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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날 쓰는 수많은 말 가운데에는 아주 오래된 말이 있고, 아직 얼마 안 된 말이 있어요. 이 가운데 '주부'나 '가정주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말이에요. 이런 말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지만, 이제 새로운 이름을 찾아볼 만하지 싶어요. 아무래도 이제 '주부'는 가시내만 하는 일이 아닌 '사내'도 함께 하는 일이거든요. 사내도 가시내도 즐겁게 쓸 새로운 말을 우리 나름대로 지어 어른들도 기쁘게 쓰고 아이들도 기쁘게 물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밥을 짓거나 살림을 하는 모든 일은 남녀가 함께 합니다. 어느 한쪽만 할 일은 아니에요. 이러한 사회 흐름을 돌아본다면, '주부'나 '가정주부'라는 이름도 새롭게 바꾸어야지 싶습니다.
 밥을 짓거나 살림을 하는 모든 일은 남녀가 함께 합니다. 어느 한쪽만 할 일은 아니에요. 이러한 사회 흐름을 돌아본다면, '주부'나 '가정주부'라는 이름도 새롭게 바꾸어야지 싶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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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기

집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비질이랑 걸레질을 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쉽게 보나요? 아직 꽤 많은 집에서는 집에서 하는 일을 으레 가시내한테만 맡기기 일쑤예요. 지난날에는 사내가 부엌에 얼씬조차 못 하게 하기도 했어요. 이러다 보니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놓고 낮잡는 말씨인 '부엌데기'나 '밥데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부엌일이나 밥일을 사내가 했어도 사내한테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래도 집일을 알뜰히 건사하는 사람을 두고 '살림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해요. 살림을 잘 꾸리기에 '살림꾼'인데요, 어른들이 어떤 일을 하느냐를 살피는 자리에서는 '주부·가정주부' 같은 한자말 이름을 흔히 써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집에서 살림이나 일을 도맡는다면 '주부' 아닌 '살림꾼'이라고 밝히면 한결 나을 텐데요.

더 헤아려 보면 '살림님'이나 '살림지기' 같은 이름을 새롭게 써 볼 만해요. 살림하는 이를 고이 여기기에 '살림님'이에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고마이 마주하기에 '살림지기'이지요. 오늘날에는 '부엌지기·밥지기'라든지 '빨래지기·비질지기·설거지지기' 같은 이름을 즐겁게 쓸 만해요. 심부름을 잘 하는 어린이라면 '심부름꾼·심부름지기·심부름님'이라 할 테고요. 말 한 마디를 바꾸어 생각도 삶도 바꾸어요.

향긋내

냄새를 큼큼 맡습니다. 어디에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내음을 크음크음 맡습니다. 어디에선가 고소한 내음이 퍼지는 듯합니다. 밥을 지을 적에 나는 밥냄새는 구수할까요? 된장국이나 숭늉을 끓이면, 쑥국이나 미역국을 끓이면 구수한 냄새일까요? 멸치를 볶는다든지 깨를 볶는다든지 마른새우를 볶을 적에는 어떤 내음일까요? 이때에는 고소한 내음일까요? '냄새·내음'은 뜻이 같은 낱말이에요.

두 낱말을 줄여서 '내'라고만 하기도 해요. '밥냄새·밥내음·밥내'처럼 쓰고, '꽃냄새·꽃내음·꽃내'처럼 써요. 코로 맡는 느낌이 마치 꽃에서 나는 기운 같아 좋다고 할 적에는 따로 '향긋하다'라고 하지요. 한국말로는 '향긋하다'이고, 이를 한자말로는 '향기롭다'라 해요. 생김새가 꽤 비슷하지만 말밑만 다르고 뜻은 같은 '향긋하다·향기롭다'예요. 맡기에 좋은 느낌을 따로 '향기'라는 낱말로 가리키듯이 '향긋 + 내' 얼거리로 '향긋내(향긋냄새·향긋내음)'라는 새말을 지을 수 있어요. 냄새가 고우면 '고운내·고운내음'이라 할 수 있고, 냄새가 좋으면 '좋은내·좋은내음'처럼 즐겁게 쓸 수 있어요.

첫손가락

우리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하거나 뛰어나거나 잘할 적에 손가락 하나를 꼽곤 합니다. 이때에는 셋째도 넷째도 아닌 엄지를 꼽아요. "엄지 척"이라는 재미난 말을 쓰기도 합니다. 엄지란 '첫손가락'이에요. 첫째 손가락이라서 수수하게 '첫손가락'이며, '첫손'으로 꼽을 만큼 여럿 가운데 가장 훌륭하거나 뛰어나거나 잘할 적에 이 말을 써요. 가장 뛰어난 하나를 가리킬 적에 '으뜸'이라고도 해요. 그러니 '으뜸손가락'이라고 해 볼 수 있어요. 그러면 첫손가락이나 으뜸손가락 다음은 뭘까요? '버금손가락'이 되지요. 으뜸손가락·버금손가락은 '으뜸손·버금손'처럼 줄여서 써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으뜸도 버금도 아닌 마지막을 차지한다면 '막손가락'이나 '막내손가락'이라고 해 볼 만해요. 이 말은 줄여서 '막내손'이라 할 수 있을 테고요. 막손가락은 '끝손가락'이나 '끝손'이 될 수 있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손가락질'인데 사람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손가락에 '-질'이 붙으면 어느 곳을 가리키는 말인데, '손 + 질'로 쓰면 손을 대어 가꾸는 일을 가리켜요. 손을 놀려서 생각을 나타낸다면 '손짓'이요, 손가락을 놀려서 생각을 나타내면 '손가락짓'입니다.

가랑꽃

마른 잎을 놓고 '가랑잎'이나 '갈잎'이라고 해요. 가랑잎이나 갈잎은 아직 나무에 매달릴 수 있고, 바싹 말랐기에 잔바람에도 나뭇가지에서 톡 떨어질 수 있어요. 나무에서 떨어진 잎이라면 '진잎'이에요. 진(떨어진) 잎이니 말 그대로 진잎이지요. 나무나 풀줄기에서 진(떨어진) 꽃이라면 '진꽃'이에요. '진잎'은 한자말로 '낙엽'이라고 해요.

나무에서 진 잎이기에 '진잎'이요,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낙(지다·떨어지다) + 엽(잎)' 얼거리로 '낙엽'이라 지어서 쓰는 셈이에요. 어른들은 '낙엽'처럼 '낙화'라는 한자말도 쓰는데, '진잎·진꽃'처럼 쓰면 되고, '가랑잎·갈잎'이라는 낱말을 헤아리면서 '가랑꽃·갈꽃' 같은 새 이름을 지을 만해요. 가랑잎이 지고, 가랑꽃이 지지요. 진잎하고 진꽃이 말라서 가랑잎하고 가랑꽃이 되어요. 싱그러운 꽃잎이 고와서 일부러 꽃잎을 딴 뒤에 잘 말린다고 한다면 이때에는 '말린꽃'이나 '마른꽃'이에요.

작달소나기

갑자기 비가 내릴 적이 있어요. 날씨를 알려주는 어른들은 요즘 이런 비를 놓고 '게릴라성 호우'나 '집중호우'라고 하는데, 이런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쉬 알 만할까요? 지난날에는 갑자기 내리는 비는 '갑작비'라고 했어요. 말 그대로예요. 마치 하늘에서 장대가 쏟아지는구나 싶도록 내리는 비는 '장대비'라 했고, 이를 '작달비'라고도 했어요. 갑자기 쏟아졌다가 뚝 그치면? 이때에는 '소나기·소낙비'라 하지요. 비가 많이 내리면 '큰비'라 하고요, 가볍게 내려서 옷을 살짝 적실 만하기에 '가랑비·이슬비·실비·안개비'랍니다.

꼭 안개 같은데 안개보다 살짝 굵은 비는 '는개'라 하고요. 굵기로 치자면 '가랑비>이슬비·실비>는개>안개비'예요. 조용히 드문드문 내리는 '보슬비'도 있어요. 지난날에는 누구나 흙을 만지면서 살림을 지었기에 빗물을 찬찬히 살폈고, 비하고 얽힌 이름이 참 많아요. 그러니 우리는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지다가 멎고, 또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다가 그치는 비를 두고 '작달소나기'나 '장대소나기' 같은 새 이름을 지어 볼 수 있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태그:#우리말 살려쓰기, #우리말, #한국말, #말넋,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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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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