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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 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늘 많이 사두는 게 문제였다. 아침식사 대용으로 좋다는 선식을 '2+1 이벤트'로 구입해온 날, 냉장고에 선식 넣을 공간이 없었다. 오랜만에 냉장고 정리를 시도했다.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커다란 김치통을 빼내자 서서히 썩어가는 피자 조각과 양념불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비싸게 주고 구입한 크림새우 피자와 소불고기였다.

아래칸으로 내려가니 3년 전 지역 축제장에서 산 유기농 된장이 푹 삭아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 사지를 말지 몸에 좋다고 하면, 맛있다고 하면 습관적으로 지갑을 열어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툭하면 돈에 날개가 달린 것 같다고 투덜거리는 처지였지만 항상 버릴 것들은 넘쳐났다.

짜릿하게 카드 긁는 순간이 지나면 곧 허무함이 덮쳤다. 도깨비에 홀린 듯 소비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오, 멋진데!'는 충동적 쇼핑의 공허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그림책이다. 물론 10살 먹은 3학년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야기의 배경인 시장 한 구석에는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상인이 앉아있다. 상인이 지루한 표정으로 "자, 사세요! 외투, 대접, 단추, 소시지, 화병 (...) 트럼펫, 수영복이 있어요..."를 외쳐보지만 비둘기가 땅바닥을 쪼아대고, 개가 소시지를 훔쳐 달아날 뿐 손님은 없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물건에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남들이 사는 거라면 기를 쓰고 따라 사는 사람들
 남들이 사는 거라면 기를 쓰고 따라 사는 사람들
ⓒ 이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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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없는 외침에 목이 아팠던지 상인은 전략을 바꾼다. "자, 사세요! 구두잔, 가방모자, 양탄자우산..." 그 말에 길 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새로운 물건에 열광한다. 손에 치켜든 에메랄드색 구두잔을 보고 시우가 목을 움츠리며 역겨움을 감추지 않았다. 

"우웩! 더러워 구두에 물을 따라먹는다고? 바보네."

시후 눈에 비친 바보들은 여태껏 그런 물건은 없었다며 "오, 멋진데!"를 연발한다. 재고 땡처리를 해도 안 팔릴 물건들이 완판 상품으로 탈바꿈한다. 상인의 혀 놀림에 현혹된 사람들은 새로운 패션에 흥분하며 고무호스를 목에 감고, 구두에 물을 받아 마신다. 소녀들은 엄청 고가로 샀을 소시지 묶음으로 줄넘기를 하고, 멋진 코트를 걸친 아주머니는 붉은 냄비를 머리에 쓰고 다니지만 아무도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진을 조롱하는 꼬마처럼 아이들은 허영심 가득한 어른들을 비웃는다.

"저 아줌마, 아까 수학 시간에 쓴 자를 목에 걸고 있어요. 베일 수도 있는데."

수민이는 사슴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한 패션의 아줌마를 걱정했다. 아무리 우아한 척 시선을 내리깔고, 고상한 척 손짓을 해보아도 생활용품을 온몸에 뒤집어쓴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불편함은 멋과 세련됨을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하는 몫처럼 애써 무시된다.
 불편함은 멋과 세련됨을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하는 몫처럼 애써 무시된다.
ⓒ 이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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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잡동사니 상인 맞은편에 물건을 늘어놓고 외친다.

"자, 사세요! 식사를 할 수 있는 식탁이 있어요. 요리용 냄비가 있어요. (...) 자르는 데 쓰는 가위가 있어요. 목욕할 수 있는 욕조도 있어요." 

그 말에 길 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우뚝 멈추며 돌아본다.

"오, 멋진데! 비를 막아 주는 우산? 바닥을 쓰는 빗자루? 여태껏 그런 건 없었잖아." 

손님들은 새로운 물건에 흥분하여 남자에게 우르르 몰려간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소름이 돋았다. 열광하는 손님들을 보며 미소 짓는 남자. 사람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너무나도 쉽게 거두어 가는 그 남자가 분명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잠을 줄여가며 번 돈이 어떤 유행이 지나갈 때마다 사라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환이는 옛날에 산 메탈 블레이드랑 터닝메카드가 다 쓰레기통으로 갔다고 했다. 현자처럼 껄껄 웃는 지환이에게 이번 어린이날에 뭘 갖고 싶냐고 물으니 새로 나온 터닝메카드라고 답했다. 나는 결혼기념일에 불빛이 들어오는 기계식 키보드가 갖고 싶었다. 집에 멀쩡한 키보드 3대가 있는 어리석은 선생은 지환이를 나무랄 수 없었다.

우리는 얼마나 '오, 멋진데!"를 외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화려한 광고와 솔깃한 제안에 흔들리지 않고 '내 것도 충분히 멋진데!'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자본주의 세상이다.



오, 멋진데!

마리 도를레앙 지음, 이정주 옮김, 강수돌 해설, 이마주(2017)


태그:#오 멋진데, #마리 도를레앙, #이마주, #유행,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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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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