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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렇게 입고 인도네시아 간다고요?"
"네."
"짐은?"
"없어요. 이게 다예요."

며칠 전부터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간 하담이 출국 채비를 마쳤다고 했을 때 긴가민가했다. 마치 뒷동산에 간단하게 등산이라도 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아웃도어 복장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배낭 하나를 등에 진 게 전부였다. 출국 전날 퇴직금 문제로 노동청에 갔을 때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총 15년이요, 최종 입국부터라고 해도 5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으면 이민가방은 아니더라도 화물로 보낼 여행용 가방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 고작 며칠짜리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짐이 한 보따리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하담은 뇌동맥류 수술 이후 복용하고 있는 한 달 보름 정도의 약과 여권을 넣은 작은 배낭이 전부였다.

여행 가기 전 짐을 쌀 때만큼 설레는 날도 없다. 그런데 하담에게 그런 기분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인 모양이다. 그가 짐이 없는 이유는 이랬다. 먼저 한국에서 입었던 두터운 옷들이나 작업복들을 굳이 갖고 갈 필요도 안 느끼고, 신발도 신고 있는 것 말고는 필요 없다고 했다. 또한, 선물은 본국에서 사거나 공항에서 준비하면 되기 때문에 짐이 많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동생이 귀국할 때 어머니와 아내 선물을 미리 사서 보냈어요. 아들이 아홉 살인데, 선물은 인도네시아에서 사 주는 게 서로 편해요. 형제들 선물은 공항에서 살 거예요. 담배를 얼마만큼 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덟 중에 일곱이 남자라 담배 선물이 최고예요."

인천공항 한국문화박물관에서 귀국을 앞둔 하담
▲ 인천공항 한국문화박물관에서 귀국을 앞둔 하담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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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쌩쌩 달리는 차량들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하담은 조금만 길이 밀리는 기미만 보여도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출국 수속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말해도 행여나 비행기를 놓치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며 싱긋 웃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출국 예정 시간까지 네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급한 사람이 어떻게 귀국일자가 잡히기까지 참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는 쌍둥이 동생이 귀국했던 1월에 같이 귀국했어야 했다. 하지만 눈이 침침해지는 증상과 뇌동맥 손상으로 잠을 못 자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눈과 뇌동맥류 수술을 받는 동안 3년 반을 일했던 회사에 퇴직금을 요구했다. 사장은 "외국인이 무슨 퇴직금이야. 와서 일하든가, 그냥 집에 가!"라고 깐죽대며 지급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하담은 어쩔 수 없이 입원해 있는 동안 노동부에 진정했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하담은 가슴이 철렁했다. 결국 어찌될지 모르는 퇴직금을 뒤로 하고 귀국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빨리 처리되기를 기대했던 진정 사건은 보통 2주 안에 출석 요구가 나오는 것과 달리 3주 만에 나왔다. 근로감독관이 출석 통보를 늦게 한 탓이었다. 게다가 첫 출석에 사장이 나타나지 않아 또 한 주를 기다려야 했다. 다른 사건 같으면 보름 전에 끝날 사건이었다. 하담은 출국일을 하루 앞두고 퇴직금을 받았다. 원래 받아야 할 금액의 절반을 약간 넘는 금액이었다. 그 돈으로 병원비를 빌려준 사촌 동생 부부와 친구들에게 갚았다.

공항에 도착한 하담은 출입국에 여권과 당일 항공권을 들고 자진출국 신고를 하러 갔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많은 외국인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출입국에서는 '체류행적 조사'라 해서 지난 5년 동안 일했던 회사 이름과 연락처, 근무 기간 등을 적으라고 요구했다.

하담은 난감했다. 비록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고향 친구들이 일하는 곳이라 적어 내면 사장 말고도 친구들이 곤란을 겪을 건 뻔한 일이었다. 하담은 눈치를 보다가 입국 후 처음 배정 받았던 회사와 수술 받았던 병원들, 퇴원 후에 잠시 머물렀던 이주노동자쉼터 주소를 적어냈다. 출국 심사를 담당하는 직원은 뭔가를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대답을 않자 다음 사람을 불렀다.

하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출국시키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체류행적을 빈칸으로 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큰 탈 없이 출국 허가를 받았다. 출국 신고를 마친 하담은 귀국비용보험을 찾으려고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먹통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비행기 환불 비용보다 더 큰 문제, 그것은 인륜의 문제였다

귀국비용보험은 이주노동자들이 체류기간이 만료되어 귀국할 때 필요한 비용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입국 후 3개월 이내에 가입해야 하는 보험이다. 가입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국내 입국 후 취업교육 중에 개설한 통장으로 자동 이체하여 가입하도록 하고 있다. 하담은 첫 달 월급에서 40만원을 지급했기 때문에 공항에 가기 전에 지급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귀국비용보험을 납부한 후부터 5년 동안 통장을 사용하지 않아 발생했다. 휴면계좌가 돼 버린 것이었다. 하담은 귀국비용보험 지급 신청 후에 KEB하나은행 용인지점에 들러 휴면계좌를 되살려 줄 것을 요청했었다. 은행에서는 신분을 확인하고는 통장번호를 프린트해 주면서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고 알려줬다.

KEB하나은행 인천공항지점 은행 업무 외에 이주노동자 출국만기보험, 귀국비용보험 등의 업무를 한다.
▲ KEB하나은행 인천공항지점 은행 업무 외에 이주노동자 출국만기보험, 귀국비용보험 등의 업무를 한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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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카드로 출금하려다 실패한 하담은 공항 지하 1층에 있는 공항지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가 9시 정각이었다. 탑승 시간까지 55분이 남아 있었다. 담당 직원은 카드 유효 기간이 지나서 사용 불가하다고 했다. 용인지점에서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던 카드였다. 인쇄된 통장번호를 제시하며 출금을 요구하자, 이번에는 통장 개설 당시의 신분증이 없어서 신분 확인이 불가하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현재 갖고 있는 여권은 쓸모가 없었다.

하담은 통장 개설할 때 사용했던 여권을 여권 재발급할 때 대사관에 반납했기 때문에 40만원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핸드폰에 통장 개설할 때 썼던 여권 사진이 저장돼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담당 직원은 사진은 신분증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지급을 거절했다.

탑승 시간이 가까울수록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담은 형제들을 위해 담배를 살 돈이 필요했다. 어찌어찌 지점장이 와서 문제를 해결했을 때 탑승시간은 불과 10분도 남지 않고 있었다. 하담은 뛰었다. 하지만 놓치고 말았다. 많은 출국 인파 속에 줄을 서 있는 동안 탑승 시간을 놓친 하담은 저녁 5시 넘어서야 다른 비행기로 출국할 수 있었다. 환불 수수료로 10만원을 날려야 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예약한 비행기를 놓친 하담은 동생에게 조금 늦는다고 연락했다. 동생은 어머니가 위급하시다면서 어떻게든 빨리 오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동생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가 짐도 없이 공항에 간 진짜 이유는 집에 갈 때 짐 찾고 뭐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곁으로 어떻게든 빨리 달려가고 싶은 생각에 그랬던 거였다. 하담은 미안한 마음에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공항 4층에 있는 한국문화박물관에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면서 식사도 하고, 한국문화박물관 정자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탑승하기 바로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돌아가셨어……." 

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담은 3년 전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었다. 그래서 더욱 어머니 임종만은 함께 하고 싶었다. 쌍둥이 동생은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다른 형제들도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반면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하담은 부모 일손을 돕는 걸 좋아했다. 그런 하담을 아버지는 탐탁지 않게 여기셨지만, 어머니는 듬직해 하셨다. 하담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담은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보는 눈이 있어서가 아니라 염치가 없어서였다. 그깟 퇴직금이 뭐고, 귀국비용 40만 원이 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노동부나 사장, 은행에 대한 원망보다 치료 끝나자마자 귀국했어야 했다는 자책이 앞섰다. 다른 자식들보다 애틋하게 대해주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돌아갔어야 했다. 지난 15년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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