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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에 나온 그 우윳빛깔의 아름다운 해안 도시 싯제스(Sitges)로 가기로 한 날, 하늘은 어제에 이어 여전히 푸르렀다. 5월 초의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한 낮엔 초여름의 더위를, 해가 지면 기분 좋은 선선한 가을 바람을 선사했다.

흔히 '시체스'라는 독특하게 들리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스페니쉬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싯제스' 혹은 '씨제스'에 가깝다.

오전 일찍 산츠(Estacio Sants)에서 싯제스 행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중간 기착지인 싯제스 역에 언제 내려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잠시 고민하던 끝에, 여학생들로 보이는 앞에 앉은 두 명의 스페니쉬 여성들에게 물어봤다. 전광판에 'proxima parada sitges'가 뜨면 이번 역이 싯제스라는 뜻이란다. 그렇게 약 40분을 달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 근처 관광안내소에 가면 흑백의 지도 한 장을 주며 아랫 동네의 랜드마크 격인 어떤 약국을 기점으로 더 아래로 내려가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다 필요없고 무조건 아래로만 내려가면 해안의 어느 곳으로든 닿게 된다. 직원이 방문객마다 국적을 확인하는데 최근 한국인 관광객들이 부쩍 늘어난 이유 중 하나가 드라마 때문이란 건 아마 몰랐을 것이다.

기차역에서 해변을 잇는 시가지
 기차역에서 해변을 잇는 시가지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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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붐비는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시내를 구경하며 맨 아래로 20분 남짓 걸어내려오면 드디어 열대의 나무들이 그득한 시원하고 탁 트인 해변을 만나게 된다.

싯제스 메인 해변의 초입
 싯제스 메인 해변의 초입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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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바라본 트 바르토메우 성당
 해변에서 바라본 트 바르토메우 성당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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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바다로 달려가 파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이 해변의 랜드마크인 '산트 바르토메우 성당(Parròquia de Sant Bartomeu i Santa Tecla)'이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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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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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주요 촬영지 중 하나였던 소박한 듯하면서도 나름의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성당의 곳곳을 탐색한 후 해변으로 내려왔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에메랄드 및 바다는 뭐라 설명할 필요 없이 그저 보고 느끼는 자체만으로도 나에겐 큰 청량감과 황홀감을 선사했다. 다가올 휴가 시즌에 맞춰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들기 전 아직은 비수기에 맞게 적당히 한적하고 깨끗한 5월의 해변이 주는 정취는 최고였다.

메인 해변
 메인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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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속 걷다가 메인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아래에 자리한 또다른 작은 해변을 발견했다. 어쩐지 공기가 독특해 보여 호기심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누드 비치였다. 싯제스에 누드 비치 혹은 게이 비치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에 개방돼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그 유럽의 누드 비치... 뭐, 메인 해변에서도 웬만한 여성들은 거의 자연스럽게 상체 노출을 하지만, 나이, 국적을 불문하고 남녀가 한데 어울려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유유자적 해변을 거닐거나 온 몸을 벌겋게 태우며 태닝을 하는 모습이 역시나 나에겐 작은 충격이었다.

곳곳에서 보이는 그리스 산토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흰색과 파란색이 시원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 두 가지 색을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그런 모든 정경이 큰 즐거움이었다.

해변 주변의 주택들
 해변 주변의 주택들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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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해변 주변
 메인 해변 주변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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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모래사장에 서서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시 두 발을 맡기고 서 있었다.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손미나씨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자유... 그렇게 잠시나마 '자유'라는 느낌에 젖어들었다.. 이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비록 비치 웨어를 따로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이 작은 낙원에서 여전히 답답한 관광객 차림에 갇혀 있어야 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꽤 강렬한 영혼의 자유를 느꼈다.

지금껏 나를 옭아맨 수많은 고민들과 두려움, 다시 한국에 돌아가 부닺쳐야 할 버거운 현실...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삶에 존재하지 않은 채 가슴 속엔 오직 너른 옥빛 바다와 파란 하늘 뿐이었다. 그저 이렇게 영원히 머물고만 싶었다. 당장 번잡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것조차 싫었다.

태양, 바다, 그리고 휴식...
 태양, 바다, 그리고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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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몰래 찍었다고 주인님한테 이르지 마...
 쉿, 몰래 찍었다고 주인님한테 이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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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두 종류의 여행지가 있는 것같다. 보는 곳과 느끼는 곳... 바르셀로나 같은 활기찬 대도시들이 보고 즐기는 곳이라면 이 작은 낙원 싯제스는 분명 느끼는 곳이다. 이곳에서 뭔가를 보려고만 하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여기서 짧게나마 특별한 자유를 느껴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의 가슴에 오래도록 큰 족적이 남을 것이라 말하고 싶다..

한때의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낸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바르셀로나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덧붙이는 글 | 추후 개인 블로그 http://arinalife.tistory.com/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스페인, #싯제스,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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