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월 15일자 조간신문 1면, 동아일보는 김정남이 독침으로 피살 됐다고 보도했다.
 2월 15일자 조간신문 1면, 동아일보는 김정남이 독침으로 피살 됐다고 보도했다.
ⓒ 임병도

관련사진보기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지난 13일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됐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정확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저가항공사 터미널에서 여성 2명이 김정남과 접촉.
2. 김정남이 공항에서 고통을 호소해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이송 도중 사망.
3.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암살과 연루된 것으로 여겨지는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 한 명 체포.
4.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된 다른 4명의 남성도 찾고 있음.
5. 북한 대사관, 김정남 부검장 방문.
5. 2016년 2월 16일 오전 6시 현재, 부검 결과 나오지 않아 정확한 사망 원인 알 수 없음.


김정남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언론들은 위 사실들을 토대로 갖가지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수사 결과나 부검 결과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 김정남의 피살이나 암살 동기에 대해 추측이 담긴 기사를 내보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릴 경우 이는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김정남, 북한 여성공작원의 독침에 의한 암살'이란 타이틀로 나온 기사의 경우,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이나 경찰에서는 대부분 액체류 분사 또는 여성 2명과 접촉했다고만 보도했지, 독침을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몇몇 언론들은 아랑곳않고 '선정성'을 극대화 한 기사들을 앞다퉈 내보냈습니다. 그 사례들을 모아봤습니다.

불안에 떨어라? : 최첨단 암살 기법 소개한 'TV조선'

TV조선은 최첨단 독침 무기를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TV조선은 최첨단 독침 무기를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 TV조선 캡처

관련사진보기


TV조선은 '北 독침기술 어디까지 왔나…130㎜의 치명적 무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파커 만년필형 독총', '손전등형 독총', '볼펜형 독총' 등 최첨단 독총을 소개했습니다.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란 독극물까지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TV조선은 북한공작원에 의한 독침 암살 사례를 들면서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덕근 한국 영사가 독극물 공격에 피살됐다'라고 말합니다. 최 영사의 몸에서 독극물 성분이 검출된 것은 맞지만, 사망 원인은 머리를 8차례나 가격당했기 때문입니다.

'독침'을 부각하는 것은 북한의 암살 기법, 즉 정교해진 공격 수단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최첨단 무기로 공격하니 대한민국도 사드를 배치하고 안보를 굳건하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조성하기 위한 요소로 사용하려는 듯도 합니다.

그냥 믿어라? : 진일보된 암살작전 분명하다는 '채널A'

채널A기자는 북한이 독침에서 진일보된 방법으로 암살작전에 나섰다고 단정지었다.
 채널A기자는 북한이 독침에서 진일보된 방법으로 암살작전에 나섰다고 단정지었다.
ⓒ 채널A캡처

관련사진보기


채널A도 독침 관련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채널A는 '김정남 피살 사건 이후 북한 간첩이 쓰는 비밀 무기가 주목 받고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김정남의 피살에 관심이 있지, 어떤 무기에 의해 사망했는지를 궁금해 하진 않습니다. 언론이 스스로 국민들이 관심이 있을 거라고 단정을 짓거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를 자극적으로 보도했을 뿐입니다.

채널A는 "김정남 암살과 관련해 범행수법을 놓고 독극물이 든 스프레이와 천 등 엇갈린 정보들이 나오고 있다"라면서도 "하지만 과거 독침에서 진일보된 방법으로 암살 작전에 나선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진일보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뭔지 보도에서는 제시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80년대 수준 : 미인계, 독침 여성공작원 부각한 '연합뉴스'

연합뉴스는 1980년대 북한 영화 속 인물을 김정남 피살 사건에 연루된 여성과 함께 배치했다.
 연합뉴스는 1980년대 북한 영화 속 인물을 김정남 피살 사건에 연루된 여성과 함께 배치했다.
ⓒ 연합뉴스캡처

관련사진보기


연합뉴스는 '[현장영상] 미인계에 살해까지'…북 영화에 등장한 여성공작원'이라는 제목으로 북한 영화에 등장했던 여성공작원을 소개합니다. 연합뉴스는 '이 영화 속에서 여성공작원은 미인계를 동원하고 특수부대 무술 실력까지 뽐냈다'라고 설명하는데, 이 영화는 1986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도 '명령 027호'로 국민 대부분은 잘 모르는 영화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함부로 볼 수조차 없는 북한 영화입니다. 그런데도 연합뉴스는 이 영화가 '재조명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연합뉴스는 국민들 수준을 3S(스포츠와 섹스, 스크린)를 동원해 통치했던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듣지도 보지도 못한 80년대 북한 영화를 갖다 놓고 김정남 암살에 동원된 여성과 같다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북풍 저널리즘을 꿈꾸는 사람들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일 1면에 대한항공 폭파범 마유미(김현희)사진을 게재한 조선일보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일 1면에 대한항공 폭파범 마유미(김현희)사진을 게재한 조선일보
ⓒ 조선일보PDF

관련사진보기


1987년 대선날 아침, 조선일보 1면에 대한항공 폭파범 마유미(김현희)의 사진이 게재됐습니다. 이미 마유미는 대선 전날 서울 도착했지만, 조선일보는 선거 당일에 1면에 배치한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안보 이슈를 부각하는 '북풍 저널리즘'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 폭파의 본질은 사라지고 마유미-김현희로 이어지는 '미모의 여간첩'만 주목받았습니다. 지금 언론이 벌이는 '독침', '여성공작원' 타령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북풍 저널리즘'이 이제 먹히지 않는다고 혹자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김정은의 공포정치를 강조하며,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아울러 사드 문제가 또 주요 선거 이슈로 나올 가능성도 높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 또다시 재연될 것입니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종북'과 '빨갱이'를 외치던 극우세력은 이번 주말에 '김정은 사진'을 불태울 수도 있습니다.

언론이 1980년대 수준으로 국민을 우롱할 수 있는 자신감은 저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정치미디어 The 아이엠피터 (theimpeter.com)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정남 피살, #여성공작원, #마유미, #북풍저널리즘, #언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립 언론 '아이엠피터뉴스'를 운영한다. 제주에 거주하며 육지를 오가며 취재를 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