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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몸담았던 부서의 차장님이 회식자리에서 여직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전에 내가 몸담았던 부서의 차장님이 회식자리에서 여직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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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몸담았던 부서의 차장님이 회식자리에서 여직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회사 연봉 쥐꼬리만 하지? 이사님 눈치 보이지? 지금부터 10년 후에 받을 연봉까지 계산 가능하지? 나 지금 다른 회사 가면 같은 업무에서 최소 연봉 천만 원은 더 받아. 밑에 직원도 둘 수 있고. 그런데 왜 여기 다니는지 알아?"

다들 모르겠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말을 뱉어낼 준비를 했다. 며칠 전 출산 휴가를 끝내고 막 업무로 복귀한 과장님이 대표로 "글쎄요" 하며 웃었다.

"내가 나가도 내 뒤로 쫙 줄 서 있어. 회사가 우리를 잡을 것 같아? 너네도 마찬가지야."

다들 경청하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며 판에 박힌 듯 똑같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소주 두 잔에 취할 직장 경력이 아니니 차장님은 반 협박, 반 현실은 담아 농담을 던져진 것이었다.

내가 관둬도 내 자리를 금세 채워 줄, 줄 선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 말은 현실이다. 다들 '보기 드물게 맞는 말을 한다'면서도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사는 사람 귀한 줄 모른다. 누가 와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처럼 사람을 서운하게 만들기 일쑤다.

3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룹 차원에서 T/O(일자리)가 동결돼서 사람을 새로 뽑을 수 없었다. 업무량은 매년 늘어나는데 빈자리가 없다며 사람을 뽑지 않았다. 그 시기에 하필 부서가 합쳐지면서 새로운 일들이 밀려왔다.

매일 야근을 해야 했던 내가 일을 관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오후 11시가 다 돼서 퇴근하면 뒷날 같은 파트 선배들이 몰려와서 '너 어제 야근했냐? 네가 매일 야근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고 성화였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무능한 사람이 되어 일했다. 나는 영업관리부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지원 업무를 하는 등 타부서 사람들의 눈총을 더해 받으며 넉 달을 더 보냈다. 그리고 참다못해 이사님께 퇴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사님은 새로운 인력을 뽑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표 처리를 두 번 미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잡는다며 다른 부서로의 이동을 권유했을 때, 나는 정말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일할 마음을 먹었다.

대신 부서 이동이 이뤄져도 일할 사람이 없어서 이전 부서의 업무를 일부 가져와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보니 내가 눈치 봐야 할 상사들이 두 부서의 인원수만큼 늘어나 있었다. 나는 양쪽 부서 사이의 경계에 놓여 방치되었다. 현재 부서와 이전 부서 이사님들께 계속 말씀드려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같이 일하는 거란 답변을 들었을 뿐 변하는 것이 없었다.

기본 업무 외에 누가 할 것인지 애매한 업무를 흔히들 '그레이존(GrayZone)'이라고 한다. 나는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레이존' 된 기분으로 삼 년을 일했다. 회색인간이 된 나는 휴가를 갈 때 8명에게 업무 대체를 부탁해야 한다. 부서 워크숍을 갈 때도 대체 인력이 없어 노트북을 끼고 가서 일한다.

3년을 그렇게 일해도 상황은 여전하다. 내 업무와 휴가, 앞날까지 모두 잿빛으로 변한 기분이다. 잘 버티는 날와 만사가 다 싫고 나 자신마저 싫어지는 날을 오간다.

부서를 옮긴 후 한참이 지나 우연히 이전 부서의 담당자 업무 분류표를 보고나서야 그때 내 업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았음을 알았다. 그들이 마감하는 거래처가 평균 5곳일 때, 나는그 세 배를 마감했던 것이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고, 이전 부서 이사님은 그 사실을 모른다. 일 못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때를 지나 지금은 일없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양쪽 일을 절반씩 하는데 각각의 부서에서는 내가 하는 절반의 업무만 보고 나머지 절반은 내 일로 쳐주지 않는다. 퇴사를 해야 그레이존을 벗어날 텐데.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만 내 퇴직서를 잡아준다.


태그:#그레이존, #애매한업무, #GRAYZONF, #회사이야기,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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