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1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민주주의는 퇴행의 징후가 완연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한국의 촛불항쟁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실험이 분출된 '집단지성의 광장'이었다. 10대 고등학생부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새벽 늦게까지 광화문광장에서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각기 발언을 쏟아내던 시민들의 눈빛과 열변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또한 촛불항쟁은, 박근혜 탄핵안 상정을 머뭇거리던 국회를 끝내 탄핵안 통과로 유도해내고, 마침내 헌법재판소로부터 박근혜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한국은 평화적 민주주의 실현의 모범국가로 세계 역사에 기록되었다. 최근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2017년 인권상을 대한민국의 촛불시민들에게 수상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적폐청산을 방해하고 싶어하는 기득권 세력은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작금의 상황은 행정부의 수뇌만 교체된 상황일 뿐, 행정부 말단과 입법·사법부 및 경제권력·언론권력은 교체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이 단시일에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점은 광장에 나왔던 촛불 시민들도 이미 다 예상하던 바였다. 그런 만큼, 수많은 촛불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지금은, '적폐청산'이라는 '혁명과업'을 민주개혁정부가 제도적 틀 안에서 실험하고 있는 동시에, 촛불의 열망과 실천을 일상 속으로 확산시켜 그 사회적 기반을 장기화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 4월 민중혁명, 1987년 6월항쟁이 결과적으로 유산되고만, 뼈아픈 기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러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 같은 과제를 새 정부 역시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4월 민중혁명 이후나 6월항쟁 이후와는 차별화된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라 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과제를 전적으로 새 정부의 손에만 맡겨두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던 시민들을 비롯해 보다 많은 시민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새로운 사회 만들기'에 참여할 때 촛불항쟁은, '혁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촛불항쟁 또는 촛불혁명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하고, 촛불시민들의 열망과 실천 경험을 장기적으로 계승해나가기 위해 지금 당장 착수할 수 있는 일로는 무엇이 있을까? 그 일환의 하나로 기자는, 촛불혁명의 무대였던 '광화문 광장'의 이름을 '촛불광장'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촛불항쟁을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우리 삶과 체제를 변화시키는, 장기적인 '패러다임 혁명'으로 도약시키고, 안착시키기 위해선, 집단적 기억이 응축된 상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촛불항쟁의 주요 무대였던 광화문 광장을 '공간적 상징'으로 활용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기실 광장은 그 자체 민주주의의 모태이자 공간이었다. 다 알다시피 현대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인바, 광장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견인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광장은 그 역사의 출발부터 민주주의라는 제도 및 사회구성 원리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아울러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참여할 수 있고, 발언할 수 있다.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도 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최후의 보루로서 버텼던 공간 역시 광장이었다. 그렇기에 광장은 자칫 엘리트 위주의 정치로 흘러가기 쉬운 '대의민주주의'를 견제하고, 보완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세계 어느 나라나 수도에는 그 나라의 역사가 응축된 상징적 광장이 있다. 예컨대 쿠바의 혁명광장, 프랑스의 바스티유 광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광화문 광장이라는 이름에는, 그 어떤 상징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저 조선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있다는 이유로 '급조'해서 붙인 이름일 따름이다.

서울시가 문화재청의 계획안을 수용해 광화문 광장 조성사업 추진을 결정한 시기는 촛불항쟁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6년이었다. 당시 광화문 광장 조성 사업은 세종로 자체를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성격으로 되돌리는 "적극적 광장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안진희·배정한,「광장에 대한 공론의 생성과 공간적 반영」,『도시설계』17, 2016 참조)

즉, 당초 광화문 광장의 정체성은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복원에 있었다. 그래서 2008년에는 광화문 광장의 상징 조형물로서 세종대왕 동상 건립이 결정됐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부터 시작해 광화문 광장을 '상징 공간'으로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를 둘러싼 논란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이는 광화문 광장의 정체성과도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지난 이명박·박근혜 적폐정권 시기에는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박정희 동상을 건립하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1950년대 중반 서울을 이승만 우상화의 공간으로 삼으려 했던 자유당 정권의 어리석은 시도들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955년에는 서울시의 이름을 이승만의 호였던 '우남'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더니만, 이듬해에는 아예 파고다공원과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이밖에도 남한산성·뚝섬 등지에 이승만의 장수를 기원하거나 그를 예찬하는 의미를 담아 송수탑, 우남송덕관 같은 건축물이 들어서고, 우남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우남도서관·우남학관이 신축된 바 있었다.(서중석,「이승만과 3·15부정선거」,『역사비평』2011 가을호 참조)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도 무위에 그쳐 결국 이승만 정권은 4월 민중혁명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하물며 그러한 정권과 그 정권의 수반을 21세기에 들어 다시 복권시키려는 시도는, 역사의 반동이자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편, 이상의 사실들은 상징 공간으로서 광장의 구성과 조형물이 갖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기억과 기념이 지니는 헤게모니적 속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촛불항쟁을 당장 지금부터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울러 광화문 광장의 정체성은, '이미 기획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만들어져 가고 있는 중'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광화문 광장이 조선시대를 기념하겠다는 애초의 계획과 달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촛불항쟁은 광화문 광장에 새로운 '상징'과 '의미'와 '역사'를 부여했다. 연 인원 1천 7백 만의 시민들이 광장의 맨 바닥에 앉아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 "적폐청산", "재벌 해체"를 외쳤던 기억은 광화문 광장이 뜻하지 않게 새로운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촛불항쟁은, 지금의 동시대인 누구나 인정하듯 우리 현대사의 새 분수령이었다. 1961년 5.16군사반란 이래 이 땅을 짓눌러온 '박정희 패러다임(또는 신화)'를 종결시키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제 그 광장에 새로운 이름과, 상징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역사적 공간으로 두고두고 기념하자. 그리하여 촛불항쟁의 다양한 열망들을 새로운 '대안 패러다임'과 '혁명'으로 승화시켜나가자. 촛불항쟁은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촛불혁명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항쟁을 기억하고, 혁명으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촛불광장'이 조성된다면,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도 민주주의의 장엄하고도 거룩한 상징적 장소로서 그 교육적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우리 손으로 일구어낸 민주주의를,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각인시켜 '반동'과 '퇴행'을 되풀이해온 아픈 역사를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촛불혁명, #광화문 광장, #적폐청산, #민주주의, #촛불혁명 광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