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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7일, 5.18 구묘역에 게양된 조기 사이로 강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2015년 5월 27일, 5.18 구묘역에 게양된 조기 사이로 강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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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광주의 항쟁이 끝나던 그 날,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군은 전남도청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M16 소총에 의한 총상'이었다.

전날인 5월 26일, 문군의 아버지 문건양(83)씨는 "아들을 확 끄집고 나와블라고" 전남도청을 찾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강용주(전 광주 트라우마센터장, 5.18 당시 동신고 3학년)씨는 아래와 같이 떠올렸다.

"재학이가 도청 기동타격대로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재학이를 데리러 오셨죠. 그때 재학이가 이랬어요. '친구 하나는 21일 집단발포로 죽고, 한 명은 22일 죽었어요. 친구들이 여기서 다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버리고 갑니까.' 난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결국, 재학이는) 죽었어요." - <한겨레> 인터뷰 중

18일이 낀 일주일, 아버지는 매일 아들의 묘를 찾는다

계엄군의 진압 직후를 담은 독일인 힌츠페터의 영상을 보면, 전남도청 계단은 피로 물들어 있다.
 계엄군의 진압 직후를 담은 독일인 힌츠페터의 영상을 보면, 전남도청 계단은 피로 물들어 있다.
ⓒ 힌츠페터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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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그날의 미세한 공기마저도 잊지 않았다. 귀가 어두워 큰소리로 질문을 던져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나이가 됐지만, 그는 아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그 날을 묻는 질문에는 거침없이 답변을 쏟아냈다.

"그날 내 눈에 비친 하나하나 다 기억납니다. 내가 죽음 직전의 아들을 거따가 놔두고 온 아버지 아니요? 그 고등학생 하나를 못 끌고 나온 것이 한스러워서 지금도 나를 원망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애써 마음을 달랜다.

"근디 지금 와서 달리 생각해보믄 또 내가 장한 아들의 아버지 아니겄소? 내가 참배 오신 분들한테 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엄마들은 울고불고해요…."

아버지는 지난 일요일인 14일부터 매일 아들의 묘를 찾고 있다. 그는 '2-34'라고 적힌 아들의 묘 옆을 돌아오는 일요일인 21일까지 매일 지키며 참배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하루 종일 묘역에 머무는 게 힘들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따, 어제도 거시기 저, 언론에서 사진 다 찍어가서 인터넷에 나왔다 안 허요. 우리 아들 이야기도 하고, 5.18 이야기도 한 것이 인터넷에 올라간단디 내가 여그 있어야제. 하루에 물 세 병, 카스테라 하나믄 충분합디다. 콜라도 좋고. 다리도 요로코롬 접었다 폈다 하믄 괜잖해요."

"원체 이전 정부가 악랄해서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 "

19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던 김향득씨는 오랫동안 당시 현장과 사적지를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19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던 김향득씨는 오랫동안 당시 현장과 사적지를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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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향득(55)씨도 5.18 당시 고등학생 신분의 시민군이었다. 대동고 3학년이었던 그는 문군이 숨을 거둔 1980년 5월 27일, 전일빌딩 뒤 광주 여자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다른 시민군 28명과 함께 체포됐다.

계엄군은 김씨의 등에 '극렬폭도'라는 네 글자를 적었고, 곧장 그를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2015년 5월 27일 땡볕 오후의 수은주가 30도를 넘어섰던 날, 김씨는 1980년 5월 27일을 떠올리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그날도 어찌나 덥던지…. 개버끔(입가에 생기는 하얀 거품을 일컫는 사투리) 물 정도로 (상무대 영창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온몸은 피범벅이 돼 있었다."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씨는 지난 16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다. 그날도 중절모를 쓴 문군의 아버지는 아들의 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김씨는 묘를 지키는 아버지와 이날 묘역을 찾은 '세월호3년상을치르는광주시민상주모임' 사람들을 사진에 담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문군의 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이곳을 이번 5.18 기념식 참석을 위해 찾을 예정이다. 이미 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지시했고,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의 사표도 수리했다. 특히 그는 후보 시절 1호 광주 공약으로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을 내놓기도 했다.

김씨는 자신이 "1989년부터 5.18을 헌법전문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껏 '빨갱이' 취급받던 그의 주장을 이젠 대통령도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30년 가까이 꾸준히 주장해온 것이, 그게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나온 것 아닙니까. 심장이 울렸습니다."

그러면서 김씨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지시하고, 박승춘 사표를 받아들였을 땐 정권에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임기 초반 문 대통령이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그럼에도 앞으로가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여전히 피해자의 가슴 속엔 37년 동안 축적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2년 9월 2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의 고 문재학군의 묘를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2년 9월 2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의 고 문재학군의 묘를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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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군의 아버지에게도 "대통령이 바뀐 뒤로, 요샌 좀 마음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도 등장하는 "새날"을 거론하며 "이제 좀 새날이 올란갑소, 나는 요새 그런 생각이 듭디여"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문군의 묘를 직접 찾아 문군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허이고, 요샌 아들한테 하고 자고픈 말이 참말로 많습디다. 그놈이 37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지마는, 시방 아즉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요. 우리 아들한테 '인자 눈 감아라' 할 수 있는 날이 오겄제라?"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 기대는 해보고 있는디, 원체 이전 정부가 악랄해서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하요. 긍께 나도 이라고 묘역에 나와 있는 것 아니요"라며 걱정 어린 말을 이어갔다.

"인자는 좀 제대로 적폐를 청산해야 하지 않겄소. 누구도 다시는 5.18 놓고 색깔론 좀 거론 안 하게 말이요. 바른 세상을 만들어야 쓸 것인디, 걍 가만히 가다보믄 또 언제 넘어질지 몰라요."


태그:#5.18,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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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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