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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는 우리 청바지가 빅토리아 폭포를 가기 위하여 요하네스버그 공항 대합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만난 만델라 상 만델라는 우리 청바지가 빅토리아 폭포를 가기 위하여 요하네스버그 공항 대합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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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교사 남아프리카 5개국 연수단 '청바지'는 나미비아의 스와코프문트 일대에서의 홍학과 돌고래, 물개 등의 탐사와 쿼드바이클링을 마치고 마지막 탐방지인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빈투후크로 향했다. 빈트후크로 돌아가서 5일 간 대여해 사용했던 캠핑카와 야영장비 등을 반납하고, 비행기를 이용하여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으로 이동하기 위한 것이다.

빈트후크에서 케이프타운까지는 비행기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케이프타운의 말란 공항에 내려서는 예약되어 있는 렌트카를 타고 캐이프타운 시내의 숙소로 향했다.

케이프타운은 지중해식 기후라서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 겨울비가 내리는 케이프타운의 말란 공항 케이프타운은 지중해식 기후라서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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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에 도착하였더니 지금까지 남부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공항 주변은 물론이고 케이프타운 시내를 향해 들어가는데, 사방에는 초록의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건물들은 서구식으로 잘 지어져 있고, 도로들도 잘 정비되어 번듯한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남부아프리카에서는 5월~9월이 겨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곳은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을 띄고 있어서 연간 강수량은 많지 않지만 주로 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여름에는 고온 건조한 기후가 계속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케이프타운에서 여행을 하는 다음 날은 비를 만나기도 하였다.

이런 기후의 영향 때문인지 케이프타운 시내 곳곳에는 가로수도 울창할 뿐만 아니라 길가에는 많은 꽃이 피어있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마른 풀이나 나무, 모래로 뒤덮여 있는 갈색의 칙칙하고 삭막한 풍경이 아니었다. 겨울 아프리카에 와서 오랜만에 초록 풍광에 눈이 호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전원도시가 널려있고, 사방은 꽃으로 덮여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 케이프카운은 가는 곳마다 꽃이다 아름다운 전원도시가 널려있고, 사방은 꽃으로 덮여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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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다가가면 갈수록 케이프타운의 상징과도 같은 테이블마운틴이 점점 크게 시야에 들어왔다. 케이프타운의 외곽을 지나면서는 흑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주택 밀집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의 1960~1970년대의 빈민촌과 같이 허름한 슬레이트나 블로크, 목재 등으로 지붕과 벽이 지어졌다. 그렇지만 시내를 향해서 들어갈수록 정원이 잘 가꾸어진 전원 주택들과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였다.

우리 청바지팀은 이곳 케이프타운의 항구 지역인 '워터프론트'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아파트형 호텔인 '써클 호텔(Circle Hotel)'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깜짝 놀란 것은 2인 1실이라고 빌린 호텔의 규모였다. 커다란 룸에 침대가 2개 놓여있고, 거실 공간이라든가 화장실, 조리실 등이 엄청 넓어서 한국에서 찾는 펜션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실내 공간에 놀랐다. 최두열 팀장한테 물어보았지만 그렇다고 호텔 가격이 그리 비싸지도 않았다.

우리 청바지팀은 짐을 풀고 인근 스넥코너 같은 곳에서 점심을 각자 해결했다. 이후 렌터카를 이용하여 맨 먼저 찾은 곳은 보캅 지역이다. 300여 년 전 네덜란드가 이곳 케이프타운을 개발하기 위하여 말레이시아라든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 지역민들을 강제로 끌고 와서 도시 개발에 투입하거나 농장을 개척하는 노역을 시킨 곳이다.

이곳 건물들이 알록달록한 이유

네델란드가 케이프타운을 건설할 당시 식민지 지역이었던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인들을 강제로 끌고와서 거주하게 했던 지역이다.
▲ 케이프타운 보캅지구 네델란드가 케이프타운을 건설할 당시 식민지 지역이었던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인들을 강제로 끌고와서 거주하게 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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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광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 관광지가 된 보캅지구 많은 광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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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2차선 정도의 좁은 길거리에는 차와 사람들이 붐볐다. 길 양 옆으로는 파스텔 톤의 연분홍, 연청색, 연노랑 등의 벽칠을 한 2, 3층 콘크리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건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아파르트 헤이트 정책(흑백차별정책) 폐기 선언을 환영하는 뜻에서 건물들의 외벽을 그렇게 도색했다는 것이다.

곡류, 토산품, 한약재 등 동남아와 중국산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 보캅지구에 있는 동남아 전통 상점 곡류, 토산품, 한약재 등 동남아와 중국산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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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바지는 이곳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 옷가게 등을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식료품 가게에서는 동남아 지역의 여러 가지 곡물들과 중국 한약재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300여 년 전에 끌려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회교도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정집을 들여다 보거나 사진을 찍는 것은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는 안내판 등도 보였다.

동남아인들이 끌려온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박물관의 전시물들
▲ 보캅지구 박물관에서 동남아인들이 끌려온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박물관의 전시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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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절 강제로 이곳에 끌려와 생활할 때의 생활 용품들
▲ 말레이지아 등의 생활 용품 식민지 시절 강제로 이곳에 끌려와 생활할 때의 생활 용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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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바지팀은 보캅지역의 박물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이라고 하여 대단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이곳으로 동남아인들이 어떻게 하여 끌려왔는가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는 설명하는 글과 사진 등이 벽에 붙어 있고, 그들이 당시에 사용하였던 가재도구나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으로 끌려와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가에 대한 안내인 것이다.

그들이 이곳으로 끌려오게 된 배경과 역사를 기록해 놓은 전시물들
▲ 강제로 끌려왔던 회교도들의 역사 그들이 이곳으로 끌려오게 된 배경과 역사를 기록해 놓은 전시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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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은 남아공에서도 서양인들이 진출한 역사가 제일 오래된 도시이다. 1488년 네델란드 사람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최초로 희망봉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후 이렇다 할 서양 사람들의 진출이 없다가 1652년에 앤 빈 리베크가 이끄는 동인도 회사의 4척의 배가 테이블 만에 도착하여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서양인들의 이주가 이루어지고,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이 진출하게 된다.

그 후 프랑스, 독일인 등의 이주가 있었고 1795년에 영국인들이 케이프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으면서 본격적으로 영국이 이곳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인 등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인들이 이곳에 진출하여 목축을 하거나 금광을 개발하면서 터를 잡아나갔다. 이들 네덜란드인을 중심으로 하는 백인들을 '보어'인들이라고 한다.

월드컵대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유럽에 온 느낌이 들도록 하는 잘 정비되어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 케이프타운은 잘 정비되어 있는 서구 도시와 다름없다 월드컵대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유럽에 온 느낌이 들도록 하는 잘 정비되어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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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보어인의 전쟁은 영국이 이곳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초기 전투에서는 보어인들의 투쟁으로 영국이 몇 차례 전투에서 패하기도 하였지만 숫자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영국군은 2차 보어전쟁에서 보어인(아프리카너)들이 세운 나탈공화국, 트란스발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지역은 영국령이 되지만 영국이 이들의 자치를 인정하여 '자치 식민지'가 된다. 이들은 자치를 하면서 흑인들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고 백인 남성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줬고, 선거에서 친 보어파 정당이나 후보들이 승리를 하면서 백인 중심의 식민 자치시대가 열리게 된다.

보이스카우트의 역사가 시작된 곳

나는 남아공에서 일어났던 보어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교직 초창기 때가 떠올랐다. 서울의 문창초등학교로 초임교사 발령을 받아 갔더니 젊다는 이유로 교감이 보이스카우트 지도자 훈련을 가라고 했다. 경기 고양시 서삼릉 인근에 있는 보이스카우트 수련원으로 지도자 훈련을 받으러 가서 보이스카우트가 탄생하게 된 역사를 알게 되었다. 당시 교육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어전쟁에서 소년들의 훌륭한 척후활동이 보어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이곳 전투에 참가했던 육군 중장인 베이튼 포우엘이 이끄는 부대는 보어전쟁에서 방어전을 잘 치러 승리를 하였다. 그 전쟁에서 척후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던 소년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고, 소년들을 잘 훈련시켜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회 봉사를 위하여 소년단을 만들 결심을 하고 1907년 런던의 브라운시 섬에서 최초로 소년들 20명을 모아 야영생활을 하면서 스카우트 운동은 시작되었다.

이들은 야영에서 필요한 지도보기, 추적활동, 맺음법 등의 기능을 익혔다. 또한 이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심', '남에 대한 봉사', '규율 준수', '항상 준비하는 정신' 등 정신교육과 생활습관을 가르친 게 효시가 되어 스카우트 운동은 전세계로 퍼져나간 청소년 운동이 됐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출발이 군대라는 것이 거슬린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김종필 등이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도록 한 것이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아람단이라는 청소년 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학교에 보급한 것 등이 이와 상통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도 몇몇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소년단'을 조직하여 이들에게 엘리트 의식을 주입하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의 전위로 이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나라들이 있고, 과거에도 이런 노력들이 계속되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제2차에 보어전쟁에서 오렌지자유국과 트란스발의 수도가 함락이 되면서 영국령이 되었지만 자치가 실시되었다. 1908년 케이프 식민지에서도 보어파가 승리하여 선거를 통해 1910년 남아프리카연방이 결성되게 된다.

그후 네덜란드계가 이끄는 아프리카너가 정권을 장악하고, 흑인들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는 등 각종 인종 차별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931년에 웨스터민스터헌장에 의하여 남아프리카연방은 영연방 자치국으로 인정이 되면서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후에도 계속 흑인들의 참정권과 피선거권이 제한되고 각종 인종 차별법이 강화됐다. 소수의 백인들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유색인종 차별 정책이 계속됐고, 흑인들의 무장 투쟁 등도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1960년 헨드릭 프르부르트 정권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올림픽 참가도 거부됐고 영연방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영연방에서 탈퇴를 하고 국가 원수를 영국 여왕에서 대통령을 원수로 하는 공화제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것이 통과된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국가 체제를 바꾸면서 아파르트헤이트는 더욱 강화되었지만 1966년 헨드릭프르부르트는 암살을 당하게 된다.

맨델라가 18년 간 갇혀 있었던 감옥이 있는 로벤섬, 테이블마운틴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이다.
▲ 로벤섬 맨델라가 18년 간 갇혀 있었던 감옥이 있는 로벤섬, 테이블마운틴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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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는 1918년 케이프주에 자리잡고 있던 템부족의 추장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비트바네르스란트 법학부를 졸업한 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가입하여 청년동맹의장 등을 거쳐 1961년 '민족의 창'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사령관이 되었다. 이런 활동으로 1962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케이프타운의 로벤섬에서 18년 등 총 27년 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989년 드 클라크 총리가 대화노선을 채택해 만델라를 석방하고 모든 민족이 참가하는 총선거를 실시한다.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를 이끌고 있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됐다. 그는 '화해와 관용'이라는 정신으로 흑백 화해 정책은 지속하면서 경제발전을 꾀하다가 1997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을 터보 음베키에게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만델라는 이런 노력으로 클라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여전한 '흑백차별'... 진정한 민주주의 이루길

백인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만 흑인들은 아직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장작을 팔고 있는 주민 백인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만 흑인들은 아직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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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는 남아공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자신을 27년 간 감옥에 가두고 탄압했던 백인들을 다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 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인도의 간디나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과 같이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흑백을 넘어 전 남아공 국민들을 통합해 내고자 했던 그는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그를 만나고 싶었던 우리 청바지팀은 케이프타운 도착 3일 째 되는 날, 만델라가 18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는 로벤섬을 갈 일정을 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세계적으로 밀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배표를 구하지 못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미리 1주일 전에 사전 예매를 하지 않으면 밀려드는 관광객과 수학여행 학생들 때문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워터프론트 부둣가 또는 테이블마운틴에 올라 로벤섬을 바라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로벤섬은 1999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으로, 그 넓이가 2.58㎢라고 하니 서울의 여의도보다 조금 작지만 비슷한 면적이다. 거기에는 만델라가 갇혀있던 감옥 시설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고, 그가 갇혀있던 방도 볼 수 있다는데, 가 볼 수 없었다는 진한 아쉬움을 안고, 우리는 케이프타운의 다른 관광지들을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

아파르트 헤이트 정책은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의 경제적 빈곤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남아공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 흑인 빈민가 아파르트 헤이트 정책은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의 경제적 빈곤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남아공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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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시내를 차를 몰고 가다보면 길거리에는 우리나라처럼 차가 막혀 밀리는 곳에는 흑인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팔거나 주전부리를 파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장작을 쌓아놓고 파는가 하면, 구걸을 하는 사람들, 노숙자들도 제법 눈에 들어온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철폐되었다지만 아직도 이곳 남아공의 큰 기업과 농장 등 부의 대부분은 소수의 백인들의 손에 있는 것이다.

1인당 GNP가 6500불 수준으로, 과거 남아공의 식민지로 있던 보츠와나나 나미비아보다도 평균적인 삶의 수준이 떨어져 있다. 요하네스버그나 케이프타운에 있는 빌딩, 건물 등도 현재까지는 백인들의 몫인 것이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흑인들이 계속 정권을 잡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흑인들에게도 부의 분배가 이뤄져서, 지금까지 핍박받던 남아공의 대다수 흑인에게 경제적 과실들이 많이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아픈 마음으로 남아공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평범하지 않은 숱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런 지난한 역사의 변곡점들을 잘 넘기면서 만델라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한 남아공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태그:#ㅂ1ㅅ, #보캅지구, #식민의 땅, #아파르트 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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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초등위원장,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을 거쳐 현재 초록교육연대 공돋대표를 9년째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교사, 어린이, 학부모 초록동아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초록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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