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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물자를 만들어 내야 했던 야하타제철소 강제징용노동자들

배동록씨가 어머니의 야하타제철소 신분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이것이 증거 배동록씨가 어머니의 야하타제철소 신분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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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제 어머니가 야하타제철소에서 일했다는 증명서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이 증명서를 다시 꺼내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고 했습니다."

규슈 지역 조선인강제징용 역사를 찾아 떠난 우리 일행은 둘째 날 조선인강제징용 2세인 배동록씨를 마주했다. 배동록씨는 야하타제철소 신분증을 꺼내들고 자신의 아픔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이 곳에서 일하며 무거운 탄을 옮겨 실는 작업을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매질을 하며 조선인들을 몰아세웠고 어머니는 힘든 마음에 석탄더미에 묻히고 싶었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야하타제철소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전쟁 배상금으로 지난 1901년 건설한 제철소다. 지금은 (용광)로만 남아있고 나머지 부지는 유원지로 변해 있었다. 야하타제철소 로는 1945년 일본 패전 전까지 철을 생산했고, 이 철은 군함과 어뢰, 전투기 제작에 사용되었다.

잔혹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전쟁의 배상금으로 또 사람을 죽이는 전쟁물자를 생산했고, 그 전쟁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은 국가의 국민을 강제징용해 혹사시킨 것이다.

현재의 야하타제철소의 남아있는 로는 야하타제철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야하타제철소 100년의 역사를 기록한 기념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가 건설 착공식을 축하하는 사진도 걸려 있었고, 일본 근대화의 자랑처럼 선전되고 있었다.

야하타제철소 로만 남아 위치를 지키고 있다. 로 꼭대기에 1901년이라고 야하타제철소 건립년도가 새겨져 있다
▲ 관광지로 변한 야하타제철소 야하타제철소 로만 남아 위치를 지키고 있다. 로 꼭대기에 1901년이라고 야하타제철소 건립년도가 새겨져 있다
ⓒ 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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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야하타제철소가 전후 건설에 이바지했다며 자랑하고 있지만 조선인 6천명이 강제징용되어 일한 사실은 숨기고 있습니다. 기념관에 조선인이 일했다고 한 줄만 넣어달라고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배씨는 야하타 제철소에서도 역시 조선인강제징용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렸다. 특히 야하타제철소 기념관에는 노동자를 소개하는 부스가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은 소개하지 않았다.

배동록씨가 당시 어머니가 탄을 옮기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이렇게 이고 옮겼습니다. 배동록씨가 당시 어머니가 탄을 옮기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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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씨에 따르면 야하타제철소의 조선인들은 로 바로 앞 쇳물 앞에 서서 슬러지를 바가지 같은 걸로 걸러내거나 무거운 슬러지를 옮기는 일을 했다. 탄을 옮기는 노동자들은 트럭 1대당 4명씩 모여 대나무 바구니로 탄을 옮겼다. 무거운 무게로 허리 한번 제대로 펴기 힘들었고, 성인뿐만 아니라 중학생 정도의 어린아이들도 노동에 동원되었다.

쇳물앞에서 방호복을 입고 있지만 예전 조선인들은 어떤 방호복을 입었을까
▲ 쇳물앞에서 쇳물앞에서 방호복을 입고 있지만 예전 조선인들은 어떤 방호복을 입었을까
ⓒ 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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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임금은 두당 2엔으로 약속되었지만 돈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고된 노동에 도망가는 조선인을 잡아 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머니는 야하타제철소 이야기를 하면 항상 울면서 말합니다. 우리는 노예였다, 절대로 이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배동록씨 어머니의 호소는 오로지 아들인 배동록씨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인강제징용의 역사가 증언되고 있는 야하타제철소는 기념관으로 남아 관광객을 맞이했고, 놀이동산으로 변한 남은 부지에는 대관람차만 하염없이 돌아갔다.

무엇이 사람의 무덤인가

야하타 제철소를 들린 일행들은 배동록씨와 함께 휴가묘지로 향했다. 휴가묘지는 후쿠오카현 소에다마을의 공동묘지다. 이 곳에는 세 종류의 묘가 있다. 일본인 가족묘와 애완동물 묘, 그리고 조선인강제징용 노동자의 묘다.

휴가묘지에 들어서자 웅대한 일본인들의 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한 귀퉁이에는 애완동물의 묘가 가지런히 들어서 있었고, 입석 돌에는 고양이,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선인의 묘는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있다고 했다.

애완동물묘가 가지런히 정비되어 있다
▲ 가지런히 놓인 애완동물의 묘 애완동물묘가 가지런히 정비되어 있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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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산에나 있을 법한 돌들이 놓여 있을 뿐 조선강제징용자들의 묘를 찾을 수는 없었다.

"발 아래 놓여있는 그 돌이 우리 조선인강제징용자들의 묻혀 있는 곳입니다."

배동록씨의 설명에 바라본 땅에는 아무런 표시도, 돌에 새겨져있는 글씨조차 없는 돌멩이가 곳곳에 널부려져 있었다. 산 속에 세워져 있는 작은 돌과 같은 것이 조선인강제징용자들이 묻힌 곳이었다.

"주위에 효슈탄광이라고 있었는데, 그곳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죽고나서도 일본 사람들은 시체를 옆에 두고 조선인들에게 일을 강요하였습니다."

돌멩이 아래 조선인강제징용의 유골이 묻혀있다
▲ 강제징용조선인의 묘 돌멩이 아래 조선인강제징용의 유골이 묻혀있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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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휴가묘지의 조선인 묘는 이 곳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다른 조선인강제징용자들이 몰래 매장한 곳이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입석은 37기로 37분의 유해가 묻혀있다는 것이다. 휴가묘지도 사실은 잊혀질 뻔했지만 탄광노동자 중 생존자인 고 김귀동씨의 증언에 따라 발견된 것이다.

휴가묘지 유가족이 찾은 날. 그는 나무에 전남이라고 쓰고 이곳에 사람이 있다고 알렸다. 그 옆 나무에는 광주라고 새겨져 있다
▲ 이 곳에 전라도 사람이 있다 휴가묘지 유가족이 찾은 날. 그는 나무에 전남이라고 쓰고 이곳에 사람이 있다고 알렸다. 그 옆 나무에는 광주라고 새겨져 있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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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름도 있고 가족도 있었지만 나라를 잃었다는 이유로 타국으로 끌려와 이름도, 누울 자리도 없이 죽어간 조선인강제징용자들의 한이 가슴을 때려왔다. 배동록씨는 휴가묘지 앞에서 탄광노동자였던 안용한씨의 '신세타령가'를 구슬프게 불렀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숯(석탄)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 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석탄)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말만 하면은 몽두리(몽둥이)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어머니 장에서 쌀가루 부쳐왔네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보따리 풀어서 쌀가루 집어먹고
눈물만 흘리면서 어머니 불러봤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 부르고
감독님 겁이 나서 가만히 불러봤네

"대일본제국군인은 전쟁터에서 3일이나 4일이나 밥도 안 먹으면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너희들은 3끼니 꼬박꼬박 밥을 먹고 있지 않느냐!"

십오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 뚜드려 맞았네
몽두리 맞고서 굴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죽은 아(아이)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감독놈은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숯(석탄)담아 내라했네

"대일본제국군인은 전쟁터에서 친구가 죽으면 거기에 숨으면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너희들은 한 사람 죽었다고 거기에 몰려 울고불고 해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겠느냐! 부상당한 자는 모두 올려 보냈고, 죽은 자들은 일이 끝나면 하꼬를 내줄테니 데려 가거라, 먼저 숱을 파라! "

이 말을 듣고서 복장을 두들면서
나라 뺏긴 민족은 요렇게 설움받나

몽두리 맞을 각오는 같이 맞자하며
하꼬를 제쳐서 숯(석탄)을 부어냈네

하꼬를 일받아서 죽은 사람 실어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천장만 쳐다봤네

여기저기에서 죽은 사람은 많았는데
초상치는 것은 한 번도 못 봤네

고향땅을 밟지 못한 유골이 여전히 일본 땅에 안치되어 있다
▲ 무궁화당 유골 고향땅을 밟지 못한 유골이 여전히 일본 땅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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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는 강제징용의 역사, 하지만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일본 내 조선인강제징용의 역사는 지워지고 숨겨지고 있었지만 이를 바로 잡아나가고자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곳이 무궁화당이다. 무궁화당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무연고 납골당이다. 무궁화당은 강제징용 피해자였던 고 배래선씨(2008년 별세)가 해방 이후 자신을 희생하며 일본 각지 절과 탄광 묘지 등에 방치된 조선인 유해를 발굴하고 모으며 만들어졌다.

현재는 121기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무궁화당이 건립되는 데에는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의 역할이 있었다. 키리우 무궁화당 이사장은 추모당인 무궁화당의 건립배경을 설명했다.

"처음 무궁화당을 건립하기 위해 이스카시 공동묘지에 조선인 유골을 모아 추모당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시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난 지난 2000년 끈질긴 설득 끝에 승인을 얻었고 지금의 무궁화당이 되었습니다."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은 무궁화당에 유골을 모아 고향에 돌려보내려고 노력했고, 4분의 유골의 연고자를 찾았다. 이 중 2분의 유골은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졌지만 2분의 유골은 유가족의 경제사정으로 돌려보내지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들이 확인되고 있음에도 부모나 형제의 유골을 되찾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식민지의 피해인 만큼 일본 정부가 책임지고 한국정부가 요구해 유골을 고향땅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무궁화당 관계자들의 노력은 민간노력에 그치고 있고,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현재는 강제징용피해자들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이 확인된 4분 외에도 1분이 더 유가족을 확인하고 고향 땅에 묻히기 위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단체 위주로 진행하다 보니 그 속도가 더디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 우익들의 탄압도 있다. 최근 무궁화당에는 일본 우익들이 찾아와 철거 시위를 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자국의 유골도 찾아가지 못한다고 일본 사람들이 비웃고 있습니다. 무궁화당도 건립하기 힘들었지만 일본 내 한국민단과 총련본부가 함께 힘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이 되어 우리가 힘을 갖고 일본 강제징용의 역사도 밝혀내고, 조선인강제징용의 아픔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언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까
▲ 무궁화당안 추모하는 배동록씨 언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까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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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민플러스에도 제공할 예정입니다.



태그:#일제강제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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