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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다섯 명은 결국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차라리 천형이라고 믿고 싶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오는 18일부터 사흘간 마지막 세월호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오마이뉴스>는 긴급 기획을 편성해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이들에게 조그마한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좋은 기사 원고료)은 전액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전달됩니다. (후원하기) http://omn.kr/olvf [편집자말]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씨의 형, 권혁규군의 삼촌 권오복씨가 세월호 선체를 둘러보고 생각에 잠겨 있다. ⓒ 이희훈
"내 동생 재근아. 목포에서 배 탄다던 네가 뭐가 급해서 인천 세월호를 탔냐. 그래서 시신도 못 찾게 만드냐. 참… 서글프지만… 이제… 끝내야 되겠다."

지난 15일 밤, 어떤 질문에도 막힘 없이 빠르게 대답하던 권오복(63)씨가 순간 말을 멈췄다.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가시라도 목에 걸린 듯 단어를 천천히 내뱉었다. 포도막염 탓에 충혈된 왼쪽 눈만큼이나 오른쪽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권씨를 2014년부터 지켜본 한 봉사자는 그를 '팽목항 산증인'이라고 불렀다. 권씨가 동생(권재근·52)과 조카(권혁규·6)의 뼈 한 줌이라도 찾겠다며 버텨온 시간이 무려 1313일이다(11월 18일 기준). 지친 유가족들이 하나둘 떠날 때도 사고해역을 지켰던 그다.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218일, 팽목항에서 862일, 목포 신항에서 233일. 그는 말했다. "아직 미수습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고.

"박근혜 정권 때, 그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 했어요. 다들 세월호를 감추기에만 급급했으니까. 그래서 제가 오기로 더 버틴 것도 있어요. 자 봐라, 여기 지금 시신 못 찾은 미수습자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이걸 보여주려고. 아무도 없으면 신경도 안 쓸 텐데, 가족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다르잖아요."

오기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씨의 형이자 권혁규 군의 삼촌인 권오복씨. ⓒ 이희훈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씨의 형이자 권혁규군의 삼촌 권오복씨의 신항만 숙소에는 입구에는 노란리본이 붙어 있다. ⓒ 이희훈
권씨는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중에서도 좀 특이하다. 자녀를 잃은 부모(박영인·남현철 가족), 남편 잃은 아내(양승진 교사 가족) 등 다른 가족이 대부분 0~1촌인데 반해, 권씨는 미수습자 권재근씨와 2촌인 형제 관계다. 재근씨네 가족 네 명이 모두 제주도 이사를 가려 세월호를 탔다가 사고를 당한 탓이다. 일가족 4명 중 제일 어린 딸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사고 당시 여섯 살이던 딸은 아직도 겨우 아홉 살이다.

말이 1313일이지, 참 긴 시간이다. "지루하고 짜증 나고, 잠깐 희망했다가 다시 또 노심초사해야 했던 긴 세월"이었지만, 권씨는 서울 집 이사로 비운 나흘 빼고는 매일 그 자리에 있었다. 3남 4녀, 7남매 대가족이지만 큰형님과 큰누나는 70대로 나이가 너무 많았고, 여동생들은 먹고살기 바빠 있을 수가 없었다. 사건은 벌어졌으니 누군가는 기다려서 수습해야 했다. 그래서 진 "십자가"였다.

인터뷰 시간 대부분 권씨는 무덤덤했다. "사고 초기엔 늘 화가 나 있었다"는 말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쩌면 거센 바닷바람이 일상인 항구에서 네 번의 겨울을 날 수 있었던 건 오히려 그 무던함 덕이었는지 모른다. "세월호는 세월이 가면 잊히나요." 낮에는 실없는 말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잠들 때까지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시며 휴대폰 사진첩을 뒤졌다.

"딴 건 없고, 그냥 동생과 혁규 사진 보면서 버텼죠. 이왕 시작한 거 끝장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래. 그래도 내가 권재근이 형이니까.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으니까."

해경 출신 막내 재근이

15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 입구에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씨와 권혁규군의 사진이 노란리본과 함께 부착되어 있다. ⓒ 이희훈
권씨보다 7살 어린 동생 재근씨는 어릴 때부터 "형님, 형님" 하며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동생이었다. 서울 중랑구에서 함께 나고 자라며 그가 직접 먹이고 입혔던 막내다. 각기 가정을 꾸린 뒤에도 명절 때는 꼭 따로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비웠다. 2014년 4월 16일 사고 전날에도 점심을 먹기로 했었지만, 갑작스러운 동생 사정으로 약속을 미뤘다. 그리고 끝이었다.

만날 사람이 생겨 지방에 들렀다 가야 한다던 동생이, 목포에서 배를 탈 거라던 재근이가 왜 인천발 세월호에 타고 있었는지 그는 아직 모른다. 다만, 동생 부부가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찾아 헤맸을 거라는 사실은 안다.

"걔는 해경 출신이어서 수영을 잘 해요. 혼자였으면 당연히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권씨가 들은 참사 당일 오전 상황. 동생네 가족과 다른 부부가 함께 쓰던 객실에서 6~7세 어린 조카들은 옆자리 '장씨 아저씨'와 객실 침대 커튼을 열어젖히며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해졌단다. 배가 고파진 조카들이 아저씨를 쫓아 편의점에 따라 나섰고, 재근씨 부부와 장씨 아내만 객실에 남아있을 때 세월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동생네 객실이 3층 좌현 B-3, 맨 앞쪽이에요. 근데 제수씨는 4층 로비 맨 뒤쪽 계단 밑에서 시신을 찾아냈어요. 아이들 찾겠다고 뺑뺑 돌아다니다가 거기까지 간 것이죠. 같은 방 여자(시신)는 침대가 있던 객실 자리에서 그대로 발견이 됐고, 부인은 엄한 4층에서 발견되고, 동생은 흔적도 없고. 그럼 모든 게 판단되지 않아요? 아이들 찾으려고 몸부림 친거지."

같은 방을 쓰던 장씨는 무사히 살아왔다.

"그 사람이 나중에 저한테 와서는 '애들이 절 살렸습니다'고 하대요. 자기는 그때 잠이 들락 말락 했는데 아이들이 커튼을 젖히며 장난을 치는 바람에 잠을 깨서 같이 편의점엘 갔다고요. 자기 부인은 그대로 잠이 들었고, 나중에 시신이 침대 자리에서 (시신이) 발견됐다고요."

분노

세월호 수색종료 미수습자가족 기자회견을 앞둔 16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세월호가 거치 되어 있다. ⓒ 이희훈
'세월호 침몰사건' 2일째인 2014년 4월17일 오전 전남 진도 인근해 침몰현장에 세월호 선수의 일부가 보이는 가운데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이희훈
권씨는 아직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권씨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가장 원망스러운 게 사고 뒤에 제대로 처리 안 한 거예요. 그때 대형 크레인이 4대나 왔었는데, (선체) 옆에 진열만 하면서 서 있다가 100억을 받아갔어. 차라리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게 크레인에 걸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아무 것도 안 하고 서 있기만 하다가 돌아갔어요. 돌아보면 그렇게 이해 안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조명탄도 그렇다. 당시 정부는 하늘로 쏘아 올리는 조명탄을 동이 날 정도로 썼지만, 유가족이 나중에 제안해 도입한 오징어잡이 배 조명(집어등)보다 효과가 적었다고 한다. 집어등이 조명탄보다 더 환하고 오래 갔다. 권씨는 "박근혜 정부는 돈은 돈대로 비싼, 하지만 효과는 거의 없는 방법들을 썼다"고 말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이렇게 된 게 딱 자기 업보 탓, 인과응보라고 봐요. 본인이 자초한 거죠. 자기가 저지른 일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니까."

희망고문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씨 가족의 유류품. 함께 발견되지 못한 혁규군의 옷과 딸, 아내의 옷들이 이삿짐 속에서 나왔다. ⓒ 이희훈
세월호 인양이 결정되던 날(3월 22일), 기막힌 우연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구치소로 가고 세월호가 목포 신항에 들어오던 날(3월 31일), 권씨는 다시 한 조각 희망을 품었다. 저 배만 들어올리면, 이제 저 안으로 들어만 가면, 조카와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과연 얼마 후 동생네 가족이 제주도로 가져가던 이삿짐 트럭이 세월호 안에서 발견됐다. 그 트럭에서 악취가 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해 발굴단이 말하길 시신 냄새 같기도 하다"기에 그는 생각했다. 드디어, 드디어 끝이구나. 하지만, 그 악취의 정체는 이삿짐 트럭 뒤 실렸던 3년간 썩어간 식료품이었다.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이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허리둘레는 34인치에서 32인치로 줄어들었다. 체중이 얼마나 줄었는지는 관심이 없어 재보지 않아 모른다. 60 평생 큰 병 한번 치러보지 않은 그는 지난 3년 7개월 간 내과, 치과, 안과 안 가본 데가 없다. 유가족들이 다 그렇듯 권씨도 스트레스로 잇몸 뼈가 무너져 내려, 위아래 어금니 세 개를 다 임플란트로 바꿔야 했다.

인양되어 눈 앞에 보이는 세월호는 점점 절망으로 변해갔다. 배 안이 점점 빈 깡통이 돼가는 걸 보면서 그는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손가락질 받기 전에 떠나자. 이제 찾을 수도 없으니 박수칠 때 떠나자. 저는 그렇게 결정했어요. 지금 보면 배는 텅 비었고, 수색할 곳은 딱 한 군데 남아있는데 거기도 별 기대는 안 해요."

손가락질

권씨는 "손가락질 받기 전에 떠나겠다"는 말을 자주 반복했다. 2014년 당시 2G 폴더폰을 쓰고 있던 그는 이제는 인터넷을 비교적 능숙하게 다룬다. 그에게 물었다. 누가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더냐고. 그가 답했다.

"아이고,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들이 댓글 다는 것도 그렇고… 저 이우현, 그 경기 용인서 나온 국회의원(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발언하는 거 보세요. '미수습자 9명 찾겠다고 1000억을 들여야 하느냐'고… 솔직히 국민의 절반 이상은 이제 세월호에 관심 없잖아요. 김진태 의원이 세월호 얘기하는 거 한 번 보세요. 어떤지 다 알잖아요."

김진태 의원(자유한국당·강원 춘천)은 미수습자 9명이 남아있던 2015년 4월 "세월호를 인양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괜히 사람만 또 다친다"며 인양을 반대했다. 그는 "(죽은) 아이들은 가슴에 묻는 것"이라는 망언도 했다. 그 수많은 댓글들. 인양 비용은 비싸다… 국민 혈세만 아깝다... 허공을 떠도는 말들이었지만, 가족들에겐 비수였다.

권씨 생각에 조금 더 지나면 박수는 커녕 손가락질 받으며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유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사를 가려 동생 재근씨가 챙겨놨던 옷가지들, 조카 혁규가 좋아했던 커다란 초록색 거북이 인형… 이 모든 것들은 주인의 시신 대신 오동나무관에 입관해 태워져 재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인이자 엄마 한윤지씨가 안치된 인천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으로 간다.

그렇게 긴 기다림이 끝나고 나면, 권씨는 어디로 가게 될까?

빈손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씨의 형이자 권혁규군의 삼촌인 권오복씨 ⓒ 이희훈
"구로 집에 들어갈지 어쩔지 아직 모르겠어요. 사회에 나가서 뭘 해야 할지도... 일단은 '미수습자 가족' 타이틀을 떼고, 그냥 좀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엔 없어요."

세월호 이전, 건강식품을 팔아 생활하던 그는 미수습자 가족으로 사는 동안 수입이 뚝 끊겼다. 대출금을 갚지 못한 탓에 17년간 살던 서울 신도림동 집을 팔아 구로구 산꼭대기에 작은 집을 구해야 했다. "정부가 찾아줄 텐데 왜 그 궁상이냐"며 권씨를 답답해하던 부인과는 서먹해진 지 오래다.

직계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과 달리 권씨는 정부에서 따로 배·보상금이 나오지 않는다. 직계 가족이 아니어서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3년 7개월 그는 세월호 붙박이였지만, 그냥 그렇게 빈손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뭐,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처음엔 어렵고 적응에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또 살게 되겠죠. 적응되고 나면 다시 일을 한 번 찾아봐야죠."

오히려 그는 동생에게 미안하다.

"내 동생 재근아. 참, 서글프지만…. 끝내야 되겠다. 혁규야. 너도 인제 그만 저 세상 좋은 데 가서 잘 살아라. 미안하다. 이제 끝내야 되겠다…"

태그:#세월호 미수습자 가족, #권재근 권혁규, #세월호 미수습자, #권오복, #세월호 수색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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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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