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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약 45년 전의 농인 제자와 아름다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 만남의 사연인즉슨 이렇다. 대학에서 제자였고, 석사과정에서 내가 지도한 농인학생 김정중으로부터 한국농아인협회 경산지회장 취임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사전에 참석여부를 알려달라기에 협회 실무자에게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조금 있으니 다시 연락이 와서 내빈 소개를 위해 필요하다면서 인물사진 한 장을 전송해 달란다. 농아인협회 행사이기에 참석하는 농인들에게 시각적 정보제공 편의를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근데 행사장에 참석해서 보니 '한국농아인협회 경상북도협회 경산지회장 이․취임식'으로 식순이 짜여 있다. 그간 경산지회장을 맡아온 김봉열은 3대에서 8대에 걸쳐 무려 16년간이나 일해 왔고, 이번에 그는 경북농아인협회 회장으로 승진하고, 그 후임으로 김정중이 경산지회장을 맡게 된 게다. 전국에서 많은 농아인 협회장과 회원들이 각 지역을 대표해 참석하였다.  

사진 왼쪽이 김봉열 경북농아인협회 회장, 오른 쪽이 새로 취임하는 김정중 경산지회장이다.
▲ 한국농아인협회 경산지회장 이취임식에 참석해 농인 제자와 함께 사진 왼쪽이 김봉열 경북농아인협회 회장, 오른 쪽이 새로 취임하는 김정중 경산지회장이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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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행사장에 참석하여 놀란 것이 지금까지 경산지회장으로 일한 김봉열은 45년 전에 내가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대구영화학교 교사로 4학년 담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가르쳤던 바로 그 학생이었다. 얼굴이 엄청 변해서 나는 처음에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는 나를 금방 알아보았다. 나는 '김봉열'이라는 학생이 그 당시 학급에서 공부를 잘한 학생인 것으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만남이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건장한 덩치로 나를 반갑게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나를 존경했다는 걸 수화통역사가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내빈석에서 오늘의 자랑스러운 주인공인 두 제자를 지켜보았다. 전임회장인 김봉열은 신임회장인 김정중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김정중은 전임회장 김봉열에게 공로패와 행운의 반지를 전달하는 걸 보면서 참 흐뭇했다.

이임사에서 김봉열은 앞으로 경북농아인 협회장으로서 농인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에 더욱 매진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어 김정중은 능숙한 수어(手語)로 농인들의 권익과 복지증진을 위해 일층 노력하겠노라고 야심차게 취임 포부를 밝혔다. 식을 마치고 주최 측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끝내고, 나는 김정중에게 김봉열과 함께 세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의했다. 모처럼 함께 사진도 찍고, 헤어지기 전에 마무리 인사를 나눌 참이었던 게다. 후에 메일로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김정중에게는 오늘 찍은 사진을 내게 꼭 보내 달라고 일러주었다.

기념식장을 나오면서 속으로 오늘 행사에 내가 참석하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직에 평생 몸담아온 내게 오늘은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는 그런 날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내가 옷을 차려 입고 나서니 집사람이 정년한 사람이 그런 행사에 굳이 참석할 필요가 있느냐고 은근히 견제구를 날렸다. 나는 집사람에게 김정중은 내가 석사 논문지도도 했고, 결혼식 때 주례도 해주었는데 내가 당연히 축하해주러 가야하지 않겠느냐면서 집을 나섰다.

'듣지 못함'은 하나의 차이일 뿐이다
이쯤에서 내가 농교육과 인연을 맺은 내력을 밝혀야 될 것 같다. 나는 64학번으로 서울서 철학과에 적을 두고 하던 공부를 접고, 1965년에 대구대 특수교육과로 옮겼다. 그 때만해도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특수교육과는 대구대(구 한국사회사업대학)에만 있었다. 하여 나는 우리나라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한 1세대가 되었다. 대구가 광복 후에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메카가 된 것은 1946년에 광복기념사업으로 이영식(李永植; 1894-1981) 목사가 대구맹아학교를 설립하고, 그 후 이 분야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설립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내가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특수학교는 맹학교와 농학교 뿐이었다. 해서 특수교육 전공도 맹전공과 농전공만 개설해서 운영되었다. 나는 그때 농전공을 선택한 탓에 그게 나에게는 평생 특수교육에서 장애영역별 하위전공으로 굳어진 게다. 졸업 후에 나는 석사과정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그냥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에, 농교육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1972년 3월부터 농학교인 대구영화학교에 근무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내가 농학교에서 초등 4학년 담임을 맡아 평생 처음 농학생을 가르친 게 인연이 되어 오늘 45년의 세월이 흘러 김봉열을 만난 게다. 그 당시 김봉열 학생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급장을 맡긴 기억이 난다. 근데 아쉽게도 나는 1학기 한 학기동안만 농학생들과 함께하고 2학기부터는 모교 특수교육과 교수(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나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행운을 얻었지만, 농학생들에게는 학년도 중간에 담임이 바뀌게 해서 미안한 일이었다. 사실 나도 농교육 현장경험을 좀 더 쌓지 못한 게 아쉽다. 

그 후 나는 객원연구교수 신분으로 세계에서 농인을 위한 유일의 국립대학인 워싱턴 DC에 있는 Gallaudet 대학에 1년간 가족과 함께 머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미국은 1817년에 Thomas H. Gallaudet에 의해 최초로 농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후 Gallaudet 가(家)의 성을 따서 1864년에 링컨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국회의사당이 내려다 뵈는 동북 쪽 언덕에 Gallaudet  대학을 설립한 게다. 이 대학은 미국 농인들의 자존심이자 농문화의 센터이다.

약 30년 전부터는 농학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Gallaudet 대학 총장은 반드시 농인이어야 한다. 이 대학에서 모든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미국수어(American Sign Language; ASL)로 강의를 해야 한다. 따라서 이 대학 캠퍼스는 농인이 주류고, 청인은 비주류다. 그들에게 농(deaf)은 장애가 아니다. 듣지 못함은 하나의 차이일 뿐이다. 즉, 음성언어 대신에 시각언어를 사용하는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농교육에서는 18세기 후반(1760년 파리농학교 설립) 그 시작 이래로 구어중심(oralism)과 수어중심(menualism) 간에 끊임없는 방법 논쟁이 이어져 왔고, 그것은 아직도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중복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는 자신이 겪은 장애 체험에 의거해 "보지 못하는 맹인은 사물과 단절되고, 듣지 못하는 농인은 사람과 단절된다."고 했다. 그래서 농인들은 자신들 만이 향유하는 농문화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결혼도 농인들끼리 하는 현실이다.

농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농학교 졸업생인 농아가씨와 새로 부임한 구어를 중시하는 농학교 교사가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했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결국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농인이 행복한 세상이 이 땅에 기필코 정착되길 빈다
이재연 선생이 뒤늦게 결혼도 하고 득남도 했다는 기쁜 소식이 담겨 있는 서신을 내게 보내왔다.
▲ 서울농학교에 근무하는 농인 제자 이재연 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온 편지 이재연 선생이 뒤늦게 결혼도 하고 득남도 했다는 기쁜 소식이 담겨 있는 서신을 내게 보내왔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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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옛 농인 제자를 모처럼 만나고 보니, 그간 내가 대학 특수교육과에서 교수노릇하면서 길러낸 특수교사 가운데 두 사람의 농인 제자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은 그들의 모교인 서울농학교 중등부에서 중견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다. 한 사람은 장진권 선생으로 그는 내 기억에 농학생으로는 처음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같은 감각장애이지만 맹학생들은 진작부터 특수교사로 진출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농학생들의 경우 특수교사가 된다는 건 퍽 희귀한 일이었다.

장진권의 아버지는 당시에 문교부 편수관으로 일하면서도 아들의 대학생활이 걱정되어 입학식에 참석하고 3일간을 대구에 머물면서 아들뒷바라지를 해주고 떠났다. 그런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 본인의 엄청난 노력 결과 장진권은 무사히 4년제 특수교사 양성과정을 마쳤다. 그는 한때 내 연구실에서 공부하면서 내게 수화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내 이름으로 나온 글들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읽었다고 했다. 그만큼 독서력이 왕성했고, 농학생이지만 시험지에 반영된 문장력도 뛰어났다.

2013년은 서울농학교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서울농학교 백년사> 책도 내고, 그해 10월에는 '서울농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개최 되었다. 이 학술대회에서 나는 '농교육의 쟁점과 과제'라는 주제로 기조발표를 했고, 장진권은 '서울농학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화려한 수어로 열정적인 발표를 해 주었다.

그날 나는 장진권 선생이 서울농학교에서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농학교 교장(정현효)께서 <서울농학교 백년사> 책 발간에도 장진권 선생이 주된 역할을 했다는 걸 귀뜀해 주었다.

다른 한 사람은 90년대 후반쯤에 특수교육과에 입학한 이재연이라는 농학생이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학 특수교육과에 겨우 들어 왔다. 당시만 해도 대학 당국은 장애학생들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나라에서는 물론 대학 자체에서 장애학생들에게 학습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던 때였다. 지금은 대학에 장애학생지원센터가 따로 있어, 농학생들에게 수화통역 지원은 물론, 강의실에서 속기지원도 별도로 해주고 있다.

일학년 첫 학기가 끝난 여름 방학에 이재연 학생이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사연의 요지는 자기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겨우 대학에 들어왔으나, 대학에서 농학생을 위한 학습지원이 전혀 없어서 "이 놈의 대학 화가 나서 더 다닐 수 없다"는 게다. 오죽하면 학생이 이런 편지를 교수에게 보내 왔겠는가 싶어, 나는 이재연 학생에게 회신을 보냈다.

농학생으로 어렵게 대학 특수교육과에 들어 왔는데, 힘들더라도 계속해서 수학하도록 노력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2학기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고려해 장학금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 보겠노라고 했다. 이런 내 편지가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던지 그는 방학동안 어머니가 하는 일을 열심히 도와 등록금을 마련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회신을 보내왔다.

정말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교수의 조그마한 관심도 큰 격려가 된다는 걸 나는 이재연 학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2학기에 장학금 혜택을 받아 다시 용기백배로 수학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4학년 졸업을 하고 농학생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원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하는 영예로운 사례를 남겼다. 그는 제주도에 있는 특수학교에서 특수교사로 일하는 꿈을 실현하게 되었으나, 그곳 특수학교의 농학생 지원이 줄어들자 자신의 모교인 서울농학교로 옮기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재연 선생은 제주도에 근무할 적에 가을철만 되면 내게 제주감귤을 택배로 보내주곤 했다. 서울농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아직 결혼을 못했다고 하더니만, 몇 년 전에는 결혼을 해서 갓 돌이 지난 아들도 얻었다고 내게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그는 봉투에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붓글씨로 큼직하게 쓰고, 이런 편지글을 보내 왔다.

존경하는 교수님!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지 13년이 되었습니다. ...(중략) 대학 시절 교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 옵니다. ...(중략) 언제나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이며, 교수님의 얼굴을 떠 올리면 기분이 최고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 제자 이재연 올림

가르침과 배움이 상생하면서 이어지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보람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글이다. 내가 40년 교수노릇하면서 제자들에게 받은 편지가운데 이재연의 글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어쩌면 내게는 과분한 글일 수 있다. 원래 '교학상장'이라는 말은 <학기(學記)>에 나오는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배신은 가르침(敎)과 배움(學)의 어긋남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배신의 원천적(일차적) 책임은 배우는 쪽에 있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쪽에 있다는 게다. 여기에 교육과 교직의 어려움이 있다.

이미 정년하고 70줄에 접어든 내게는 농교육을 이끄는 든든한 두 제자가 있고, 또 한편에는 농인들의 정체성과 복지증진에 앞장서는 다른 두 제자가 있어, 그들이 내게 더 할 나위없는 행복감을 안겨준다. 이런 게 교직에 몸담은 사람의 지복(至福)에 해당되는 것일 터.

우리나라는 아직도 농문화의 정체성이 안정되게(품위 있게) 정립되어 있지 않아, 특히 농아인협회의 역할이 더욱 중차대한 때이다. 마침 2015년 말에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어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수어의 위상이 정립됨으로써, 농인들의 정체성과 농문화의 정립에 크게 도움이 될 게다.

하여 이번에 경북농아인협회 회장을 맡은 김봉열 회장과 경산지회장을 맡은 김정중 회장의 역할이 더욱 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내가 현직에서 못 다한 농교육과 농인복지의 결실이 이들 농인 제자들에 의해 구현되는 그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농학생이 행복한 학교, 농인이 행복한 세상이 이 땅에 기필코 정착되길 빈다. 오늘은 참 기분 좋은 날이다.

덧붙이는 글 | 사진 배치는 기사내용과 연관해서 적절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태그:#농인 제자, #교학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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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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