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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설날은 괴로운 날이 됐다. 어릴 적 세뱃돈 받던 즐거움도 한때의 즐거움이요,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 세뱃돈 대신 잔소리만 돌아온다.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잔소리까지 배불리 먹고 나면 서럽기만 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민족 최대의 '괴로운' 명절 설이 돌아왔다. 설을 맞아 일찌감치 피난 보따리를 싼 이들이 있다는 소식에 기자가 직접 피난길에 동행했다. - 기자 말

직장인 조현아(31·가명)씨는 명절만 되면 두렵다. 어른들이 돌아가시면서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 차례를 자신이 도맡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더욱 속상하게 만드는 것은 친척들의 태도다. 그녀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고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생색내는 일이 부지기수. 이번 설에도 반복될 일상이 두려웠던 그녀는 홧김에 집을 나와버렸다.

대학생 황차영(25)씨의 고향은 부산이다. 그녀는 귀성을 거부하고 서울에 남아 홀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명절만 되면 꽉 막히는 귀성길의 답답함이 싫었기 때문이다. 친척들의 잔소리도 그녀의 귀성 거부 이유 중 하나였다. 대학생인 그녀는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언제 취직하냐", "뭐하면서 먹고살 거냐" 등의 잔소리를 듣는 게 거북하기만 하다.

명절이 두려운 청춘들을 위한 '명절 대피소'

27일 저녁, 이대역 앞 작은 책방인 '퇴근길 책 한잔'(아래 책 한잔)에 모인 이들의 사연은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그들 모두 명절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까닭은 기나긴 설 연휴 동안 '명절 대피소'를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책방 주인 김종현(34)씨는 "백수, 백조에게는 명절이야말로 가장 피하고 싶은 날"이라며 "명절이 두려운 이들을 위해 책방을 대피소로 활용하기로 했다"고 이번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가 준비한 대피소의 컨셉은 '쓰리 프리 존(3 free zone)'이다. 이른바 잔소리, 눈칫밥, 커플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위치한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 전경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위치한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 전경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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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첫날인 27일 저녁에는 주인 김씨가 특별히 준비한 다큐멘터리의 상영이 예정돼 있었다. 오후 8시가 되자 친척들의 잔소리를 피해 정처 없이 떠돌던 청춘들이 서점에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윽고 책방의 불이 꺼지면서 다큐멘터리 상영이 시작됐다. 결혼불능세대라고도 일컬어지는 20~30대 젊은 청춘들의 연애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였다. 현실적인 조건 탓에 결혼은 물론 연애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요즘 청춘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참석자들 역시 남의 일 같지 않은지 연신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책방 주인 김씨는 "연애와 결혼은 요즘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라며 "명절을 피해 이곳에 온 청춘들과 이런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고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큰집에서 만두 빚다가 뛰쳐나와"

결혼불능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관람하는 참석자들의 모습
 결혼불능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관람하는 참석자들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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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상영이 끝난 뒤에는 '명절 잔소리 대책회의'가 이어졌다. 촛불과 난로의 불빛만이 책방에 가득 채워지면서 대화를 위한 아늑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기자를 포함해 책방에 모인 인원들도 5명으로 단출했다. 주인 김씨는 "평소 행사 때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며 "아무래도 명절에 가족들을 피해 다들 피난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책회의라는 거창한 문구와 달리 대화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맥주 한 잔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참석자들이 저마다의 고민과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경기도 화성에 거주하는 이지은(가명)씨는 "큰집에서 만두를 빚다가 뛰쳐나왔다"고 고백했다.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녀는 언제부턴가 사람이 그리워졌다고 했다. 명절에 큰집에서 만두를 빚던 중, 우연히 명절 대피소 소식을 접하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뛰쳐나왔다. 그녀는 친척들 앞에서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자신의 고민을 쉴새 없이 털어놨다. 참석자들은 그런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책방 주인 김종현씨가 대피소를 찾아온 첫 손님과 대화 중이다.
 책방 주인 김종현씨가 대피소를 찾아온 첫 손님과 대화 중이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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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스트레스 1위는 단연 '잔소리'

참석자들이 명절 스트레스의 1순위로 꼽은 원인은 역시 친척들의 잔소리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로부터 "언제 결혼할 거냐", "취직은 언제 하냐", "어느 대학 붙었냐" 등의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랠 길이 없었다고 푸념들을 쏟아냈다. 이들의 고민을 들으며 간간이 맞장구를 쳐주던 주인 김씨가 친척들의 잔소리에 대응하는 자신만의 대책을 제시했다.

"그분들이라고 우리가 미워서 염장 지르려고 그런 말을 했을까. 오랜만에 만난 조카가 반가운데 딱히 할 말은 없고... 그래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런 부분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계속 듣고 있으면 내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땐 '저한테 더 할 말 없으시죠?'라고 한 마디 대꾸해라. 그러면 다들 돌아가더라."

참석자들은 귀성 거부를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온 가족이 모여야 하는 명절 행사에 참석을 거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씨는 "우리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는데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서, 친척들 눈치 보면서 결국은 가지 않았느냐"며 "우리가 고분고분 말을 너무 잘 들으니까 만만하게 보인 것 같다"고 자조했다. 자식들의 고충을 뻔히 알면서도 끝끝내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넣는 부모님의 행동에 대해서도 다양한 분석이 쏟아졌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내 자식만 안 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말은 안 해도 뒤에서 '저 집 자식은 어떻게 키웠길래...'라고 수군거릴 게 뻔하다.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어른들 입장에서 그런 뒷말이 나올 여지는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을 가족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책방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는 한 손님의 모습
 책방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는 한 손님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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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싫다면 당당하게 거부권 행사해야

장시간의 대책회의 끝에 참석자들은 '당당하게 거부권을 행사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인다고 해서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독립적인 존재임을 꾸준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다시 책방 주인 김씨가 입을 열었다.

"사실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친척들은 옆집 아줌마랑 다를 게 없다. 굳이 우리가 도살장 끌려가듯 옆집 아줌마 만나러 먼 길 갈 필요가 있을까. 물론 옆집 아줌마랑 친하게 지낼 수는 있다. 친척들도 마찬가지다. 친한 친척들이 있으면 그 한두 명만 만나서 즐거운 시간 보내면 되는 거다. 싫은 사람 억지로 만날 필요는 없다. 당당하게 거부하고 투쟁하자."

그는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청년들이 가장 간섭받기 싫어하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김씨의 조언에 참석자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한번은 내 연애사에 대해 간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청첩장이라도 받고 싶으시면 더 이상 물어보지 마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알았다' 하고 그 뒤로 내 연애에 대해서 일절 간섭을 안 하신다. 한 번 써먹어봐라."

명절 잔소리 대책회의 중인 책방 주인 김종현씨와 손님들
 명절 잔소리 대책회의 중인 책방 주인 김종현씨와 손님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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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대피해야 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현실

젊은 남녀가 모이니 주고받는 이야기의 주제도 자연 '연애 문제'로 쏠렸다. 언제부턴가 명절 잔소리 대책회의가 아니라 참석자들의 연애상담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석자들이 주고받는 말을 열심히 경청하던 기자 역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다. 완전히 '무장 해제' 당한 기자는 스스로 27년 차 모태솔로라는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들은 기자에게 "연애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용기 내서 반드시 해보라"는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았다.

'똘끼'와 반항심 가득한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책방 주인 김씨가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한잔 하자며 2차를 제안했다. 안 그래도 명절이 외롭고 고달팠던 이들이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기사 작성을 위해 먼저 자리를 떠야 했던 기자는 못내 아쉬움을 품은 채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어두운 골목 사이로 문을 연 술집을 찾아 들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명절을 '대피'해야만 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아픔과 고민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이들에겐 언제쯤 명절이 즐거운 날로 기억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 보이는 것 같아 돌아오는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Tip] '명절 대피소' 이용 안내

'퇴근길 책 한 잔'에서 운영하는 명절 대피소는 설 연휴 마지막 날인 30일 월요일까지 진행된다. 운영시간은 매일 오후 2시에서 9시까지다. 남은 연휴 기간 동안 '세뱃돈 고스톱', '명절 음식 나눠 먹기', '개판(술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세부 일정은 주인장 마음이다. 오늘도 명절 스트레스를 피해 외롭게 방황하는 청춘들이여. 잠시 대피소로 몸을 피신해보는 것은 어떨까.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 내부 풍경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 내부 풍경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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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상호명: '퇴근길 책 한잔'
주소: 서울 마포구 염리동 9-60번지 1층 (지하철 2호선 이대역 5번 출구)
영업시간: 평일 오후 2시~10시 / 토 오후 2시~7시 / 매주 일, 월 휴무 (설 연휴 기간 예외)
블로그: http://blog.naver.com/booknpub



태그:#명절, #설날, #스트레스, #책방,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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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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