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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6월 모의고사 끝나고 바람 쐬러가요."

삼수생 아들이 쳐진 어깨를 하고 다가와 말을 건다.

"그럴까? 어디 가고 싶은데?"
"아무데나요."
"음...어디가 좋을까? 지난달 이모가 전남교육청으로 발령이 나서 목포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 한번 가볼까? 엄마도 목포 안 가봤는데."

아들은 무심한 얼굴로 "그래요"한다. 계란말이에 저녁을 먹은 아들은 독서실 간다며 모자를 집어 들다가 묻는다.

"세월호 미수습 학생들 다 찾았어요? 제가 휴대폰도 안 하고 뉴스도 안 본지 오래 돼서."

순간 멈칫했다. 아니, 아직.

2014년 4월 23일은 고2 아들이 생애 첫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초, 중학교 때는 신종플루니 사스 같은 전염병 때문에 번번이 취소됐다. 그때가 첫 수학여행이었다. 아들과 나는 3박4일 동안 입을 티셔츠 3개와 바지 1개를 샀다. 아들은 들떠서 상표도 떼지 않고 새로 산 옷들을 한쪽에 모셔놓았다.

수학여행을 일주일 앞둔 수요일. 당시 나는 서울 모처에서 3년 동안 인문학 강의를 수강하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 책을 읽고 있었다. 오전 10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무음으로 설정한 전화기가 환해지며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수업 끝나고 다시 걸 생각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지자 이모, 고모, 부모님의 전화가 이어졌다. 불안했다. 무슨 일이지? 하는 수 없이 조용히 뒤로 나갔다. 누구에게 먼저 전화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는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종욱이 수학여행 갔어?" 묻는다. 뜬금없는 질문에 "왜?"라고 물었더니 버럭 화를 내며 "갔어? 안 갔어?" 다그친다. 주눅이 들어 "안 갔어. 다음 주에 가"했다. 오빠는 "아이고 다행이네, 아이고 다행이야"를 연발했다. 이어 뉴스를 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수도 없이 걸려온 전화들은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우리 집은 안산이다. 아들은 단원고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다음 주에 아들은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에 가기로 돼있었다. 수학여행은 취소됐고, 상표도 떼지 않은 옷들에 먼지가 앉았다.

그날 침몰한 것은 세월호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를 잃은 아이들, 작년까지도 이 학교에 계시다가 단원고로 옮긴 후 사라진 선생님과 동료를 잃은 선생님들, 언니 오빠를 잃어버린 아이들, 한 다리만 걸치면 연결이 되어 알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 안산은 깊숙이 침몰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됐다. 한 줄 기대는 실망이 되고, 분노가 됐다. 마침내 자식을 잃은 부모 앞에서 폭식하는 인간들을 보며 좌절했다. 국가가 나서서 조장하는 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영혼까지 털리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호 참사로 합의금을 얼마 받았다는 얘기, 이제 지겨우니 그만 하라는 얘기, 인양하는 데 국민 혈세가 나간다는 둥의 이야기가 쏟아지자 우리 가족은 서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집안에서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무력감에 빠져 억울함을 말하는 것조차 의미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난 또래 친구들을 잃은 아들이 힘들까 봐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들 또한 세월호 이야기만 나와도 눈물 흘리는 내가 더 힘들까봐 말을 아꼈다. 1주일 후에 일어났다면 내 일이 될 뻔한 이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내 아이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세월호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초, 중학교 학생회장과 반장을 도맡아 하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이는 심하게 휘청거렸다. 물론 학교도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들 금방 평정심을 찾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한번 휘청인 아들은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월 모의고사가 끝난 6월 4일 일요일. 아들과 나는 목포에 갔다. 삼수생 조카가 안쓰러웠는지 언니는 TV에 소개된 맛집으로 우리를 데려가 온갖 요리를 사주었다. 다음날 언니는 출근하고 아들과 나는 근처 갈 만한 곳을 찾다가 진도로 향했다. 진도 가는 길에 우연히 현수막을 보았다. 노란 현수막에는 '세월호 임시 거치대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들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가볼까?"하는 나의 말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포 신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세월호 앞까지 가는 셔틀을 탔다. 셔틀은 20분 간격으로 무상 운행되고 있었다. 셔틀에서 내리자 노란리본이 우리를 맞았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의 임시 거쳐가 있고 마주보는 자리에 세월호가 있었다.

300백 명이 넘는 희생자를 만든 세월호는 생각보다 작고 녹슬고 초라했다. 하늘은 구름 없이 맑고 노란 리본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세월호만 옆으로 누워 녹슨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아들과 나는 한참을 말없이 서서 그저 세월호를 바라보았다.

목포 신항 세월호 만나러 가는 길
▲ 목포 신항 세월호 거치대 입구사진 목포 신항 세월호 만나러 가는 길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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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진
▲ 세월호 사진 세월호 사진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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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도로 향했다. 아들은 진도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팽목항에 들러보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운림산방과 쌍계사 남도진성을 둘러 본 후 팽목항으로 갔다. 모두가 떠난 팽목항은 희뿌옇게 색이 바랜 노란 리본이 엉성하게 남아있었다. 배를 정박하기 위해 떠있는 바지선과 항구 사이에 바람이 지나면서 쇠울음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으며 자식 잃은 부모들이 3년을 바라봤을 바다를 바라보았다. 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의 바다를.

쓸쓸한 팽목항
▲ 아무도 오지 않는 팽목항 쓸쓸한 팽목항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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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사진
▲ 아무도 오지 않는 팽목항 팽목항 사진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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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팽목항 임시 분향소는 쓸쓸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향을 피워 올렸다. 입구는 차가웠지만, 안쪽은 따뜻했다. 아이들이 더 이상 춥지 않게 보일러를 켜놓았구나.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지며 여태 참았던 눈물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심호흡을 몇번 한 후 나와서 깨끗한 리본에 짧은 글을 써서 매달았다. 바다를 보고 있던 아들도 분향소에 들어가 한참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답다는 세방낙조에 갔다. 바다는 다 같은 바다인데 이 바다는 울음소리도 없고 평화로워 보였다. 아들과 나란히 2인용 그네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 아들은 여행 오길 잘한 거 같다고 했다. 마음정리도 되고 여러 가지로 좋다고 했다. 아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통째로 흔들렸던 그 날 이후 지나온 그 시간을 잘 보듬어 더 이상 상처가 덧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고요한 세방 낙조의 바다
▲ 세방낙조에서 바라 본 바다 고요한 세방 낙조의 바다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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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태그:#세월호, #진도, #목포 신항, #팽목항, #노랑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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