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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쿠스코에서 버스로 14시간, 지도상의 거리는 짧아 보였으나 고산지대에서 태평양 연안의 평원으로 이동하는 만큼 길은 험하고 속도는 더디었습니다. 찾아간 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나스카 라인. 하룻밤을 버스에서 보내고 눈을 뜨니 어느새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황무지, 순식간에 공간여행을 한 듯한 어리둥절함 속에서 기지개를 켭니다.

드넓은 나스카 평원
 드넓은 나스카 평원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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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황색 평원에 30여 개가 넘는 동식물과 200여 개의 선과 도형이 그려진 지상 최대의 캔버스 나스카 라인은 1930년대 리마와 아레키파 간의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비행을 하기 전에는 그 존재를 몰랐을 정도로 신비로운 흔적입니다.

나스카 라인의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고 합니다. 이곳 토양은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층부는 작은 돌과 철, 구리, 화산암 같은 광물질이고 하층부는 모래, 진흙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층부의 돌무더기를 치워내고 안에 있는 황토를 보이게 하면 윤곽선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그림의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단순하게 만들어진 그림이지만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의 기후와 관련이 깊습니다. 나스카 평원은 연평균 강수량이 몇 십 mm에 불과할 정도로 극심한 사막기후입니다. 매일 아침 공기 중의 습기가 이슬이 되어 지표층을 덮는데, 그것이 마르면서 지표층을 단단하게 하고 그림의 윤곽을 고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답니다. 또한 해가 떠오르면서 직사광선에 의해 더운 공기층이 형성되어,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이 공기층에 바람이 튕겨나가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등성이에 그려진 일명 '우주인' 그림. 수수께끼풀이 게임의 시작을 환영하는 인사를 하는듯 합니다.
 산등성이에 그려진 일명 '우주인' 그림. 수수께끼풀이 게임의 시작을 환영하는 인사를 하는듯 합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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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그림은 200m가 넘는 거대한 크기입니다.
 앵무새 그림은 200m가 넘는 거대한 크기입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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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행기를 이용한 나스카 라인 투어는 기장과 부기장을 제외하고 승객을 6명 정도 태운 작은 비행기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며 시작됩니다. 

평소 인터넷에서 특수 기능으로 잘 찍어 놓은 나스카 라인의 사진이 눈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공중에서 실제 그림의 윤곽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황색으로 가득 찬 바탕 위에 흩어져 있는 그림들은 생각보다 작게 보였습니다. 

주요 그림 포인트를 지날 때 부기장이 설명을 해주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숨은 그림을 찾듯 유심히 관찰을 하고 '아~하~' 하고 감탄을 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승객들이 그림을 잘 볼 수 있도록 좌측과 우측으로 한 번씩 비행기를 급격히 기울여주는데, 지속되는 이 배려에 속이 메스꺼워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체 비행시간이 30분 남짓 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그림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두 분주합니다. 마치 누가 먼저 숨은 그림을 찾나 시합을 하는 어린 아이들 같기도 합니다.

사람의 손, 나무, 도마뱀 그림이 그려져있습니다.
 사람의 손, 나무, 도마뱀 그림이 그려져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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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이런 그림과 문양을 만들었을까?

'잉카의 도로였다',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다', '우주의 별자리를 표현한 것이다', '춘하추동의 절기를 나타낸 관측물이다'라는 주장에서부터 '우주인의 활주로다', 'UFO암호이다', '현생 인류 이전의 고(古)문명이 만든 것이다'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합니다. 하나의 과학적 가설이 등장하면 그 가설의 신빙성을 깨는 반박이 이어지는 등 나스카의 신비를 둘러싼 해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습니다.

당신도 오래 전 나스카 라인을 방문하고 그 소회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을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필요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 우리의 문화에서 그림의 이유를 발견해 내지 못함으로써 벽에 부딪히는 망연함… 이 망연함이 역설적인 희열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내놓은 수수께끼는 아니지만 계속 틀린 답을 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마치 동화 속에 들어간 어른들이 실패를 연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스카 그림의 이유가 궁금하듯 우리들이 향유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문명을 대하는 우리의 독법(讀法)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문명과 다른 누군가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느낌의 공간에 서니, 나는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위성을 통해 외계 지능 생물의 존재를 탐구하던 주인공 앨리가 베가성으로부터 정체 모를 메시지를 수신하게 된 후, 이 암호의 해독을 위해 자동차를 타고 연구소가 있는 뉴멕시코 이동합니다. 그녀가 탄 자동차는 외계생명체의 소식을 접하고 몰려든 수많은 군중 속을 지나갑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외계로부터 왔다는 정보를 접한 후 보이는 반응이 아주 다양하고 흥미롭습니다. 예수가 곧 외계인이었다고 찬양하는 종교인들, 베가성 여행상품을 홍보하는 사람들, 과학자들을 악으로 규정하며 종말을 부추기는 종교인들, UFO 보험을 판매하는 사람들, 베가성에서의 화려한 쇼를 기획하는 사람들, 이런 상황을 스포츠 중계하듯 다루는 미디어, 여론의 반응과 지지율 추이에 촉각을 세우는 백악관 등….

각자가 가진 생각의 틀과 각 집단이 가진 관념과 논리로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당신이 다녀 간 20년 전과 그만큼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나스카 라인을 읽어내는 상상력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우리 문명을 읽는 독법(讀法)은 또한 얼마나 진보했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해지는 와카치나 사막. 버기차량이 사막을 가로질러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해지는 와카치나 사막. 버기차량이 사막을 가로질러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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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에서 2시간 거리에는 와카치나 사막이 있었습니다.  수억겁 세월의 풍파가 만들었을 모래언덕과 거센 바람이 있는, 사막하면 흔히 연상하게 되는 그런 광경이 펼쳐진 곳입니다. 

여기가 아프리카의 사막은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어린왕자와 여우를 만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석양을 바라봅니다.

나스카 그림 해독에 대한 힌트를 주듯, 우리가 세상을 읽어내는 방식에 대한 경고를 하듯, 어딘가에서 여우와 어린왕자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와카치나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
 와카치나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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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6년 12월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나스카, #나스카라인, #와카치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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