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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3월 입대해 베트남에  다녀온 천병희(69)씨. 그는 자신의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고 있다.
 70년 3월 입대해 베트남에 다녀온 천병희(69)씨. 그는 자신의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고 있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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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한테 참 기대를 많이 했지. 근데 더 야박하더라고."


지난달 15일 만난 천병희(69)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창때인 이십대 초반, 갑작스레 월남에 차출됐다. 맹호부대에 복무하던 그는 그렇게 베트남에 갔다. 1970년 3월 입대해 그해 12월 차출돼 베트남에 발을 디뎠다.

"그때 참 추웠는데 부산항에서 월남 다남항인가로 갔다가 퀴논으로 들어갔어요."

수송부 공구계로 배치받은 그는 장비 담당을 맡았다. 그 당시 공구계 장비들은 전혀 정리가 돼있지 않았다. 그저 정리 안 된 산처럼 마구 쌓여있었다. 그는 시간을 들여 군수 장비들을 철제앵글을 만들어 구분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제품명과 재고수량 등을 기재했다. 미군 장교가 와서 넘버원이라며 치켜세울 정도로 그는 정성을 다했다.

장비계라고 해서 부대에서 대기만 하는 업무는 아니었다. 수시로 해당 지역을 순찰 및 정찰 감시하는 임무도 수행해야 했다. 그 와중에 동료의 죽음도 목격했다.

"(근방)정찰 나갔다가 동료가 죽었지. 내가 직접 끌고 왔어."

그는 자신이 부대 내에서 성실히 복무했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남들 대충대충 하던 일을 앵글까지 짜가며 일일이 분류했다. 수량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보람 있었다.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천병희(69)씨. 그의 부대 복무 모습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천병희(69)씨. 그의 부대 복무 모습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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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드럼통에 해골이랑 X 표시가 돼 있더라고. 그걸 잡초제거에 쓰라고 했어."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러운 사역 작업에 불려 나갔다. 평소처럼 열심히 그것을 나르고 뿌렸다. 그게 바로 평생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고엽제인 줄도 모르고. 선임 중사가 해골이 그려진 드럼통 뚜껑을 열고 수동펌프로 액체를 퍼 올리면 대기해 담아서 날랐다.

그와 사역 나온 동료 병사들은 그 이름 모를 액체를 철모에 가득 담았다. 사역 나온 병사들과 베트남의 푸른 하늘 아래서 잡초에 뿌렸다. 클레이모아, 네이팜탄, 부비트랩을 피해 가면서 그 액체를 하루 종일 손으로 뿌렸다. 그저 그날은 운수 좋게 쉬운 일과를 보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부대로 베트콩(VC), 그중에서도 특수부대 셰이퍼가 넘어오는 것 막기 위해서 뿌리고 또 뿌렸다.

자식들의 질병과 연이은 유산, 고엽제 피해 의심

그는 파병을 마치고 3년 만기 제대를 한 뒤 구로공단에 바로 취업을 했다. 취업 후 1년 뒤 아무 이유도 없이 몸이 마르기 시작했다. 몸무게가 45kg까지 줄어들었다. 몸에 힘이 없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자진 퇴사를 권하는 회사. 그때부터 다시 이를 악물고 치료ㄹ,ㄹ 받기 위해 병원과 한약방을 전전했다. 회사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다 보니 결혼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행복함은 잠시.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인이 심한 하혈 후 첫아이를 유산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첫 딸. 그 당시 그는 난곡에 살았다. 돌이 되기 전 아기는 눈이 풀리고 축 늘어져 있었다. 병원에선 3일치 약을 준 뒤 먹고 오라고 했다. 불안했던 그는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를 본 의사는 "약 다 먹고 오라"며 화를 냈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던 그는 다른 병원을 찾았다.

"가리봉에 갔더니 성 프란시스코라는 병원이 있어요. 그 병원에 갔더니 폐렴이라는 거예요. (근데)폐렴이 너무 늦었다는 거예요. 살지 죽을지 모른다는 거예요. 열이 40도가 넘으니. 근데 거기는 입원실이 없어요. (너무도)고맙게도 한 여의사분이 자기가 퇴근을 안 할 테니 자기가 주는 약을 먹여보고 안 되면 밤 12시에라도 오라는 거예요."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천병희(69)씨. 그의 부대 복무 모습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천병희(69)씨. 그의 부대 복무 모습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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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약은 효과가 있었다. 약을 먹고 그제야 '카륵 카륵'하던 아기의 숨이 돌아왔다. 그는 이튿날 일찍 바로 병원으로 갔다. 여의사는 "한고비 넘겼다"며 "어떻게 (부모가)그렇게 모르느냐"고 질책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처음 간 병원)의사도 감기라고 했는데..." 그는 그 당시를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우리 아들이 6살 때 보훈병원에서 소아마비라고 하더라고요. 치료해도 안 되는 거지. 근데 영동세브란스를 갔더니 무혈성 괴사라고 해요. 소아마비랑 완전 다른 거지. 뼈가 썩어들어가는. 이 뼈를 10년에 한 번씩 갈아아 하는 거예요."

그는 잠시 목이 멨다.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집안 곳곳엔 그의 아들, 딸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는 말 한 마디 하고 사진을 잠시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그는 여느 부모들처럼 아이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얘가 생긴 건 부잣집 애들처럼 예쁘게 잘생겼어요. 친구들도 많았죠"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잘사는 줄 알았는데 그 당시 그의 가족들은 지하 셋방에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바르게 자라주었다. 용돈이 없으면 스스로 결혼식장에 가서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손수레에 고물을 실어서 용돈을 마련해 썼다.

"얘가 25살에 결혼했어요. 근데 (우리처럼) 똑같이 유산을 하더라고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선생하고 결혼을 했는데 애를 못 낳으니 대가 끊긴다고 여러 문제를 겪었어요. (그렇게)이혼을 하게 된 거예요. 4년 살고 이혼한 거죠."

학교 선생님을 하던 자랑스러운 첫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딸. 그 당시에는 그저 팔자려니 하고 아픔을 숨겼다. 그러던 중 아들도 결혼을 하게 됐다. 2014년에 결혼한 아들도 똑같이 유산했다. 아들은 '무혈성 괴사'라는 병 때문에 군대도 못 갔다. 아버지인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집안 왕래를 다 끊어버렸어요. 사람들만 모이면 그런 얘기를 하니까"라며 "난 너희들만 잘살면 된다"라고 자식들을 위로했다. 딸에 이어 아들도 유산을 하며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그는 점점 고엽제가 원인이 아닐까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우리 집안에 그런 내력이 없어요. 암이나 뭐 그런. 장수 집안이에요. 처갓집도 그래요. 8남매 중에 셋째 딸이에요. 난 7남매 중에 셋째고. 근데 다른 자식들 남녀 할 것 없이 다 멀쩡해요. 왜 월남 갔다 와서 그것(고엽제) 뿌린 나만 그래요."

그는 갖가지 특이한 증상으로 몸이 아프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자식 몸 아픈 걸 보는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아픈 게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대해 분노만 가득해",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전쟁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천병희(69)씨. 그가 김대중 정부 때 받은 참전용사증서
 고엽제 피해를 주장하는 천병희(69)씨. 그가 김대중 정부 때 받은 참전용사증서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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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지듯 아파요. 눈이 쑤셔요.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아파요. 근데 이게 일반 병 같으면 돈 들여가며 하면 나아야 하잖아요. 두더지 게임처럼 여기가 나으면 저기가 아프고. 내가 지금까지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밥맛도 없으니 먹지도 못하고 고기도 못 먹어요. 일 년에 총 한 근이나 먹어봤나 그래요. 소화를 못 시켜서. 근데 내가 병원 가면 고지혈증이 나와요. 그때 45kg 정도 나갔어요. 지금에서야 52kg 정도 나가요. 내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언제부터 싫어했느냐하면 이게 고엽제라는 걸 알고 난 뒤에도 계속 탈락되고... 사람 무시하고...  당신은 고엽제가 아니라는 거야."


그는 관계기관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며 "내가 대한민국을 부수고 싶었어, 물건 같으면 벌써 부숴버렸어"라며 자신을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또한, 아들이 무혈성 괴사증을 앓고 있음에도 자신이 무혈성 괴사증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지금까지 그는 고엽제 판정을 두 번 받았는데, 모두 등외 판정을 받았다. 국가나 국제협약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유였다. 그는 현재 그 당시 자신과 같이 고엽제(제초제) 작업을 했던 선배들을 찾고 있다. 그는 1970년 12월 말 맹호사령부 5003부대 628포대 본부중대로 배속되어 비행대 파견 후 수송부로 복귀해 복무했다.

'고엽제후유의증 등 환자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고엽제법)은 역학조사를 거쳐 인과관계가 인정된 18가지 증상만을 후유증으로 인정하고, 후유증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후유증이 의심되는 20가지 증상만을 후유의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자녀에게도 3가지 증상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는 부모가 반드시 후유증으로 인정받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천병희씨는 현재 고지혈증만을 후유의증으로 인정받아 치료를 받고 있다. 허나 아들의 '무혈성 괴사증'에 대해서는 자신의 후유증이 인정받지 못해 자녀들의 후유증도 인정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추가 재검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베트남전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정리되지 않은 사고들로 결핍된 한 사람의 인생은 거칠게 진행 중이다. 노병과 헤어지는 순간 그는 다시 길을 나섰다. 깊은 한숨 끊어 쉬며 주변을 살폈다.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구분이 가지 않는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대한민국의 명을 받고 전쟁터까지 다녀온 그에게 국가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안보와 국방력 강화를 외치는 국가는 과연 수많은 참전용사들에게 그만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적절한 예우 없이 무턱대고 안보만 외치는 것이 과연 국가의 책무인 것인가?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그의 젖은 눈이 계속 떠올랐다. 자식을 생각하며 고통에 젖은 한 남자의 눈. 그 노병의 눈은 자신의 고통이 아닌 자식들의 고통으로 인해 내내 벌겋게 젖어있었다.

덧붙이는 글 | 경기미디어리포트에도 송고됩니다.



태그:#고엽제, #베트남전, #경기광주, #참전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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