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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9월 2일 개막한 '제주비엔날레2017 투어리즘'의 다섯 번째 코스는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예술공간 이아(이하 이아)다. 역사도시의 재생과 관광이라는 주제로 만들어진 <코스5 제주시 원도심 예술공간 이아>에서는 총 13팀(14명)의 작가가 참여한 작품 19점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 오픈과 동시에 이아 직원들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김범준 작가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2017, 혼합재료, 가변설치)". 매력적이다 못해 마력을 발휘해 스스로가 점차 훼손되어가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바닥에 뽀얗게 내려않은 형광 주홍 가루 밭이 사람을 홀리는 모양이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외쳤다. 안내 문구, 금지선, 접근 차단 봉 그리고 전시 지킴이의 쉼 없는 주의! "밟지 마세요!", "들어가지 마세요!" "훼손하지 마세요!"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은 놀라운 파괴력을 발휘하게 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무언가에 홀린 찰나에 작품 속으로 직진. '아'하고 입이 벌어졌지만 아직 소리가 나지 않은 그 때. 작품이 훼손되는 현장에 여러 차례 존재했던 나는 망연자실했다. 단체관람객에게 작품을 해설하는 도중에도 훼손은 발생한다.

2017, 혼합재료, 가변설치
▲ 김범준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 2017, 혼합재료, 가변설치
ⓒ 김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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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훼손되고 복구하기 어려운 것들. 이 문장 앞에는 생략된 어절이 있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만, 쉽게 훼손되고 복구하기 어려운 것들. 여러 번 소리 내 말해 본다. 동공이 활짝 열리는 순간, 마음이 뭉클하고 눈가를 뜨겁게 만드는 어떤 것. 머리가 시원해지고 몸을 가볍게 만드는 어딘가. 아름답다. 예쁘다. 곱다. 이상하다. 신비롭다. 자꾸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그런 것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주 쉽게 훼손 되곤 한다. 주로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김범준 작가는 환상의 섬, 제주의 이미지를 주홍색 형광 안료로 표현했다. 첨가제와 함께 물 또는 기름으로 이기면 물감이 되기도 하고 화장품이 되기도 하는 아주 고운 입자의 가루다. 날선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장착하고 '삽질'을 하는 작가. 건설현장의 노동을 흉내 내는 퍼포먼스 후, 그 현장을 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매일 매일 새로운 길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작가의 드로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아주 적절하고 보기 좋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동물과 곤충의 흔적이었다. 아, 여기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의 흔적은 참 아름다운데 사람의 흔적은 왜, 이토록 파괴적인 것일까.

슬리퍼를 신은 관객이 작품 속에 들어간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참담함이 생생하다. 반면 매일 생겨나는 예측불허의 길들을 보면서 최근 제주 어디에서나 마주하게 되는 공사현장을 떠올렸다. 이 작품은 정말, 여러모로 제주도랑 닮았다.

지네, 바퀴벌레 등이 지나간 흔적이 드로잉으로 남았다. 크기도 다양하다. 퍼포먼스 후 현장에서 빠져나온 작가의 발자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객들의 실수로 생겨난 흔적이다.
▲ 김범준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 클로즈업 지네, 바퀴벌레 등이 지나간 흔적이 드로잉으로 남았다. 크기도 다양하다. 퍼포먼스 후 현장에서 빠져나온 작가의 발자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객들의 실수로 생겨난 흔적이다.
ⓒ 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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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김범준 작가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 보았다.

"관객분들이 작품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이번 전시 주제인 '제주'와 '관광'에 대해 생각하다가 땅과 돌을 떠올렸어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자갈요. 공사 현장에서는 모래더미 중에 고운 입자를 걸러내기 위해 거름망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가루의 입자가 이미 곱기 때문에 거름망은 제 기능을 못하고, 삽질은 의미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삽질'하는 거죠. 제주도에 닥친 개발 열풍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작품 설치 후 예상치 못한 상황들의 연속에 당황했지만 이로써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올해 24:1의 경쟁률을 뚫고 예술공간 이아 레지던시에 입주하셨지요. 23회 제주 4.3미술제 <회향, 공동체와 예술의 길> 출품작 "Layer_금족지역(2017, 혼합재료, 가변설치)" 이후로 이아 레지던시 제1기 입주작가 <프리-뷰전> 출품작 "Desire Fall(2017, 문서파쇄기 외 혼합재료, 가변설치)", 제주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두 개까지 아주 활발하게 활동 중이세요. 제주에서의 작품 활동 전반에 대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제주에서 의미가 큰, 규모있는 전시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경험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죠. 레지던시를 거점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아 레지던시는 거주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아주 큰 장점인데요. 덕분에 어느 때보다 작품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모자라요. 제주에 내려 온 첫 달은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활발한 탐방이 불가능 했고, 6개월쯤 지나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제주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주만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제야 알 것 같은데, 퇴실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네요. 정말 아쉽습니다. 일 년이 짧게 느껴져요."

-올 가을, 주민연계 교육프로그램으로 "목공수업: 공기 청정기 만들기"도 진행되었고 진로직업체험 탐방을 온 초.중.고등학생들의 멘토가 되어주기도 했는데요. 제주도민들을 직접 만난 소감도 궁금합니다.

"미술계에 속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학생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이 과거의 회화 작품, 서양화에 머물러 있는데 고정관념을 깨주고 싶었습니다. '이것도 예술인가?'의문을 갖게 되는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반응이 굉장히 좋았죠. 제 작품 중 "아버지와 친해지기 위한 방법(2017, 싱글채널 비디오 6분 40초)
https://youtu.be/tituG3jqxFw"을 보여주었을 때에는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어요. 그 비명에는 여러 의미들이 녹아있는 것 같아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에는 바라문화예술교육연구소와 오현미 큐레이터가 추진하고 있는 2017 사회예술프로젝트 <원도심 예술서핑>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삼도 2동 어르신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깁니다. 기억의 지도예요. 덕분에 원도심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을 직접 뵙고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생겼어요. 레지던시 입주 초기에 이런 기회들이 많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 내내 김범준은 감각이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환경에 자신을 내던지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상황에 집중하여 작품을 해나가는 것은 동시대 예술의 필수불가결한 경향이자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역량이기 때문이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 역시 작품 제작과정부터 전시까지 현장의 즉흥적인 요소들이 많이 끼어들었다. 이는 그만큼 틈이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어느 작품보다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 흥미로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오는 12월 15일, 김범준 작가를 포함한 이아 레지던시 입주작가들은 결과보고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김범준 작가의 홈페이지 "https://beomwork.modoo.at"에 방문하면 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온라인 상에서 영상 작품 관람도 가능하다.

예술공간 이아
예술공간 이아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옛 제주대학교 병원 건물을 개축 공사하여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제주목사가 근무했던 관덕정 북쪽의 관아를 '상아(上衙)', 판관의 근무처 찰미헌이 있었던 두 번째 관아가 '이아(二衙)'다. 이후 근·현대 100년 간 자혜의원, 도립병원, 제주의료원, 제주대학교병원으로 사용되며 제주도의 의료 중심지로서 도민들의 삶과 죽음, 건강을 살피는 기능을 해 왔다. 이아 터는 제주도민들에게 정치·행정으로서 돌봄, 의료로서 돌봄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예술공간 이아는 그 돌봄의 역사를 계승하여 문화와 예술로 삶의 고단함을 해소하고 일상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160평에 달하는 갤러리와 시각예술 작가 레지던시, 창의교육실과 연습실, 카페, 서점 등의 시설을 갖췄으며, 문화 예술을 매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공간대관도 가능하다.

제주시 중앙로 14길 21 예술공간 이아
문의: 064)800-9331~7
http://artspaceiaa.kr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제주문화예술재단 계간지 <삶과 문화> 2017 겨울호 vol.67에도 수록될 예정입니다.



태그:#예술공간이아, #제주비엔날레, #제주도, #김범준, #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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