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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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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다섯 명은 결국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차라리 천형이라고 믿고 싶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지난 18일부터 사흘간 마지막 세월호 장례식을 시신 없이 치렀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긴급 기획을 편성해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이들에게 조그마한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좋은 기사 원고료)은 전액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전달됩니다. (후원하기) http://omn.kr/olvf [편집자말]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2학년 남현철 학생의 아버지 경원씨가 17일 저녁 목포신항에서 아들의 관에 넣을 일기를 살펴보고 있다. 경원씨는 2014년 4월 16일 참사 이후 일기를 쓰면서 하루 하루를 버텼다. ⓒ 소중한
"죽고 싶을 때마다 한 장 한 장 썼다. 정말 괴로워서 죽고 싶을 때마다... 아이를 못 찾아서 죽지는 못하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들이다."

세월호에 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현철 학생(단원고)의 아빠 경원씨는 기자에게 "견디기 위해 썼던 것"이라고 말했다. 가슴에 묵직하게 쌓이는 것들을 털어놓고 싶어도 붙잡고 얘기할 수가 없어서 연애편지 이후 처음으로 쓴 글이었다. 그게 벌써 기간으로 3년 7개월이고, 분량으로는 거의 책 한권에 육박한다.

지난 20일 시신 없는 아들의 관이 타올랐다. 경원씨는 뼛조각조차 찾지 못한 아들 대신 새로 마련한 교복과 속옷, 신발을 관에 넣어뒀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아들을 기다리며 썼던 자신의 일기도 인쇄해서 함께 넣었다.

<오마이뉴스>는 그 일기의 일부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2014년 5월 ○일] 아이와의 거리는 불과 35m인데...
사고 1년, 부표만 떠있는 세월호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출발해 사고해역에 도착한 유가족 사이로 침몰지점을 표시한 부표가 보이고 있다. ⓒ 이희훈
한 달하고도 이틀이 더 흘러갑니다. 세월은 바닷물처럼 변함없이 잘도 흘러가는군요. 저의 가슴에는 아직도 우리 아이와 함께 웃던 그 시간 같은데, 현실은 싸늘한 한 달하고도 이틀입니다. 어제 함정을 타고 바지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바지선을 도착해서 한눈에 부표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아래 우리 아이가 있다는 게 괴롭고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습니다. 이제 아이와의 거리는 35미터 남짓한데 이 가까운 거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네요! 우리 아이는 알겠죠? 아빠가 위에 와 있는 걸! 

작업 시작한지 두어 시간 남짓 지났을까? 작업종료란 신호를 들었을 때 전 꾹꾹 참았던 설움이 밀려오면 오열을 토해놓았습니다. 부표를 향해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아이야 도대체 어디에 있냐? 그 수많은 시신들이 나왔는데 넌 왜 어디에 있기에 나오지 않니? 혹 큰 가구 속에 묻혀있는 거니? 한 달이 넘도록 뒤지고 뒤지는데도 안 나오는 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야속했습니다. 서러웠습니다. 한바탕 오열을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작은 함정으로 갈아타고 육지로 향하고 있네요.

[2014년 5월 ○일] 아이를 보았습니다!
20일 오전 경기도 안산 제일장례식장에서 세월호 미수습자 발인이 엄수되는 동안 남현철군의 부모 남경원, 박상미씨가 손을 잡고 있다. ⓒ 이희훈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를 잃고 난 후 한 번도 꿈속에 보이지 않던 아이를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꿈속에서라도 아이를 만나고 싶었는데 드디어 아이를 만났네요! 꿈속에서 내 아이는 다섯 살 쯤 정도에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눈을 감은 채 물 속에 잠겨있었습니다!

잠에서 깬 후 현실이 서럽네요. 다시 보고 싶어 핸드폰에 있던 어릴적 사진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잠든 이 새벽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 밖에 없는, 내게는 심장 같은 아이인데. 하나님은 왜 저의 모든 것인 아이를 데려갔을까요?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이런 일이 일어난 이 나라가 원망스럽고 제 아이를 지키지 못한 제 자신이 제일 원망스럽습니다!

아직도 아이의 시신조차 못 찾은 저로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 밉네요. 그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언제가 될지 모를 기다림 밖에는... 이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비가 조금만 와도 가슴이 아려옵니다. 자신이 없네요. 겁이 나네요.

[2014년 6월 ○일] 오열하는 저 사람이 왜 이리 부러운지
세월호 단원고 미수습자 남현철군의 발인을 마친 아빠 남경원씨가 20일 오전 경기도 안산 단원고를 방문해 단원고 운동장 흙이 담긴 주머니를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희훈
늦은 밤 오늘 배 4층 선수 부분에서 학생 주검이 나왔다데요. 혹시 우리 아이일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담배 한 개비를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아이이길... 이것도 욕심일까요? 욕심이라도 좋네요. 이곳의 오십여 일간은 진짜 지옥 같은 삶입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초조함과 기대 속에서 한통의 전화가 오네요. 해수부 직원의 전화번호.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한참 후에나 받았습니다. 상대방에서 들려오는 비통하고 짧은 목소리. "아버님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현철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소리 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는 상황에서 저편에서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면서 오열하며 실신합니다. "아~ 저분의 아이구나" 다들 못 찾아 남아있는 가족들은 부러움과 못 찾은 서러움에 또 이곳 진도 체육관은 다들 울음바다가 되네요.

참 웃긴 건 오열하는 어머니가 왜 이리 부러운지. 아이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아이에 주검을 찾는 건데, 실종자의 숫자가 줄어가면 갈수록 남아있는 가족들은 갈수록 허탈감과 공포로 힘들어하네요.

밖을 나가서 다시 한 번 담배 한 개비를 피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아이야 조금만 더 참아. 다음에 찾는 아이는 니가 될 거야. 아빠가 새로 아디다스 체육복 사왔으니 그 추운 곳에서 나와. 내가 꼭 널 감싸서. 같이 집에 가자 아이야..."

[2014년 10월 ○일] 왜 제게 실종자란 꼬리표를 달아주셨나요
바다에 비친 실종자 가족들의 기다림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가족들의 그림자가 바다 위에 비치고 있다. ⓒ 이희훈
미간을 찌푸리며 옅게 눈을 떠 보니 높은 철제 천장이 보입니다. 상상이나 했을까요? 진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제가 진도에서 190일째 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신께 원망하고 제가 살아온 삶을 반성하면서 매달려 보지만, 전 아직도 190일째 4월 16일입니다.

아이를 잃은 것도 기막히고 미치겠는데 신은 아이의 시신조차 저에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 많은 희생자들 중에 실종자란 꼬리표를 저에게 달아주셨나요" 어느 날은 울면서 다시는 신을 믿지 않겠다고 협박도 해보고, 어느 날은 아이의 시신만 돌려주면 내 평생 삶을 당신을 섬기면서 살겠노라고 빌어도 보지만, 신은 아이를 돌려주시지 않는군요.

하지만 전 기적을 믿을 겁니다. 분명 신은 아이를 돌려주실 것이고 전 아이를 돌려받기 위해 저의 안에 있는 거짓과 탐욕을, 내 몸 속을 깨끗하게 비워 놓겠습니다.

[2015년 10월 ○일] 진도를 떠나 돌을 쌓으며 기도합니다

요즘은 매일 산에 다니며, 산중턱 어느 바위에 돌탑을 쌓으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얼마나 돌탑을 높게 쌓아야 아이를 만날 수 있는지요. 바람이 심한 날이면 어김없이 돌탑은 무너져 내리지면 자식을 잃은 아비의 마음은 아이를 놓을 수가 없기에. 무너져버린 돌탑을 한돌 한돌 기도를 하며 쌓아갑니다. 첫돌의 기도는 아이를 뼈만이라도 돌려달라는 기도이고 두 번째 돌의 기도는 아이가 혼탁한 세상이 아닌 평화롭고 평온한 곳에서 쉴 수 있게 바라는 기도이며 세 번째 돌의 기도는 우리 부부고 아이를 가슴에 묻고 남은 평생을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의미 있는 돌들이 모여서 우리 아이가 있는 곳까지 전달되길 매일매일 기도합니다."

[2017년 9월 ○일] 은하와 다윤이를 보냈습니다
25일 오전 서울 시청 도서관 앞에서 세월호 피해자 단원고 고 허다윤, 조은화양의 이별식이 열리고 있다. 두 사람의 영결식은 세월호가 인양되며 일부 유골이 발견해 사고 3년 5개월 여 만에 치러졌다. ⓒ 이희훈
한없이 푸른하늘에 한편의 수채화처럼 그려지는 가을하늘이네요. 이곳 목포 신항의 생활은 여느 때와 다르게 다들 무거운 분위기입니다. 3년을 같이 동고동락했던 은하네와 다윤네가 떠난답니다. 같은 아픔으로 같이 웃고 같이 울던 그들이 이제는 아이를 보내주려 떠난다네요.

올라가는 가족, 남아 있어야만 하는 가족, 부러움과 다행이란 묘한 감정 속에 남아있는 우리들은 서로가 말을 아끼며 더욱 더 움츠려집니다.

[2017년 10월 ○일] 그토록 미워했던 세월호에게

나의 아이를 태우고 침몰한 세월호. 맨 처음 배를 보았을 때는 무서웠습니다. 그 괴물 같은 배가 우리 아이들을 다 삼켰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밀어 다 부셔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목포신항을 거치된 후 하루를 보고 이틀을 보고 그렇게 전 세월호와 같이 가을을 맞이하네요. 다 부셔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그 배가 이제는 인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세월호를 보며 아이를 빨리 돌려달라는 말로 시작된 하루가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묻습니다.

"차디찬 바다 속에 일찍 데려오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친구야. 이젠 아이를 돌려주면 안 되겠니. 니가 힘든 만큼, 나 또한 죽을만큼 힘들었어. 이제 그만 화를 풀고 내 아이를 놓아주면 안 되겠니?"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2학년 남현철 학생의 아버지 경원씨가 17일 저녁 목포신항에서 아들의 관에 넣을 일기를 살펴보고 있다. 경원씨는 2014년 4월 16일 참사 이후 일기를 쓰면서 하루 하루를 버텼다. ⓒ 소중한
태그:#남현철, #세월호 미수습자, #진상규명, #장례식, #수색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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