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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가란 축구 관련 물품을 판매하는 오피셜 숍을 가리킨다. 바르셀로나에 몇 곳이 성업 중이다. 상하의 유니폼 가격이 18만 원 정도로 가격이 만만치 않다.
▲ FC 바르셀로나 보티가 입구 보티가란 축구 관련 물품을 판매하는 오피셜 숍을 가리킨다. 바르셀로나에 몇 곳이 성업 중이다. 상하의 유니폼 가격이 18만 원 정도로 가격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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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선 축구가 종교라는 말이 있다. 어느 식당, 어느 카페를 가나 홀의 한 가운데는 대형 TV 모니터가 자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종편 뉴스가 돌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스페인에서는 오로지 축구 생중계와 리뷰 채널이 고정되어 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직접 경기장을 찾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식당과 카페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갖춰 입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는 풍경은 이방인에겐 그 자체로 볼거리였다. 축구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어 들어온 사람이라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스페인에서 지낸 한 달 동안 숱하게 식당과 카페를 들락거렸지만, 축구 아닌 프로그램을 틀어놓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TV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축구와 관련된 채널이 정말 많다. 지역을 연고로 한 팀마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방송까지 있을 정도다. 세계적인 명문 축구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방송은 공중파 못지않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긴 스포츠가 문화와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스페인에서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순식간에 허물 없는 친구가 되고, 축구 규칙과 포메이션, 선수들의 면면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으면,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응원하는 축구팀이 우승했을 때라고 답하는 곳. 축구 하나면 백발의 어르신이 손주 뻘인 아이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토론을 벌이는 곳이 바로 스페인이다.

9만 9천 명 수용, 유럽 최대 축구장 캄프 누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워낙 규모가 커서 카메라에 담기가 어렵다.
▲ 캄프 누 입구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워낙 규모가 커서 카메라에 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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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캄프 누를 찾았다. 캄프 누는 9만 9천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유럽 최대의 축구 경기장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성지'로 통한다. 해마다 해외의 '신도' 수백 만 명이 성지 순례에 나서는, 바르셀로나의 랜드 마크다. 그도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현재 수천 억 원의 예산을 들여 증축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여느 경기장과는 달리 캄프 누는 바로 연결된 지하철역이 없다. 가장 가까운 역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나 택시를 타야할 만큼 먼 거리도 아닌데다, 대로변에 우뚝 서 있어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지만, 접근하기가 번거로운 건 사실이다. 더욱이 수만 명이 한꺼번에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곧게 뻗은 도로가 자칫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FC 바르셀로나와 원정팀인 라스팔마스의 경기가 있는 날이다. 오후 4시 반 경기인데도 2시 경부터 주변 도로가 붐비기 시작했다. 만약 입장권을 미리 구입하지 않았다면 점심식사도 못하고 부랴부랴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야 했을 성 싶다. 경기장 입구엔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응원도구를 파는 상인들과 진행요원, 경찰 등과 마구 뒤엉켜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생소한 이름의 중하위권 팀과의 경기도 이럴진대, 앙숙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이른바 '엘 클라시코'가 있는 날이면 어떨지 상상이 간다. 대부분은 FC 바르셀로나 팬이지만, 상대 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아예 수십 명이 함께 모여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지르는 원정 응원단도 보인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경기장 밖은 이미 응원전이 한창이다.

입장권을 쥐고 두리번거리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 모습이 흡사 벽을 타고 오르는 개미떼처럼 보인다. 부러 맨 위층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잔디 덮인 운동장이 손바닥만큼 작다. 선수들의 얼굴은커녕 등에 적힌 번호조차 식별할 수 없다. 팀 구분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이곳에서 제대로 경기를 만끽하려면 큼지막한 전광판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일방적인 응원에 힘입어 FC바르셀로나가 5:0으로 승리하였다.
▲ FC바르셀로나와 라스팔마스 경기 일방적인 응원에 힘입어 FC바르셀로나가 5:0으로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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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선지 사람들마다 다양한 '도구'가 손에 들려있다. 유니폼을 갖춰 입는 것은 기본이고, 응원할 때 흔드는 팀의 로고가 찍힌 머플러 또한 필수 아이템이다. 여기에 생중계를 시청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헤드셋, 하다못해 낡은 청취용 라디오와 메모장 하나쯤은 다들 지니고 있다. 가만히 보니 나처럼 빈 손 차림인 경우가 되레 드물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모자와 머플러, 선글라스 등을 꺼내 착용하기 시작했다. 예배나 미사 전에 손을 씻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듯 경기 시작 전 행하는 경건한 의식 같았다. 그 분 나름의 관람 준비였던 셈인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른이고 아이고 모자에서 신발까지 그렇게 '깔맞춤'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모자에서 머플러, 신발까지 '깔맞춤'한 그는 헤드셋을 통해 생중계를 들으며 경기를 관람했다.
▲ FC바르셀로나의 열혈 팬이라는 할아버지 모자에서 머플러, 신발까지 '깔맞춤'한 그는 헤드셋을 통해 생중계를 들으며 경기를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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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헤드셋을 착용한 채 화면과 경기장을 번갈아 보며 경기를 관전했다. 경기 내내 중계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첩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축구 클럽의 관계자로 여겨질 정도로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여쭤 안 사실이지만, 여태껏 축구화를 신어본 적은 없어도 FC 바르셀로나 경기를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관광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FC 바르셀로나를 후원하고 있는 회원일 거라면서, 사람들마다 선수들의 국적과 승패를 떠나 시민 구단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과 승리는 선수들이 후원하는 시민들에게 건네는 보답이라고도 했다. 마치 팀과 시민들을 '공동운명체'처럼 여기고 있는 듯했다. 

오직 스페인 축구 '직관', 2년 동안 알바를 하며 돈을 모으다

계단을 내려가 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 경기 직후 지하철역으로 가는 인파 계단을 내려가 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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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오프 직전 두 명의 앳된 한국 청년이 두리번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자리를 못 찾겠다는 것이다. 캄프 누의 경우, 좌석이 홀수와 짝수가 따로 배치되어 있어 번호에 따라 출입구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1번 출입구에선 2번 출입구 방향으로 1, 3, 5 순으로 번호가 부여되어 있고, 2번 출입구에선 1번 출입구 쪽으로 2, 4, 6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 식이다.

아무튼 그들의 얼굴에선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눈앞에서 메시의 플레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린다고 했다. 그들은 오직 스페인 축구를 '직관'할 목적으로 2년 동안 알바를 하며 어렵사리 돈을 모았다고 한다. 빅 매치라면 새벽에도 기꺼이 일어나 시청할 만큼 축구광이라는 그들은 이구동성 "축구 보는 게 생애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주변에선 계모임도 한단다. 매월 얼마씩 적립한 후 목돈을 마련해 비행기 표와 입장권을 끊는 이들이 주변에 많다는 거다. 괜찮은 자리다 싶으면 20만 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입장권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단지 '직관'을 위해 부러 스페인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수준 높은 축구를 만끽하는 데 몇 백만 원쯤은 아깝지 않다'는 이들을 보노라니 괜히 스페인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 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8만 명을 훌쩍 넘었다. 맨 위층 일부를 제외하곤 관중석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다지 주목을 받는 경기도 아닌데 순식간에 8만여 명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스페인의 축구 열기가 놀랍고도 부러울 따름이었다. 양 팀 선수들은 90분 간 최선을 다해 뛰었고, FC 바르셀로나는 소나기 골로 관중의 뜨거운 함성에 호응했다.

흔히 축구에 관한 한 스페인과 한국을 동등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축구가 종교인 스페인과 국가대표 간 경기 외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갖지 않는 우리나라의 수준을 따지는 건 부질없다는 거다. 지역에 터를 잡고 함께 호흡해온 역사가 다르고, 수십 배의 연봉 격차가 나는 선수들의 '클래스'가 다른데, 수준 차 운운하는 건 애초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관중석에 사람들이 들어차고 응원의 함성을 들려줄 때라야 비로소 축구 수준이 높아질 거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먼저 선수들이 수준 높은 축구를 선보여야만 사람들의 눈과 발걸음이 경기장으로 향하게 될 거라고 단언한다.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축구광이라는 두 청년도 우리나라 축구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느리고 재미없단다. 입장권을 사서 경기장도 몇 번 찾았지만, 차라리 TV로 유럽 축구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고 했다. 그들은 축구에 대한 투자 없이는 관중석엔 계속 파리만 날릴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축구 수준도 그 동안 얕잡아보던 중국에 머지않아 따라잡히게 될 거라고 예언했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역은 초만원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외려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그날 축구 경기에 대한 관전평을 서로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유별난 축구 사랑은 불편함조차 웃으며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TV를 통해 그날 경기를 다시 봤다. 지겹지도 않는지, 테이블마다 경기 내용과 선수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평점을 주고 순위를 매겼다. 누가 골을 넣었고, 도움을 기록했는지, 또 누가 교체되었고, 상대 팀에서 가장 활약이 두드러진 선수는 누구였는지 등을 훤히 꿰고 있었다. 스페인의 축구 경기는 밤늦도록 '현재진행형'이었다.


태그:#스페인, #FC바르셀로나, #캄프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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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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