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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당시의 기억들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장재근 광수중 교장
 18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당시의 기억들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장재근 광수중 교장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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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대배치 받고 신병 때였을 거야. 함평에 있던 부대가 광주로 파견나갔지. 해안초소 경비근무 부대와 내륙타격대 근무를 교대로 했어. 그때 우리부대가 내륙타격대 근무할 때라 광주로 내려갔지. "

18일 만난 광수중학교 장재근 교장은 잠시 기억에 잠겼다. 그는 2년마다 망월동 묘지를 찾는다. "내가 겪은 건 전하고 살겠다. 들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매 번 다짐한다는 그. 그런 그는 한창 나이인 이십대 초반 전경에 입대했다. 그 당시 전경은 지원제도라 그는 시험까지 봐가며 준비했다. 전라도 익산 출신에 전북대를 다녔던 그는 자대배치를 4월에 받았다. 그러다 한참 신병이던 1980년 5월 광주에서 5·18을 맞게 됐다. 요즘과 달리 쉽게 입지도 벗기도 힘든 진압복. 그걸 입고 그는 광주 금남로에 시민들과 남았다.

"부대원 약 80%가 전남출신들이었어. 그중 8~90%가 조선대, 전남대 출신이었지. 시위대와 전경들은 어떻게 보면 다 친구였지."

그는 그 당시 횃불시위 모습과 평화적이던 시위 모습을 회상했다. 맨 앞에 교수들이 앞장선 공개적인 시위였다. 이상하게도 무슨 전조가 있었는지 5·18 며칠 전 시위가 격화되다가 5·18 인접해 평화적인 분위기가 됐다.

"사방에 총소리가 났지. 공수부대에 사람들이 쫓겨서 도망가면 셔터를 내리는데 그 사이에 사람이 끼고 난리가 아니었지. 부대원들은 총을 맨 체 한 손엔 칼이나 쇠파이프에 몽둥이(진압봉)를 들었어."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쫓기면 전경들 쪽으로 도망 왔다. 전경들은 모른 척 슬쩍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 당시 전투경찰은 전담에 3개 대대가 있었다. 각 타격대와 각 경찰서 최소인원 빼고 다 올라오라는 명령도 있었다.

전경들은 총격전이 벌어지면 전남도청에 숨었다. 부대장이 창가 옆에 있지말라고 해서 벽이나 기둥 뒤에 숨었다. 그러다 그는 "각자 알아서 해산하라"는 지도부의 명령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이라는 동료와 다른 부대원 함께 총 셋이서 나섰다.

"이놈도 내자식이고 저놈도 내자식 아니냐"


18일 1980년 5월 자신이 복무하던 전경부대와 공수부대 시민들의 상황을 그림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장재근 광수중 교장
 18일 1980년 5월 자신이 복무하던 전경부대와 공수부대 시민들의 상황을 그림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장재근 광수중 교장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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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그들은 얼마 못가 시민들에게 잡혔다. 그런데 자신들이 전경임을 알아 본 시민들은 자신들을 풀어줬다. 그렇게 2번이나 잡히고도 그들은 무사했다. 그러다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주겠다는 한 아저씨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적십자병원. 그들은 그곳 지하에서 공수부대가 물러 갈 때까지 지냈다. 

"피가 모자란다는 소리에 사람들이 엄청 몰려 들었어. 사람이 부족해 우리도 함께했지. 시신들이 많았는데. 그중 공수부대원 시체가 있는거야. 사람들이 난리났지. 그런데 사람들이 막 싸우다가 말려. '이놈도 내자식이고 저놈도 내자식 아니냐고'"


그는 '이놈도 저놈도 내자식'이라며 싸움을 말리는 주민들을 보며 맘이 무거웠다. 그가 지낸 적십자병원은 매일같이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를 나눠주기 위해 끝없는 줄을 이었다. 그는 칼로 찔린 시신, 총 맞은 시신, 수많은 수혈을 위해 대기하던 행렬을 지켜봤다.

잠시 그는 안병하 전 전남경찰국장을 회상했다. 당시 시위진압을 명령받은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은 경찰들을 무장시키지 않고 해산시켰다. 그런 그의 노력으로 이제 스승이 된 그와 수많은 경찰들은 잔인한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안병한 전 전남경찰국장은 고문후유증으로 1988년 사망하여 2006년에 이르러서야 순직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해산됐던 경찰들과 전경들은 5·18이 마무리되자 다시 복귀하기 시작했다. 전경이었던 장 교장도 길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밥을 얻어먹었다. 전화도 쓰게 해줘 집에 연락을 했다. 자신의 형도 군대에서 사망했기에, 집에서는 그가 죽은 줄 알고 난리가 났었단다. 자신의 아버지는 그 위험한 시기에 자신을 보러 광주까지 내려왔다.

시민들, 전경에 악감정 없어

전남 도청 정면 사진
 전남 도청 정면 사진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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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전경들 사이에선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어. 그 정도로 시민들이 전경들에 악감정이 없었지. 근데 전남도청 경비 설 때 시민들이 경비서는 우리들에게 하는 욕설을 들었어. 그 분노의 감정이 전해졌지. 우리가 M-16 총을 들고 경비를 서서 우리를 군인으로 알았었는지..."

그의 부대는 잠시 전남도청의 경비를 섰다. 무슨 인연인지 도청 앞에서의 입관식도 지켜봤다.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광주에 파견된 전경 부대들을 다 원대복귀 시켰다. 새로운 부대들을 광주로 오게 했다. 자신들의 부대도 대전 쪽으로 가게 됐단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국민을 학살한 그들(5·18관련자들을)을 절대용서 못한다"며 "절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라고 분노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가면 5·18 유가족들을 버스로 강제이동시켰던 것도 기억했다.

장 교장은 과거 5·18 청문회를 보며 뻔뻔히 거짓말을 하는 모 부대장을 보고 분노했다. 자신들이 있던 곳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을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며 "용서할 수 없다"고 몇 번씩 되뇌었다.

"미국의 본질을 알게 된 계기가 어쩌면 5·18일지도 몰라. 시민들이 미 7함대 온다고 얼마나 기뻐했는데. 자신들 구해주는 줄 알고..."

그는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기억을 토해냈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 공포의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희망이라 미국을 믿었던 5월의 시민들. 그 미국을 구세주라 기대하고 계엄군을 몰아내 줄거라 행복해하며 미군을 기다리던 시민들의 얼굴들을 잊지 못했다.

우리에게 남은 그날의 5·18, 현재의 5·18, 앞으로의 5·18

전남 도청 앞 광장 모습
 전남 도청 앞 광장 모습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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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날의 5·18과 현재의 5·18, 앞으로의 5·18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듯 각자 기억하는 5·18의 아픔은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한이 되고, 누군가에겐 고통스런 기억이 되는 5·18. 부모를 잃은 자식이나 자식을 잃은 부모나 그것을 지켜봐야했던 무기력한 이들이나 그 통증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제와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그 슬픈 기억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삶을 37년간 관통한 5·18.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오늘에서야 다시 한 번 2018년의 5·18을 바라본다. 그대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그날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덧붙이는 글 | 경기미디어리포트에도 송고됩니다.



태그:#518, #전남도청, #광주민주화운동, #장재근, #경기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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