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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분유 120ml, 1시 10분 모유 80ml 묽은 변 많이, 3시 30분 모유 60ml 묽은 변 많이, 6시 30분 분유 60ml.'

며칠 전 손자 돌보기 기록이다. 딸한테서 생후 50일 된 손자를 밤 10시에 넘겨받아서, 이튿날 오전 9시 딸 품에 되돌려 줬다. 정확히 11시간 동안 4번 잠에서 깨어나, 수유하고 기저귀를 갈아줬다. 분유는 타서, 모유는 미리 짜둔 걸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물에 미적지근하게 데워서 먹였다.

"아빠는 어떻게 나보다 애를 더 잘 봐"

 생후 보름쯤 강보에 쌓인 손자. 너무 작아서 안아주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생후 보름쯤 강보에 쌓인 손자. 너무 작아서 안아주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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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내가 사는 공주의 시골집으로 내려온 건 지난 10월 추석 연휴가 끝난 뒤였다. 9월 19일에 출생했는데,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중환자실 신세를 7박 8일 져야했다. 이후 약 1주일은 산후 조리원에서, 또 닷새 정도는 제 엄마아빠 집에서 보낸 뒤 외할아버지인 내 집으로 온 거였다.

11월 14일 기준으로 손자는 제 엄마는 물론이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대략 달포 가량을 보낸 셈이다. 요즘 아이 울음소리 듣기 어려운 건 시골만이 아니지만, 내 착각인지 온 동네가 손자 울음으로 '활력'이 생긴 느낌이다.

친정집 산후 조리는 오랜 우리 사회의 전통이다. 그 점에서 딸과 신생아 손자의 외갓집 체류는 그다지 남다를 게 없다. 다른 친정들과 혹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외할아버지인 내가 있어 별 고민 없이 친정을 산후 조리 거처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외할머니는 공주와 인접한 대전에 직장이 있는 탓에 하루 종일 집에 붙어 있을 수 없는 반면, 나는 반백수인 까닭에 낮에는 물론이고 오밤중에도 도우미로 활용이 가능한 '결정적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어떻게 나보다 애를 더 잘 봐."

3주 전쯤이던가. 손자를 안아 어르고 있는데, 딸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하는 거였다. 응응 건성으로 답하며 "네가 말이 엄마지, 언제 애기를 키워봤냐"고 속으로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딸의 칭찬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30년전 이맘때 딸 수유하던 모습을 아이 엄마가 포착했다. 적잖은 세월이 흘렀지만, 손자를 수유하다 보면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30년전 이맘때 딸 수유하던 모습을 아이 엄마가 포착했다. 적잖은 세월이 흘렀지만, 손자를 수유하다 보면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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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가 목전인 할아버지가 신생아 손자 육아를 딸과 반분한다니, 주변에서 믿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과거 이력을 좀 아는 직계 가족들이나 형제들, 그리고 친한 친구들은 '예상한 결과'라고들 했다.

약 20년 전 초등학생이던 딸과 아들을 외국에 데려가 6년 넘게 혼자 키운 전력은 물론이고, 2010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인 여자 조카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년 반 동안 전담 양육했던 등, 나는 애 키워본 경력이 좀 되는 편이다. 시쳇말로 로망까지는 아니었지만, 20대 중반 첫 직장을 가진 직후부터 나는 애 키우기가 내 체질에 맞는 일이라는 걸, 그러니까 아주 일찌감치 알아챘다.

살림 체질과 관련해 이런 일도 있었다. 할머니부터 딸 아들까지 4대 열 식구가 한 집에 살아야 했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서울 생활 시절이었다. 한번은 농반진반으로 "내가 집에서 아이를 키울 터이니, 당신이 나가서 벌어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아이 엄마에게 제안한 적이 있었다.

열 식구의 생계가 결정적으로 나의 월급에 달려 있어서, 그에 따른 직장생활의 압박감이 한층 더 컸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직장 업무는 더 없이 적성에 잘 맞았지만, 아이 키우는 처지가 훨씬 부러웠다.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집 안팎에서는 사실상 비웃음만 샀다. 식구들도 직장동료들도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면 "애 키우는 게, 또 살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한마디로 가소롭다는 태도들이었는데, 외국에서 무사히 6년 넘게 두 아이를 키워 낸 뒤에는 다들 보는 눈이 180도 달라져 있었다.

"할머니"라는 소리,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태어나자 마자 손자는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는데, 당시의 흑변이다. 칼라촬영임에도 기저귀와 변이 흑백사진처럼 느껴진다. 흑변은 흔치 않은 현상이다.
 태어나자 마자 손자는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는데, 당시의 흑변이다. 칼라촬영임에도 기저귀와 변이 흑백사진처럼 느껴진다. 흑변은 흔치 않은 현상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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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런대로 내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현재의 시골 동네 한 이웃은 거의 하루 종일을 손자 보기에 매달려 있는 나를 보면 이렇게 부르곤 한다. 직장 시절이든 반백수인 지금이든, 호칭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만, 할머니라고 불러주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수십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를 유달리 끔찍하게 아꼈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단어 엄마, 그 엄마보다도 때론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푸근한 단어가 할머니가 아니던가. 나는 정말 될 수만 있다면 엄마도 되고 할머니도 되고 싶다.

내 핏줄의 내 손자니까 할머니로 불리고 싶다든지 하며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니다. 30년 전 딱 이맘때 지금의 손자를 낳은 딸을 안고 수유할 때는, 털어놓건대, 하나의 생명이 온 우주와 다르지 않음을 몰랐다. 내 손자만 어디 그럴까. 세상의 모든 신생아들이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얼마 전인가, 딸은 동네 산책에 나섰고 남쪽으로 난 거실 창으로 가을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던 날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잠든 손자를 안고 있는데, 절로 눈물이 나는 '귀중한' 체험도 해봤다. 내 팔에 안긴 게 내 손자가 아니더라도 아마 눈물이 났을 것 같다. 초로의 남자들한테 드물지 않은 불안정한 정서가 큰 몫을 했겠지. 그러나 나는 그 같은 경험을 돈오돈수와 같은 순식간의 깨우침으로 받아들인다.

50일 가량 신생아 손자를 돌봐오면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어깨며 특히 양 팔목이 뻣뻣해지는 등 불편함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들과 딸을 키웠을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 후다닥 지나가버릴 손자의 신생아 시절을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무나 받지 못하는 복에 다름 아니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일인가.

출산율 저하로 말이 많은 요즘, 손자 복에 겨운 처지에서 이중 잣대를 드러내 놓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애 낳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밝히곤 했다. 한국과 같은 양극화 사회에서 지금 태어나는 신생아들은 확률적으로 본다면 70% 아니 80%가 '일벌'의 운명을 피해가기 힘들다. 공식적인 신분제 사회는 아니지만, 사회 저층에서 낮은 임금 노동 등에 시달리며 쪼들린 한 평생을 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과 달리, 아가들 그 자체는 더 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들이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통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준다. 나의 손자처럼 태어나기 무섭게 제 어미 품에 안기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바늘에 꽂혀 연명해야 했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오십을 넘은 나이. 그러나 정신 연령은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승차 유랑인으로서 시한부 일상 탈출. 잠은 세종에서 자고 낮에는 충남 공주에서 땅을 파먹기도 하고, 대전에서 사무원으...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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