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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전화

결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역사의 비극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결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역사의 비극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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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22일) 저녁을 먹고 난 뒤 JTBC 뉴스를 보고 있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손석희 앵커의 앵커브리핑이 끝난 뒤, 다시 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공군의 출격대기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였다.

"나라가 어찌되려고 이 모양이니?"
"그러게 말이에요. 공군까지 나서서 일반 국민을 폭격하려고 했었다니."
"아니, 그거 말고. 북한과 미국. 이러다가 진짜 전쟁 나는 거 아니니?"

시계를 보니 9시 조금 지난 시각. 어머니는 아버지와 KBS 뉴스를 보시다가 답답한 생각에 아들에게 전화를 거신 듯 했다. KBS가 뉴스머리에 북한 문제를 언급했겠거니.

"15일이 지나고 이제 북미 간 갈등은 조정 국면이에요. 전쟁이 그렇게 쉽게 나지 않죠. 물론 보수언론들이야 계속 전쟁 운운하면서 정부가 무능하다고 할 테지만. 차라리 지금 KBS 말고 JTBC 뉴스를 보세요. 그게 더 중요해요.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려고 했다는 사실."
"그러게. 그것도 참 답답해. 왜 하필 이런 시국에 저런 뉴스를 내보내는 건지. 사람들이 다 그래. 일부러 그런다고."
"아니에요. 어머니. 지금이 바로 저런 뉴스를 봐야할 때죠."
"그래? 저게 그렇게 중요해?"
"그럼요. 주위 분들이 왜 지나간 역사를 다시 들추냐고 하시죠? <택시운전사> 영화도 빨갱이 영화라고 하고? 그건 그만큼 5.18이 그들에게 아킬레스건이라는 뜻이에요. 이번 정부가 제대로 적폐를 청산하려 한다면 5.18도 다시 까봐야 할거예요."

평소 같았으며 이런 정치 이야기 뒤에 다시 소소한 일상의 화제들을 꺼내놓으며 대화를 이어나가셨을 당신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날만은 알았다며 전화를 툭 끊으셨다. 아들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한반도 정세나 5.18 광주 항쟁이 지금 왜 이야기되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것이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눈에 보듯 뻔했다. 카톡이나 문자 등을 통해 또 어머니의 수많은 지인들이 북한 빨갱이 문제와 5.18 광주사태를 보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들의 논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른 시각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게 전화를 걸어 대뜸 이것저것 물으셨으리라.

소시민의 5.18 광주항쟁

광주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
▲ 영화 <택시운전사> 광주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
ⓒ 더 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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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몇 주 전, 어머니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예매해 드리겠다는 나의 권유를 극구 사양하신 적이 있었다. 80년대 성당을 다니시며 주위 분들보다 비교적 빨리 광주의 참상을 아셨던 당신이었지만, 굳이 그 잔혹하고 아픈 이야기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주위에서 워낙 많은 이들이 영화 칭찬을 하고, 영화가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길 것 같다고 하니 어머니는 다시금 영화에 관심을 가지셨고, 여동생과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영화를 꼭 한 번 보시라고 권하고 나섰다. 그 어느 때 보다 어머니에게 강하게 영화를 권유하는 여동생.

"엄마, 이 영화 꼭 봐. 이 영화는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야. 잔인한 장면도 별로 안 나오고. 광주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광주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야기하는 영화야."

나도 덩달아 어머니에게 내가 꼽는 최고의 장면을 설명했다. 그것은 주인공인 김사복이 광주에서 어렵사리 도망쳐 나와 순천에서 잔치국수와 주먹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시민으로서 비루하지만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꾸역꾸역 음식을 억지로 넘기는 송강호의 연기.

그의 모습은 결국 현재 5.18 광주항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영화 <택시운전사>가 아직도 외부의 시선으로 광주를 바라본다며 불편해했지만, 그것은 지나친 기대에 불과하다. 아직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은 외부자의 시선으로라도 광주를 직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교과서는 '광주사태'를 '광주항쟁'으로 정정했지만, 아직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은 5.18의 실체를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그 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주범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그들로부터 시작된 정치세력이 아직도 이렇게 건재한데 어찌 이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부조화로 고민하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속편하다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우리는 주먹밥을 꾸역꾸역 넘기는 김사복처럼 역사를 그렇게 꾸역꾸역 외워만 왔다.

그래도 광주로 향하는 김사복
▲ 자신 보다 귀한 딸 그래도 광주로 향하는 김사복
ⓒ 더 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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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사복은 결국 운전대를 돌리고 만다. 자신보다 귀한 딸이 기다리고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비극을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선택이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지만, 그냥 눈 딱 감고 광주로 향한다. 그가 결코 잘 나서가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 때문이다. 맹자가 이야기한 인간의 조건.

나는 어머니께 비근한 예를 들었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그보다 훨씬 강한 이에게 막무가내로 맞고 있으면 어찌 하겠느냐고. 영문도 모르는 채 그 상황에 끼어들면 분명히 내게 여러 형태로 손해가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척 하며 지나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그냥 본능적으로 말려야 하지 않겠냐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바로 그것을 묻고 있었다. 당신이면 어찌 하겠느냐고. 무엇을 하겠느냐고.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난 80년 광주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신음을 하고 있다. 또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아직도 우리가 비겁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5.18 광주항쟁과 적폐청산

어쩌면 5.18 광주항쟁에 대한 재조명은 촛불시위로 잉태된 문재인 정부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현 정부가 호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이 아니다. 5.18 광주는 한국전쟁 시 민간인 학살 이후 현재 생존해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국가가 국민에게 가한 가장 어처구니없는 폭력으로서, 다시는 이 땅에 벌어져서는 안 되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30년도 넘은 광주를 들먹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이미 보상은 다 된 것 아니냐며 힐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결국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탄생에는 5.18 광주항쟁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이유도 크게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이 제대로 단죄를 받았다면, 우리의 민주주의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갔을까? 사회 구성원들이 80년 광주의 진실을 공유하고, 광주의 아픔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절절하게 승화시켰다면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일어났을까?

아니다. 5.18 광주가 제대로 조명되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은 그 날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가 지불하고 있는 값비싼 비용이다.

최근 <택시운전사>의 천만 관객 기록과 JTBC의 보도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적폐청산을 시대정신으로 내걸었던 촛불시위의 결과이다. 우리는 5.18 광주를 직시함으로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아야 하며, 다시는 국가가 국민에게 잘못된 폭력을 휘두를 수 없게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23일 손석희 앵커는 뉴스의 마지막 곡으로 'It's Never Too Late'이라는 노래를 골랐다. 절대 늦지 않았다.

결코 늦지 않았다
▲ 손석희의 선곡 결코 늦지 않았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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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주항쟁, #앵커브리핑,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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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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