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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한양 춘추관, 경북 성주, 충주, 전주 네 곳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전주의 곳만 무사히 보전되고 나머지 세 곳의 것은 임진왜란 중 불에 타 버렸다. 실록각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경기전 경내에 있다.
▲ 전주 실록각 조선왕조실록은 한양 춘추관, 경북 성주, 충주, 전주 네 곳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전주의 곳만 무사히 보전되고 나머지 세 곳의 것은 임진왜란 중 불에 타 버렸다. 실록각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경기전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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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전주 경기전과 경주 집경전, 그리고 평양 영숭전에 모셨다. 전주는 이성계 집안의 고향이고, 경주는 신라 천년의 서울이며, 평양은 중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과시했던 고구려의 도성이다. 조선 왕조는 전주, 경주, 평양 세 곳에 임금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믿었다.

전주 경기전에는 이성계의 초상만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도 모셔져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북 성주, 충주, 한양 춘추관에 있던 실록은 모두 불탔다. 그러나 전주의 실록은 무사했다. 일본군이 이순신의 수군과 경상우도 의병군에 가로막혀 전라도로 침입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주 사람들은 이성계 어용(임금의 초상화)과 실록을 내장산으로 피란시켰다. 6월 22일의 일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8일 만에 함락된 경주

경주는 그보다 두 달 전인 4월 21일에 벌써 적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충주는 4월 25일, 한양은 5월 3일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전주성 풍남문(남문) 앞까지 왜적이 몰려온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7월 9일 이후의 일이었다. 일본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전주 진격을 도모했는데, 1군은 7월 8일 이치에서 권율, 황진 등이 이끄는 조선군에 패해 물러갔다. 반면 2군은 웅치에서 승리하여 전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전주성을 지켜낸 64세 퇴직 선비 이정난을 기리는 사당이다. 당시 전라 감사는 도주하고 없었는데 이정난은 의병을 모아 성을 지켜내었다. 이정난은 업적에 비해 훨씬 덜 알려진 인물이다. 충경사는 전주시 동서학동 840-19에 있다. 충경사에서 출발하여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남고산성, 관성묘 등을 더 볼 수 있다.
▲ 충경사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전주성을 지켜낸 64세 퇴직 선비 이정난을 기리는 사당이다. 당시 전라 감사는 도주하고 없었는데 이정난은 의병을 모아 성을 지켜내었다. 이정난은 업적에 비해 훨씬 덜 알려진 인물이다. 충경사는 전주시 동서학동 840-19에 있다. 충경사에서 출발하여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남고산성, 관성묘 등을 더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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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2군은 이치에서 비록 승리했지만, 정담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너무나 치열한 혈투를 벌인 끝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라 감사 이광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전주성은 이정난이 지켰다.

이정난은 벼슬에서 은퇴한 64세 노인이었는데 700명의 의병(義兵, 민간인 군사)을 모아 용맹하게 왜적에 맞섰다. 그는 남고산성 만경대(서문) 등에 복병을 배치하는 한편 성밖 숲속 곳곳에 의병(疑兵, 허수아비 등 가짜 군사)을 늘여 세워 일본군을 속였다. 일본군은 전주성에 군사가 많은 것으로 오판한 끝에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대구도 경주와 같은 날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4월 21일 경주로 몰려간 가등청정의 군대는 전투 없이 성을 접수했다. 모두 달아나고 성은 비어 있었다. 천년 고도 경주를 차지한 가등청정은 풍신수길로부터 상을 받았다. 신라 1000년 동안 경주로 사신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배워갔던 일본으로서는 천년 고도를 빼앗았으니, 추측하건대 감동(!)했을 것이다.

사적 96호이다. 1592년 4월 21일 함락되었다. 전투도 없이 일본군은 천년 고도 경주성을 점령했다. 가등청정은 이 공로로 풍신수길로부터 상을 받았다. 경주 읍성 중 가장 볼 만한 지점은 경주시 동부동 52번지 일원이다.
▲ 경주 읍성 사적 96호이다. 1592년 4월 21일 함락되었다. 전투도 없이 일본군은 천년 고도 경주성을 점령했다. 가등청정은 이 공로로 풍신수길로부터 상을 받았다. 경주 읍성 중 가장 볼 만한 지점은 경주시 동부동 52번지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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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에서 대구 쪽으로 바라볼 때의 팔조령의 모습이다. 빨간 표시 부분이 팔조령 고개마루로, 해발 398m 높이인 팔조령은 인근의 540m 봉화산과 670m 성암산 등에 비해 청도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가장 낮은 고개이다. 그래서 이 고개는 영남대로의 일부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도 이 고개를 넘어 대구로 진입했다.
▲ 팔조령 청도에서 대구 쪽으로 바라볼 때의 팔조령의 모습이다. 빨간 표시 부분이 팔조령 고개마루로, 해발 398m 높이인 팔조령은 인근의 540m 봉화산과 670m 성암산 등에 비해 청도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가장 낮은 고개이다. 그래서 이 고개는 영남대로의 일부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도 이 고개를 넘어 대구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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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 마찬가지였다. 경주를 빼앗긴 것과 같은 날 소서행장의 군대는 대구를 점령했다. 청도와 대구의 경계인 팔조령을 넘은 일본군은 수성구 파동을 지나 읍성 중심부로 진입했다. 팔조령, 파동, 대구읍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경부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영남대로였다.

울산은 공격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일본군

이튿날인 4월 22일에는 울산이 함락되었다. 울산에는 현재의 경상도 동쪽 지역 전체를 수비하는 경상 우병영성이 있었다. 병영성의 대장인 경상 우병사 이각은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직후 동래읍성으로 갔다가 그냥 달아나버렸다. 그는 언양으로 도주했고 우병영성은 지휘관도 없이 자중지란에 빠져 있었다.

사적 320호로, 답사 출발 지점으로는 울산 중구 동동 51-15가 최적이다. 일본군은 경상우도 전체의 수비를 책임지는 경상 우병성을 공격도 하지 않고 그냥 경주로 북상했다. 경상 좌병사 이각이 도망가고 없는 좌병영성은 점령할 필요성도 없었기 대문이다. 일본군은 경주를 차지한 이후 후방 정리 차원에서 일부 군대를 보내 점령했다.
▲ 경상 좌병영성 사적 320호로, 답사 출발 지점으로는 울산 중구 동동 51-15가 최적이다. 일본군은 경상우도 전체의 수비를 책임지는 경상 우병성을 공격도 하지 않고 그냥 경주로 북상했다. 경상 좌병사 이각이 도망가고 없는 좌병영성은 점령할 필요성도 없었기 대문이다. 일본군은 경주를 차지한 이후 후방 정리 차원에서 일부 군대를 보내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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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은 이미 무력화된 우병영성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경상우도(낙동강의 동쪽 지대 경상도) 전역을 지키는 조선군 총본부를 침략군이 그냥 지나쳤으니 이 사건은 조선의 전쟁 대비 수준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경주 점령 후 가등청정은 영천을 항해 나아가면서 일부 군대를 거꾸로 남하시켜 울산을 쳤다.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새재와 추풍령에서는 어떤 전투가 벌어질까

4월 14일 상륙한 소서행장의 군대는 대구에서, 18일에 상륙한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의 군대는 각각 경주와 김해에서 조선의 도읍 한성을 향해 북진했다. 이들은 문경 새재와 추풍령을 넘으려 했다. 상주와 김천을 지나면 새재와 추풍령이다.

이곳에서는 우리 아군이 승리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면서 22일의 사건 한 가지를 돌이켜본다.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곽재우가 이날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의병은 이순신의 수군, 명나라의 지원군과 더불어 임진왜란 극복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던 군사들이다. 의병의 활약도 궁금하다.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다. 그래서 흔히 '최초의 의병'이라고 한다. 그보다 이틀 전인 4월 20일에 김해에서 관군 없이 의병들이 적과 싸우다가 순절했으므로 최초의 의병은 송빈 등 김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곽재우의 위대한 업적은 반감되지 않는다. 그는 이순신, 권율, 김시민, 사명 대사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 최고 공신임에 틀림이 없다. 생가는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317번지에 복원되어 있다.
▲ 곽재우 생가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다. 그래서 흔히 '최초의 의병'이라고 한다. 그보다 이틀 전인 4월 20일에 김해에서 관군 없이 의병들이 적과 싸우다가 순절했으므로 최초의 의병은 송빈 등 김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곽재우의 위대한 업적은 반감되지 않는다. 그는 이순신, 권율, 김시민, 사명 대사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 최고 공신임에 틀림이 없다. 생가는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317번지에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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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정난, #새재, #추풍령, #임진왜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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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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