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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서울살이와 직장생활을 내려놓고 제주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서른일곱 살 늦은 나이에 '육아'의 세상에 갑자기 던져져 온갖 추태를 보이며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육아 중인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웃기고도 모자라게 육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드리기 위해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연재해보려 합니다. - 기자 말

당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 몹시 시끄러울 때였다. 아이는 인상을 쓰며 태어났다. "이런 난세에 왜 절 낳으셨나요?"라고 묻는 듯했다.
▲ 세상에 나온 아이 당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 몹시 시끄러울 때였다. 아이는 인상을 쓰며 태어났다. "이런 난세에 왜 절 낳으셨나요?"라고 묻는 듯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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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결혼하고 산 지 햇수로 3년 차가 됐다(관련 기사: 원빈 결혼하던 날 우리도 진상 부부가 되었습니다). 사계절 다른 매력을 느끼며 제주의 날씨에, 풍경에, 여유에 취해 산 것도 잠시, 늘그막에 애를 낳은 서른일곱 살의 나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충격적인 삶에 적응하느라 밤마다 울며 지냈다. 아이가 '생후 1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여전히 울긴 하지만, 열심히 적응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이고 죽겠다"가 됐다.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이 허공에다 대고 하는 말이다. 유일하게 내 옆에 존재하는 생물체, 저 꼬물거리는 애가 들을까봐 사실 크게 말하지도 못한다. "~한다면 살겠다"라는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목만 가누면', '되집기만 하면', '앉기라도 하면', '젖 물고 안 자면' 등 새로운 조건절을 파생시키며 지속됐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강도의 힘듦인데, 아기는 정말 예쁘다. 그래서 또한 하루에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너무 힘든데, 너무 예뻐"다.

"둘째는 죽어도 없어!"라고 하면서도 어느 날 속으로 '둘째 태명은 뭐로 하지?'라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도 기묘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그래서 나는, 글을 쓰며 아직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이의 신생아 시절을 억지로 떠올려보기로 한다. 기억해야 해. 그 고통의 나날들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면, 둘째 생각은 쏙 들어가 버리고 말겠지? (과연 그럴까….)

2016년 10월 17일, 인권 분만은 얼어 죽을!

아이를 열 달을 품고 있었으나, 탄생의 순간 아이의 곁에 나는 없다. 나는 당시 너무 외롭고 슬펐다.
▲ 첫 탄생의 순간 아이를 열 달을 품고 있었으나, 탄생의 순간 아이의 곁에 나는 없다. 나는 당시 너무 외롭고 슬펐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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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 열 달 동안 들고 다닌 병원의 산모수첩 첫 페이지엔 '르봐이예 인권분만'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아기 중심의 분만법으로 항생제, 관장, 제모, 촉진제, 무통 주사를 생략하는 자연주의 출산방법 중 하나였다. 나는 아기를 위해 이 방법으로 출산을 돕는 병원을 선택했다.

그런데 웬걸! 새벽에 진통이 와 찾아간 병원은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응 엄마 왔어? 얼마나 아파? 한번 볼까?" 처음 보는 간호사 언니의 반말(제주 특유의 어투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에도 적응이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다짜고짜 눕혀져 내진을 받았다.

손가락이 아니라 언니의 주먹이 통째로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처음 받아보는 내진에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이어 속사포처럼 관장하고 제모를 당했다.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인권분만은 어디로 가고 산모들이 겪는다는 3대 굴욕을 모두 당하고 그 뒤로도 12시간을 더 진통해야 했다.

"엄마! 다리를 더 벌려야 해. 이래선 애 못 낳아. 연습도 안하고 왔어?"

"저 3개월 요가했는데…."

"요가한 몸이 왜 이래?"

언어 '팩트' 폭력까지 받아가며, 양수까지 인위적으로 터뜨려가며 열두 시간을 고통에 시달렸다. 아이는 자꾸만 내려오는데 내 골반은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출산 중 가장 최악의 경우라는, 진통 끝에 제왕응급수술을 하게 됐다. 

나는 울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은 무서웠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듯 침대 양 끝에 팔이 묶였다. 마취한 하반신엔 감각이 없었지만, 눈을 뜬 채로 간호사 언니들의 수다와 칼이 살을 찢는 소리, 의사가 온 힘으로 아이를 꺼내고 헤집는 소리를 모두 들어야 했다. 한나절을 진통했는데, 수술은 15분 만에 끝이 났다.

아이는 머리가 찌그러져 공룡 알 모양으로 나왔다. 미안한 마음에 또 눈물이 흘렀다. 간호사 언니의 말대로 왜 요가도 한 몸은 이따위인가. 아이는 아빠가 아닌 의사의 손에 탯줄이 잘렸고,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의 품, 엄마의 젖꼭지가 아닌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먼저 수술실을 나갔다.

진통과 수술을 모두 겪어본 나로선, 수술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수술의 가장 큰 고통은 '상실감'과 '무력감'에서 온다.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에 찍은 사진엔 내가 없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전부다. 그리고 아이는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나와 함께 한 침대를 썼지만, 수술 후 통증으로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했던 나는 아이를 안을 수 없었다. 저 작고 작은 아이. 태어난 후 꼬박 하루를 자던 아이의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 살아 있는지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축야축'의 삶... "소가 된 기분이야"

한 방울 한 방을 모아 저장한 모유. 조리원에선 모유량으로도 자존감이 무척 낮아졌다. 한두 달 더 고생하고서야 거의 모유만 먹일 수 있었다.
▲ 출산 후 쥐어짜낸 모유의 양 한 방울 한 방을 모아 저장한 모유. 조리원에선 모유량으로도 자존감이 무척 낮아졌다. 한두 달 더 고생하고서야 거의 모유만 먹일 수 있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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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 이튿날, 소변줄을 빼자마자 나는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지를 떨면서 겨우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수술 때문에 젖 물리는 일이 늦어져서 조리원에 있는 동안에도 모유량을 늘리느라 꽤 고생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나오지도 않는 엄마의 젖꼭지를 좋아해 열심히 빨아주었다.

조리원에서의 2주는 온통 '젖'들로 채워졌다. 새벽 다섯 시부터 자정까지 나는 수시로 수유실로 불려가 아이와 사투를 벌이며 젖을 물렸다. 아이의 입에 젖꼭지를 넣는 게 그렇게 땀이 많이 나는 일인지 처음 알았다.

한 시간가량 젖을 물리다 땀에 흠뻑 젖어 방으로 돌아오면 유축을 했다. 애 낳으면 모유는 그냥 펑펑 쏟아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30분간 아무리 열심히 짜도 20mL, 30mL가 전부였다. 정말 말 그대로 한 방울 한 방울을 쥐어짜내 모아야 했다. 젖병에 두 병씩 세 병씩 넘치도록 받아오는 산모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다. 나의 빈약한 젖병을 숨기듯 신생아실로 갖다 주고 오면 조리원 방 안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면 나는 또 그 머슴 밥을 남김없이 퍼먹었다. 젖을 짜고 나면 몹시 허기졌다. 

저녁엔 남편이 퇴근하고 조리원에 잠시 들렀다. 남편의 손에는 삼각김밥이나 햄버거가 들려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편의점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다 사흘 만에 장염이 걸리기도 했다. 조리원에서 나오는 식사를 좀 나눠줄까, 생각하며 먹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하는 일이라곤 젖 짜는 일밖에 없는데, 매일매일 허기졌다.

"…젖소가 된 기분이야."

미역국을 사발로 들이켜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러곤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졌다. 출산 후부터 젖 짜느라 고생하는 지금까지, 나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좌절감에 자꾸만 작아지고 위축됐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일 것이다. 너무나 새로운 길로 접어들어 완전히 헤매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내가 잊지 않도록 늘 상기시켜주었다.

"고작 일주일 지났을 뿐이야. 앞으로 조금씩 나아질 거야." 

웃다가 울다가, 감정이 널뛰기 시작했다

천국이라는 조리원에서도 매일 울었다. 집에 가선 더 많이 울었다.
▲ 조리원에서의 하루하루 천국이라는 조리원에서도 매일 울었다. 집에 가선 더 많이 울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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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쿨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나름 '쿨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신랑의 흡연을 개인의 기호식품이라 생각해 터치하지 않았다. 언제고 남편이 "나 여행 좀 다녀올게" 해도 언제나 응원해주고 지지해줄 의향이 있었다. 임신 기간에도 입덧이 심하질 않아 한겨울에 딸기를 사 오라 하는 심부름도 시켜본 적이 없다.

하지만 출산과 동시에 내 감정의 선은 널을 뛰기 시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참을 만한 일이었는데도 굳이 오래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뒀다가 말로 꺼내버렸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눈물은 자꾸만 줄줄 흘러내렸고, 이 미친 호르몬이 도통 나를 가만 놔두질 않았다.

미친 호르몬의 발광을 받아줄 자는 이 외딴 섬 제주에서 단 한 명, 남편이었다. 남편이란 존재는 한없이 가엽다가도 코 한 번 잘못 골면 그렇게 미운 존재가 됐다. 새벽 동이 터오는데 난 잠도 못자고 아이의 젖을 물리고 있는데….

너무 화가 나서 남편 콧구멍에 못을 때려 박고 싶었다. 퇴근하고 부리나케 달려와 최선을 다해 육아에 동참해주는 고마운 남편인데도 출근할 땐 그렇게 서러워 울고, 한밤중엔 그렇게 미워서 울었다. 지금도 우리는 못 자긴 매한가지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 동안, 특히나 남편은 가시방석이 쫙 깔린 침대에서 자는 기분이었을 거다.

'아기가 다 알아서 한다', '때가 되면 다 한다', '아기가 어쩜 이렇게 순하냐. 이런 아이면 열은 키울 수 있겠다' 등의 말들도 너무나 상처가 됐다.

'아니 애가 다 알아서 하는데, 난 왜 이렇게 힘든 건가. 그럼 지금 잠도 못자고 애를 보는 나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닌 건가. 열심히 육아를 도와주는 어머니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닌 건가. 말이 쉽지 네가 한번 해봐….'

가뜩이나 자존감이 낮아진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울면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미움을 지구 반대편까지 쌓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이불킥'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다음 편에서…)


태그:#육아, #출산후기, #산후조리원, #모유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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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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