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올 봄에 드론으로 찍은 모종재 느티나무.
 올 봄에 드론으로 찍은 모종재 느티나무.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단지에서 자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마을을 상징할 만한 커다란 나무 한 그루씩은 다 있었습니다.

마을을 상징하는 나무는 동구 밖, 마을 입구에 있는 아름드리 굵기의 나무일 수도 있고, 일 년에 한 번씩 치성을 받는 성황당나무일 수도 있고, 구구절절한 전설을 담고 있는 고갯길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제 고향하면 떠오르는 랜드 마크는 모종재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입니다. 수령도 수령이고, 수형도 수형이지만 고향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추억의 최소공배수를 더듬어가다 보면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정답입니다.

지금이야 인적 뜸한 언덕에서 덩그러니 자라고 있는 잘생긴 느티나무에 불과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봄이 오면 가지마다 연둣빛 새싹을 틔워 공작꼬리 부채를 활짝 편 모양으로 온 동네를 봄 색깔로 휘감았습니다.

오월 단오가 가까워지면 팔뚝 굵기의 그넷줄을 매던 곳도 그 느티나무였고, 기력 쇠한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며 한여름 더위를 달래던 피서지도 그 느티나무 아래였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악동들이 매미소리 보다 더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놀던 곳도 그 느티나무 아래였고, 등 굽은 할머니가 동구 밖을 내려다보던 곳도 바로 그 느티나무 아래였습니다.

느티나무 아래서 누가 누구를 만났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혼삿말이 오갔고, 청춘남녀가 그곳에서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 느티나무는 이육사가 읊은 청포도나무처럼 청포도는 열리지 않았지만 온갖 추억이 다 영글어가는 그런 나무였습니다.  

사계절 나무에 담긴 조선 지식의 삶 <나무를 품은 선비>

<나무를 품은 선비> / 지은이 강판권 /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 2017년 6월 22일 / 값 16,000원
 <나무를 품은 선비> / 지은이 강판권 /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 2017년 6월 22일 / 값 16,000원
ⓒ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관련사진보기

<나무를 품은 선비>(지은이 강판권,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는 조선의 선비들이 품은 나무, 시구로 읊고 사연으로 그려낸 나이테 같은 삶의 이야기입니다.

나무에 얽힌 사연들은 시구로 읊고, 나무에 새겨진 의미와 상징들은 삶의 지조로 승화해 나가니 남명 조식이 품은 매실나무는 고매한 선비 정신을 기리는 흔적이 되고, 장유와 연을 맺은 산수유는 수유와 산수유를 구분하는 꼼꼼한 분별력으로 다가옵니다.

'대개 서울에서 여의주까지 약 1,050리, 의주에서 북경까지 2,061리로 전체 3,111리 정도다. 서울에서 북경까지 도착하려면 40여 일이 필요하다. 사행 일행이 북경에 체류하는 기간은 대개 40∼60일 정도였다. 그래서 사행의 왕복 6,000리는 넉 달에서 여섯 달 정도 걸리는 거리다. 이상적이 10월에 떠나 다음해 3월에 도착했으니, 그가 사행에서 걸린 기간은 다섯 달 정도였다.' - <나무를 품은 선비> 67쪽

요즘이야 두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북경이지만 역관이었던 이상적이 살던 그때는 무려 40여 일이나 걸려야 갈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려 선물한 이상적이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에 종종 살구나무가 등장하니 이상적은 살구나무를 품고 살구나무는 이상적을 꽃피웠습니다. 

사람들이 추억으로 더듬는 나무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나이테를 셀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고목들도 있지만 빨간 앵두가 송골송골 열리던 앵두나무, 우물가나 양지바른 장독대 언저리에서 자라고 있던 앵두나무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에는 장미과의 앵두를 꼽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양반가에는 거의 예외 없이 앵두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앵두나무가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이유는 열매가 다닥다닥 달리기 때문이다. 콩과의 박태기나무도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다. 박태기나무가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유래는 중국 남조시대 송나라 동양무의東陽無疑의 <제해기>에 나온다. - <나무를 품은 선비> 153쪽

조선 지식인의 삶 오롯이 만날 수 있는 통로

봄 햇살처럼 활짝 꽃피우는 매실나무, 목련, 살구나무, 해당화에서부터 삭풍 부는 한겨울에도 늘 푸른 기상 잃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까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를 아우르는 나무들이 갖고 있는 나름의 의미와 상징이야말로 조선 선비들이 그 나무를 품은 까닭이며 뜻일 겁니다.  

소나무 가까이 가면 솔향이 나고,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가면 버들피리 소리가 연상되기 마련입니다. 허나 이 책에서 소나무를 읽으면 벽송사에 똬리를 튼 지엄 스님의 오도송이 들리고, 버드나무 그늘로 들어서게 되면 가장 극적으로 성리학자의 삶을  보여준 면우 곽종석의 삶이 하늘거리는 아지랑이와 어울려 얼쑤덜쑤 춤추는 버들잎의 추임새로 다가옵니다.

한 그루에 나무에도 의미를 두었던 조선의 지식인들, 그 지식인들이 둔 의미를 변덕부리지 않고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나무들이야말로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들이 그런 의미를 각인한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을 만날 수 있는 오롯한 통로가 아닐까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나무를 품은 선비> / 지은이 강판권 /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 2017년 6월 22일 / 값 16,000원



나무를 품은 선비 - 사계절 나무에 담긴 조선 지식인의 삶

강판권 지음, 위즈덤하우스(2017)


태그:#나무를 품은 선비, #강판권,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