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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두번, 둘쨋날 한번. 모두 세번의 펑크가 있었다. 펑크가 문제가 아니라 길을 떠나는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허당임을 스스로가 깨달아야 했다.
 첫날 두번, 둘쨋날 한번. 모두 세번의 펑크가 있었다. 펑크가 문제가 아니라 길을 떠나는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허당임을 스스로가 깨달아야 했다.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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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꿈꾸고 있는 두어 달간의 유럽 자전거 여행에 관해 어느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체력과 시간, 마음 맞는 파트너 등 적지 않은 준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먹기'다. 고심을 넘어서지 못하고 머릿속을 맴돌며 진척이 없는 이유는 마음이 먹어지지가 않아서다. 상대가 내게 해 준 말은 이것이다.

'나도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고 틈틈이 준비 중이다.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실전을 통해 겪어보는 것이다. 펑크를 비롯해 고장도 나서 난처한 상황도 겪어봐야 한다. 다쳐도 봐야 하고 길도 잃어봐야 한다. 그 많은 경험이 없이 먼 길을 나섰다가 정말 난처한 상황을 만났을 때 큰일이 난다.'

두어 달 전에 제법 큰 사고를 당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치곤 참 엉뚱하다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두 맞는 말이었다.

인생사 그렇듯이 길에서의 상황이 예측된 범위에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의 여행담을 읽어보아도 예기치 않은 상황의 도사림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코스가 아닌가 싶다.

5년여 동안 페달을 밟아왔고 길에서의 경험이 적지 않다. 운 좋게 펑크도 몇 번 나지 않았고 소소한 에피소드는 겪었어도 큰 사고는 겪지 않았다. 한데 이 가을여행에서 그 구멍이 드러났다. 2박 3일 여행 중 모두 세 번 펑크가 났다. 첫날 두 번,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한번(사실은 전날 나 있던 것을 아침에 발견한 것이다).

체육을 전공한 처남으로부터 간밤에 라이딩에 관한 기술적인 지도와 조언을 받았다. 일어나서 대충 준비를 마치고 떠나는 내게 기본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늘 조언하지만 잘 담아가고 있지가 못하다.
▲ 스트레칭을 처남으로부터 배워보고 체육을 전공한 처남으로부터 간밤에 라이딩에 관한 기술적인 지도와 조언을 받았다. 일어나서 대충 준비를 마치고 떠나는 내게 기본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늘 조언하지만 잘 담아가고 있지가 못하다.
ⓒ JTV <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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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자 마자 들통난 허당 길벗. 간밤에 가늘게 펑크가 났었고 가라 앉아 있는걸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다. 자막에 그대로 담겨 있다.
▲ 바퀴에 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출발하자 마자 들통난 허당 길벗. 간밤에 가늘게 펑크가 났었고 가라 앉아 있는걸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다. 자막에 그대로 담겨 있다.
ⓒ JTV <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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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의 달콤한 숙면과 든든하게 먹은 아침 덕분에 컨디션은 훌륭했다. 어제와 달리 좀 여유를 가지고 달려보자고 파이팅을 외치고 나선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이런저런 챙김은 다 해놓고선 정작 애마인 길숙양에 대해서 무심했던 것이다.

'오랫동안의 여행을 통해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는 변명이 통할 리 없다. 처남에게도 갑돌에게도 머쓱하고 촬영팀이 담아대는 카메라를 쳐다볼 염치가 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대책을 만드는 게 필요할 뿐이다.

우선 바람을 넣어 달릴 수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멀지 않은 안성까지 버텨주면 자전거를 손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다행히 바람은 빠지지 않고 안성까지 넘을 수 있었다.
간밤에 체육을 전공한 처남으로부터 여러 가지 코치를 들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보다 중간중간 적절한 휴식과 수분 섭취가 중요하다 싶었다.

오일장이 서는 안성에 예전에는 몇 개쯤은 있을법한 자전거포가 딱 하나 검색된다. 이름이 '현대 자전거'가 아니라 '현대 공업사'로 나온다. 비료도 팔고 농기계도 수리하고 자전거 수리는 덤으로 붙어있는 점포였다.

수소문해 찾아가니 가게 측에서 낭패를 호소했다. 주인아저씨가 몇 달 전에 다쳐 펑크 때우기가 힘들 것이라고 한다. 세숫대야, 펌프, 사포만 있으면 할 수 있으니 공간만 내어 달라고 덤벼보았다. 지켜보기가 못 미더웠는지 아주머니가 거들어 쉽게 끝낼 수 있었다. 아저씨와 함께 한 수십 년 동안 아주머니도 자전거 정비공이 돼 있었다.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서둘렀다. 날이 바뀌었어도 이 쫓김은 달라지지 않는다. 짧게 오른 후 길게 내려가는 안성재를 빠르게 밟아 나간다. 적상을 거쳐 무주읍을 살짝 찍고 부남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무주읍에서 부남면을 향하는 길이다.
 무주읍에서 부남면을 향하는 길이다.
ⓒ JTV <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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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있고 고개가 있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있었을 법한 한티. 오가는 인적이 거의 없다. 길이라는 게 쓰임새가 다하고 나면 더 이상 길이 아닌 운명을 맞기도 할 것이다. 고즈넉한 한티를 그리 어렵지 않게 넘는 건 어제의 오버페이스에서의 반성 덕분이다. 길 뒤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것이 도움이 될지 아닐지 모른다. 다만, 길에서의 페이스를 결정하는 건 자신이다. 자기의 체력과 마음가짐이다.

한티 넘어 부남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남은 길을 헤아려 봤다. 오늘도 여전히 야간 주행을 해야할 것 같다는 판단이다. 남은 거리 50여Km, 서둘러 행정구역이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으로 바뀌는 목사리재를 건넌다. 600 고지 전승탑이 있는 작고개가 있지만 이미 지나온 대고개나 한티 정도로 보였다. 큰 고비는 다 넘은 것 같다고 여기며 숨을 돌린다. 마지막의 배티재만 넘으면 어렵지 않게 마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작고개를 넘는다.

굽이치긴 했지만 완만했고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리막길에 나무가 만든 터널과 낙엽이 된 잎들이 깔려 누렇게 물든 아름다웠던 길을 신나게 내달린다. 고달픔과 피로가 죄다 사라진 기분이 들만큼 아름다운 기억이 머릿속 필름에 찍혀 저장된다.

지도를 면밀하게 살피지 못한 탓인지 이날의 고개 중에 경사가 가장 급한 서낭당이재에서 고생을 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의 조우가 더 힘들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사이 날이 어두워지고 추워졌다. 진산에서 다시 배티재로 넘기 위해 쉬는 동안 땀이 식는 통에 갈증과 추위가 더해져 지치게 만든다.

이미 어둑한 길을 달리기 위해 라이트를 켜고 오르는 길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이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힘든 순간이 될 것이라고 여겼던 지점이긴 하다. 힘겹게 페달을 굴리고 길을 디뎌 걷는 것을 반복해 넘는다.

푸른 별 지구 위의 모든 사물을 지배해 그 자리에 머물게 하려는 중력과의 싸움은 길바닥을 경계로 치열하게 흔적을 만들어 낸다. 바퀴로부터 체인을 통해 페달로 전해진 중력은 발로부터 허벅지를 지나 심장을 통해 폭발된다. 내 몸속의 기관과 조직과 세포가 정교하게 연결되고 신호를 주고 받는다. 땅속으로 끌어당기는 중력과 나 사이에는 자전거가 있다. 그 겨루기의 중간에 서서 나와 중력간의 메시지를 정교하게 전달하는 전달자이다.

포기하고 쉬는 게 어때? 아냐 여기서 쉬면 더 힘들어질 거야. 자전거가 전하는 이런 메시지가 수없이 내게 전해진다. 지구와 내가 주고받는 신호의 통로가 된다.

'터질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갑돌의 말은 딱 적확한 순간의 한 마디였다. 그렇게 시간과 길 위에 남겨둔 흔적을 남겨두고 이날의 모든 여정이 끝맺는다.

첫날과 달리 길에 순응했고 예기치 않은 고개도 만나야 했지만 둘은 깨달았다. 걸어서든 페달을 밟아서든 고개는 넘으면 그만인 것이라고.
 첫날과 달리 길에 순응했고 예기치 않은 고개도 만나야 했지만 둘은 깨달았다. 걸어서든 페달을 밟아서든 고개는 넘으면 그만인 것이라고.
ⓒ JTV <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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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남긴 이날의 흔적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틈만 나면 '길숙양이랑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고 공언하곤 한다. 그렇게 중요한 길숙양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부끄러움과 함께 선명하게 각인된 것이다. 다시 길을 떠나 먼 길을 달려 나가려거든 '오늘에 확인한 오류를 극복해낸 팀워크를 단단하게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것이 내 기억 속의 그 길에 새겨져 있을 것 같다.

한발 한발 땀방울과 피로에서 축적된 젖산이 선명하게 바퀴 자국과 함께 뿌려진 깨달음이리라.

언젠가 그 길을 다시 달려 나가면서 흔적을 통해 기억을 재생시켜보면 그때와는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오늘을 만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법이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또 하루의 일정은 마쳤다. 길에 남겨진 호흡음의 여운을 신발들도 기억할 것인데...
 또 하루의 일정은 마쳤다. 길에 남겨진 호흡음의 여운을 신발들도 기억할 것인데...
ⓒ JTV <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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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두바퀴로 만나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자전거 여행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 매체인 '전북 포스트'에 동시에 보냈습니다.



태그:#자전거 여행, #길벗 자전거 여행, #두바퀴로 만나는 세상, #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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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한의사, 자전거 도시가 만들어지기를 꿈꾸는 중년 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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