자' 등이다.  현재 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 문재인 정부는 2018년부터 2기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의 활동을 재개할 계획이다. 과거 진실위에서 일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년 새로운 진실위가 설립된다면 이전 진실위와 비교해 특별히 어떤 점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 분들이 구체적인 내용을 훨씬 더 잘 알고 1기 진실위의 문제점,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를 테면 진실위의 위상이나, 조사권한, 인력, 조직, 시스템, 재단 설립 등의 문제는 어차피 국회를 중심으로 여야의 정치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것보다는 내 입장에서는 2기 진실위가 활동을 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가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다. 학살과 고문·조작 등을 행한 범법자의 신원을 명확히 밝혀야만 한다. 지금으로서는 법적으로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으로라도 정확히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조사과정에서 확보되고 발굴된 자료들(기록 자료와 기관의 공문서, 참고인과 가해자·피해자의 구술자료 등)이 최대한 널리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들어가 버리면 그걸 접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된 인원으로 줄어들 뿐 아니라 접근 과정도 매우 까다롭다. 따라서 진실위 활동의 최종결과물인 조사보고서뿐만 아니라 그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활용된 여러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넓게 확보될 수 있어야 한다."  

임영태씨는 누구?
임영태는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덕유산 자락의 시골마을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역사이야기를 듣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의 정치현실과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으나 뜻하지 않게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20대와 30대의 청년기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관계하며 보냈고, 30대 후반에는 푸른나무 출판사에 잠시 근무했다. 출판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대중적인 인문사회 교양서 집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다수의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교양서를 펴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역사·인문사회 교양서를 쓰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사)현 대사연구소 연구위원, 통일뉴스 기획위원으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 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공식보고서 발간 작업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위원회의 모든 조사보고서를 읽어야 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의 학살>을 집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인문사회 관련서 집필 활동에 주력하는 한 편,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새로 쓴 한국 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태양이 비껴간 나라 멕시코·쿠바를 가다>,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인류이야기 현대편 1∼3>, <인류이야기 근대편 1∼3>, <거꾸로 읽는 한국사>,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북한 50년사>, <대한민국 50년사>,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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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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