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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무섭다. 어느덧 만 19년. 1998년 2월24일 발생해,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의 모티브가 되었던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올해로 19년이 됐다. 사랑하는 장남을 잃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의 분노 역시 마찬가지로 19년째다.

내가 김훈 중위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5월이다.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아버지는 어느덧 70대 중반을 헤아리고 있다. 조국을 위해 만 36년간 군복을 입었던 아버지는 월남전에도 3년이나 참전했다. 그 3년 동안 무수히 많은 죽음과 마주쳤지만 아버지는 오직 '조국의 명령'만 생각했다고 한다.

지난 1998년 사망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중장이 2013년 5월 24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 의문사 유족이 외치는 대 국회, 국민 호소대회'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권총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는 군수사결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며 항변하고 있다.
 지난 1998년 사망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중장이 2013년 5월 24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 의문사 유족이 외치는 대 국회, 국민 호소대회'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권총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는 군수사결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며 항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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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끔찍한 월남전의 고통보다 더 큰 비극이 군복을 벗고 난 후 찾아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장남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의문사로 아들을 잃은 후 이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아버지를 처음 만난 장소는 1998년 당시 내가 활동가로 일하고 있던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망 경위에서 생긴 의문점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나 역시 그런 김훈 중위의 자살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방송국이 MBC <PD수첩>이었다. 방송을 통해 보다 많은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다며 아버지와의 합의하에 부른 것이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카메라가 도착하고 이내 촬영이 시작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 아닌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내가 아버지에게 이유를 여쭸다. 그때 들려준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는 모든 군인들이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며 "군인 중 아주 나쁜 일부가 있는데 그들이 지금 우리 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니 그 잘못만 바로 잡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에 의해 '국방부 역시 속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버지는 36년간 자신이 충성해 온 군이 진실을 알면서도 저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진한 아버지를 배신한 곳은 다름 아닌 '아버지가 그렇게 믿었던 국방부'였다. 아버지의 믿음과 달리,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던 아버지에게 국방부는 매우 잔인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사건 당일의 국방부의 '자살'결론 발표였다.

김훈 중위가 '자살로 처리된' 이유가 뭐냐고요?

1998년 2월 24일 낮 12시 20분께 김훈 중위가 판문점 241GP 3번 벙커 안에서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러자 국방부는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김훈 중위가 자신에게 지급된 권총으로 스스로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많은 이들은 국방부는 왜 무리하게 김훈 중위를 자살이라 우기는 것이냐고 종종 묻곤 한다. 이것이 바로 지난 19년간 국방부의 억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숨어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내용의 발표 시각이다.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사건 발생 2시간 만인 오후 2시 20분께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문서에 결재한다. 놀랍게도 그 시각은 군 헌병대 수사관들이 사건 현장에 도착도 안 한 때였다. 수사를 시작하지도 않은 그때, 이미 김훈 중위의 죽음은 자살로 결정된 것이다.

예상처럼 다음 수순은 정해진 결론을 향하는 '거침없는 질주'였다. 군은 김훈 중위 사인 전반에서 드러나는 모든 타살적 정황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반면 자살로 보일 수 있을 만한 내용만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이 군을 믿었던 그 아버지의 36년 충성에 대한 국방부의 화답이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유족이 억울함으로 몸부림치고 있던 그때, 한줄기 희망의 빛이 찾아왔다. 바로 재미 법의학자인 노여수 박사였다. 그는 모두 11가지의 '김훈 중위 타살' 증거를 제시하며 국방부의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이는 '자살 결론 굳히기'에 획기적인 반격을 가한다.

그는 아버지를 잇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장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그를 '파파보이' 의지가 나약한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김훈 중위의 동기생은 말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육사 출신 장교였다고 말이다.
 그는 아버지를 잇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장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그를 '파파보이' 의지가 나약한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김훈 중위의 동기생은 말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육사 출신 장교였다고 말이다.
ⓒ 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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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여수 박사는 김훈 중위가 만약 방아쇠를 당겼다면 응당 그의 오른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다며 이는 김훈 중위가 자살하지 않은 결정적 증거라고 지적했다. 또한 총상 입구와 머리 속에 생긴 총알 진행 방향이 권총 자살시 발생하는 특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사용된 권총에 지문이 없어 누군가 고의적 지웠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이어진 폭로가 그 반응에 폭발력을 더했다. 의문사한 김훈 중위 소속 소대의 부소대장이 비밀리에 북한군 초소를 왕래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언론은 이 사실을 전하며 이전까지 의문사로 언급되어 왔던 김훈 중위의 죽음을 '타살'에 초점 맞춘 뒤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그러자 나선 분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국방부에 건군 역사상 최초로 군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의 구성을 지시했다. 2008년 12월의 일이었다.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렸던 일이었나? 이제는 마침내 됐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방부는 달랐다. 대통령의 지시로 특조단이 출범했지만 그 조사를 대통령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 특조단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참여했던 나는, 당시 내가 직접 목도한 사실 앞에 지금도 분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통령도 속였고, 국민도 속였으며 또 유족도 속였다.

처음에는 김훈 중위의 억울한 죽음에 공감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진실 대신 협상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약속을 깨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에서의 화약흔 조사가 대표적이다. 처음에 이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던 특조단은, 이후 자신들끼리만 몰래 실험을 한 후 그 결과마저 우리에게 속였다.

이런 사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특조단은 다시 한번 김훈 중위를 자살로 '만들었다'. 이같은 특조단의 비열한 거짓과 왜곡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바로 '유족에 대한 약점 찾기'였다.

사건의 진실 대신 특조단이 열심히 찾은 그것은...

이 사실을 알게된 것은 특조단의 조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묘한 소문이 우리 귀에 들려왔다. 특조단이 김훈 중위의 사망 조사 외에 또다른 사실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피해자의 아버지였던 김척 장군과 그 유족을 상대로 한 비리 등 약점 찾기 였다.

아버지가 장군이었으니 아들인 김훈 중위에게 뭔가 특혜를 준 것이 있는지, 그리고 36년간의 군 복무 기간 중 비위 사실이 있는지, 또는 뭔가 자신들이 잡고 흔들 만한 어떤 사실이 있는지 찾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건 정말 너무 야만적인 일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야만적이었다. 1999년 4월 14일, 특조단은 자신들만의 일방적인 수사로 낸 결론을 토대로 김훈 중위가 자살이라고 재차 발표했다. 그러면서 특조단장은 국회에서 '김척 장군의 가정은 자살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라는 말을 하여 듣고 있던 국회의원들이 "지나친 명예훼손"이라며 격분하기도 했다.

한편 이처럼 군이 찾으려 했던 아버지의 비위는 무엇이었을까? 정말 뭐라도 나왔을까? 깨끗했다. 36년간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누구처럼 군 연병장에 폐기물을 묻고 돈을 받았다면, 또 누구처럼 인사 청탁을 받고 금괴라도 받은 사실이 있다면 절대 그냥 둘 그들이 아니었다. 고작 찾아 낸 것이 차로 아들을 부대에 한 번 데려다 준 것을 두고 "마마보이로 아들을 키웠다"며 증거로 제시한 것이 전부였다. 

도대체 무엇을 두고 '자살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라는 극언을 했는지 지금도 납득할 수 없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모욕이, 그러나 19주기가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노여수 박사가 밝혀낸 과학적인 진실도, 그리고 국민권익위원회와 대법원, 그리고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김훈 중위 자살'을 오직 국방부만 유일하게 우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단언컨대 주장한다. 김훈 중위는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 '만약 자살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분명한 타살 사건을 자살로 우기는 '국방부의 양심'이다. 언제까지 이 분명한 사실을 국방부만 외면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저 바보같은 주장을 국방부는 계속하겠다는 것인가?

이제 내년이면 김훈 중위 사망 20주기를 맞이한다. 부디 그전에 이 논란이 끝나야 한다. 김훈 중위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나는 촉구한다. 영원한 청년 장교, 김훈 중위의 19주기를 추모한다.


태그:#김훈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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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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