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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해부하고 그 해부된 언어로 내 세계를 관통하여 평문을 작성한다. 그러나 박상순의 시를 읽었으나 시를 읽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시를 해부하면 언어가 사방으로 뻗는다. 하나의 시를 해부하고 다음 시로 넘어가면 겹치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평문이라는 구조물을 만들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러나 평문이라는 구조물은 작자의 노력과 시의 새로움에 따라서 더욱 다양하게 구축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  <슬픈 감자 200그램>의 표지
 ▲ <슬픈 감자 200그램>의 표지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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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의 시들은 그의 몸에서 나왔다. 시들은 그림 같은 외면과 슬픈 내면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그러나 독특한 개별성 또한 지녔다. 시는 자식을 닮은 슬픈 감자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표제시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읽는다면 어떨까?

박상순의 감자는 시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옆으로, 앞으로, 숨기고, 밑에 두고, 밑에 숨겨도 시는 어디에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슬픈 감자 200그램은"이라고 서술어 없이 마침표를 찍어 공간을 무한하게 열어두고 있다.

슬픈 감자 200그램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옆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신발장 앞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날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거울 앞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옷장에 숨깁니다.
어젯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침대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의자 밑에 숨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알알이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시가 감자라는 점에 주목을 해보자. 감자와 시는 닮았다. 감자는 땅 속에서 자라는 덩이줄기 식물이다. 땅 위에서는 감자를 보지 못한다. 바깥으로 뻗은 이파리와 가지를 보는 것으로 감자가 땅 아래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시와 닮았다.

시는 시인의 몸에서 고요하게 성장한다. 때가 되면 농부가 감자를 캐는 것처럼 시인은 제 몸에서 시를 바깥으로 끄집어낸다. 감자는 바깥으로 나와서도 얼마간은 죽지 않는다. 싹이 난다. 바깥으로 나온 시도 감상자가 있는 한 얼마간 죽지 않는다. 감상자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슬픈'이라는 현재성의 수사는 왜 붙었는가. '슬픈'은 평면적으로 봤을 때 부정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시를 직조하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꼭 필요한 자양분이다. '슬픈'이 시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의미를 갖는 시어가 시집의 곳곳에 있다.

이를테면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41쪽) 어디에서나 '슬픈'을 감각하고, 우울을 한계까지 견디는 자가 시인이다.

세계를 날것으로 보고 느끼는 우울이 없다면 성찰도 없다. 슬픈 힘으로 직조한 언어는 '요코하마의 푸른 다리'와 같이 외관에 있어서 짧고 폭마저 좁으나, 그곳으로 마음이라는 거대한 배(감자)가 건너간다.

거대한 배에는 "기린이 되고 싶은 고양이"가 있고, "지하철을 탄 수탉들"이 있고, "여배우 김모모루아"가 있고, "당나귀, 기린, 대장, 좀 이쁜 누나, 고독, 고래, 시금치"(125쪽)가 담겼다.

더 나아가서 박상순 시인의 시 하나하나가 감자와 같이 알알이 읽히는 이유는 시인이 세상을 보는 독특한 시선에 있다. 시인은 "현실이 내 웃음을, 세상의 모든 집들이 내 증오를 모방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모방한다."(32쪽)고 한다.

눈앞에 저것이 나를 모방하여 생겨났다면 나와 세계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생긴다. 나와 저것이 연결되어 있으나 떨어져 있고 나를 반영하고 있다는 거리감. 내 시선의 종류에 따라서 세계가 내 렌즈를 반영하여 동시간적으로 변모한다.


슬픈 감자 200그램

박상순 지음, 난다(2017)


태그:#슬픈감자 200 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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