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선감학원 피해자 김성환 씨(62)
 선감학원 피해자 김성환 씨(62)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스무 살이 되어서야 끔찍했던 선감학원과의 악연을 끝내고 세상에 나왔지만, 호적도 없고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세상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구두닦이밖에 없었다.

그래도 걸인 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구두 한 켤레를 닦으면 자장면을 한 그릇 먹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일거리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구걸을 해야 했다.

77년 즈음에는 열심히 구두를 닦아 모은 돈 5만 원으로 전세방을 얻어 한뎃잠을 면했고, 호적도 만들었다. 호적을 만들기 위해 고아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는데, 그 증명서는 끔찍했던 선감학원이 아닌 행복한 기억이 있는 서울 강동구 천호동 '애지 보육'에서 떼었다. 호적을 만든 다음 '보충역'으로 국방의 의무도 완수했다.

79년도에는 선감학원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친구 도움으로 서울 아동보호소에서 헤어진 형과 10년 만에 재회했다.

"그 녀석이 '제 형하고 안양에 같이 있었고, 형한테 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바로 안양으로 내려갔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만나지 못하고 그 다음 날에야 수소문 끝에 어렵게 만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뛸 듯이 기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덤덤하기만 했어요. 형이라는 말도 입에서 안 나오고 할 말도 별로 없고요. 워낙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어서 그랬던 거죠."

10년 만에 만났지만, 형제는 서로 떨어져 살았다. 형은 안양에 동생은 인천에. 서로 생활 터전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20대는 비교적 평탄하게 흘렀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가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고, 아무 잘못 없는 그를 그곳에 끌고 가지 않았다면 그 뒤의 인생도 20대 초반처럼 평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광폭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보육원 출신 구두닦이인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구두 닦다가) 오락실에서 쉬고 있는데, 경찰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서(인천 경찰서)로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잘못도 없는데 거긴 왜 가냐?'고 따졌죠. 그런데도 '몇 마디 물어보고 보내준다'고 하더니 다짜고짜 끌고 가는 거예요. 저만 끌고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함께 구두닦이 하던 친구들까지 몽땅 끌고 가는 것이었어요."

집에 보내 준다는 말에 속아서 지장 찍었더니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선감학원 시찰 모습.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선감학원 시찰 모습.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경찰은 "너희들 요즘 먹고 살기 힘들지?"라고는 그와 친구들을 유치장에 밀어 넣었다. 80년 7월 31일에 벌어진 일이다. 그 뒤로 계속 사람들이 붙잡혀 들어왔는데 그중에는 성환 씨의 구두닦이 선후배들이 많았다. 8월 4일 즈음에는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유치장이 꽉 찼다.

"문신 있어서 끌려 온 사람도 있고, 길거리에서 계엄군이 느닷없이 총 들이대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어요. 우린 고아라서 끌려온 것이고요. 할당 채우기 딱 좋잖아요. 없어져도 찾아 나설 부모가 있나, 형제가 있나. 돈 벌기 위해 배 타다가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끌려온 친구(선감학원 동기)도 있어요."

유치장에 있다가 D등급을 받고 훈방될 줄 알았지만, 성환씨와 친구들은 4주 순화 교육을 받아야 하는 C등급을 받았다. 총 4등급(A·B·C·D)이 있었는데, B등급은 4주 교육을 받은 다음 근로 봉사를 해야 했고, A 등급은 군사재판을 받거나 검찰로 넘겨졌다.

"처음엔 D등급이 나왔는데, 나중에 C등급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지은 죄가 없다고 하니까 '너 인마 술 먹고 돌아다니며 사고 쳤지?'하면서 없는 죄를 인정하라고 다그쳤어요. 그래서 '저 술 먹으면 얼굴 빨개져서 못 마셔요'라고 했더니 '지나가는 여자 희롱했다'고 적고는 지장 찍으라고. 지장 찍으면 훈방하겠다는 말에 속아서 지장 찍었다가 끌려간 거죠."

성환씨가 끌려간 곳은 부천에 있는 한 군부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방망이가 날아왔다. '앞으로 취침'하면 질퍽질퍽한 연병장에 엎드려야 했고 '뒤로 취침'하며 드러누워야 했다. '굴러' 하면 데굴데굴 굴러야 했는데, 한참을 구르다 보면 어지럽다 못해 구토까지 치밀어 왔다.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요령을 피울 수가 없었고, 반항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장갑차와 총을 든 군인들이 교육생들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어지러워 구르는 속도를 늦추면 곧바로 군홧발이 날아와 배와 등, 심지어 머리까지 걷어찼다. 밤에 '모기 회식시킨다'며 옷을 벗겨 나무에 묶어 놓는 끔찍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자행됐다.

삼청교육대 마치고 뒷골목 생활 시작한 이유?

 신군부가 군부대내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에선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인권유린을 당했다.
▲ 삼청교육대 신군부가 군부대내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에선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인권유린을 당했다.
ⓒ 공개사진

관련사진보기


"잘 모르겠는데요."

이 말을 했다가 성환씨는 하사 계급장을 단 내무반장한테 매만 죽도록 맞았다. '왜 끌려 왔느냐?'는 물음에 이 대답을 하자, 내무반장은 "미쳤다고 국가에서 죄 없는 사람을 끌어왔겠느냐?"며 폭력을 행사했다. 성환씨가 "지나가는 여자 희롱했다"고 말을 바꾸자 매질이 멈췄다.

성환씨와 친구들은 다행히 4주 교육 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가벼울 수 없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혈육인 형을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참외를 깎아 먹다가 몸에 문신이 있다는 이유로 끌려왔다고 한다.

지옥 같은 1개월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구두통을 메고 돌아다니면 다시 삼청교육대로 끌려갈 수도 있는 살벌한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실제로 두 번이나 끌려간 사람도 있다는 게 성환씨 설명이다.

"그래서 취직이라는 것을 했는데, 함께 일을 하는 사무실 직원이 모두 여성이었어요. 제가 수줍음이 많아요. 구두통을 메고 가다가 같은 또래 여학생을 보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는 그런 성격입니다. 그런데 머리 박박 깎고...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불안하고 창피하고. 그래서 그만두고 그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서 살게 된 거죠."

성환씨가 말한 친구들은, 소매치기 같은 일을 하며 뒷골목에서 사는 이들이다. 이 친구들과 어울려 살다가 공범으로 엮여 교도소를 들락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강도 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간다. 긴 감옥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15년 살면서 한숨 쉰 것을 무게로 따지면 수십 톤은 될 겁니다. 삼십 대 초반.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잘 키우고 싶었는데 다 끝나버린 거죠. 지금도 가장 후회스러운 게 '내가 왜 친구들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청송,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힘든 시간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보육원 출신 장기수라서 성환씨의 교도소 생활은 다른 수감자에 비해 몇 배 더 힘들었다. 교도관을 비롯한 교도소 직원들이 막 대했기 때문이다. 차별을 비롯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사실을 알릴 방법도 없고 알린다고 해도 항의 해줄 만한 부모나 형제가 없기 때문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항의도 하고,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징벌을 받아서 독방에 갇히게 되고, 문제수가 돼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처지가 됐죠. 문제수로 찍히면 한 곳에 오래 안 둡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가 성환씨는 악명 높은 '청송 보호감호소'로 가게 된다.

"거긴 제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옥이었어요.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간이 바로 청송에 있었던 5년입니다. 성장기에는 '선감학원'이 가장 힘들었고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교도관 수백 명이 쭉 서서 포승줄로 꽁꽁 묶인 우리를 마구 내려치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숙소 앞에 가니까 방망이로 또 두들겨 패고요."

청송이 악명 높은 가장 큰 이유는 수감자를 모두 독방에 가둔다는 점 때문이다.

"미쳐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초기 증상이 벽 보고 혼자 중얼거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옷 찢어서 천정에 있는 고리에 걸고 목매는 거죠. 자살자가 속출하니까 나중엔 그 고리를 용접해서 끈 맬 곳을 없애 버렸어요. 작은 성경책도 한 권씩 주었고요."

성환씨는 15년 형을 마치고 2002년에 출소했다. 처음엔 사회에 적응을 못 해 노숙자 생활을 했고, 그 생활이 힘들어 다시 감옥에 가려고 파출소에 찾아가 일부러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몇 년 전에 인연을 맺은 복지관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남은 인생 봉사를 하면서 사는 게 62세 성환씨의 꿈이다. '찬 밥 한 덩어리라도 준 고마운 사람이 있어서 살 수 있었고, 우리 사회가 그런 좋은 사람이 더 많아 굴러 갈 수 있다고 성환씨는 말한다. 그 고마움을 갚으면서 살기 위해 봉사를 한다는 것이다.

긴 대화를 마치며 성환씨는 고아라서 받은 설움과 비애가 서려 있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세상이) 내게 왜 그랬지?"


태그:#선감학원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