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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13일,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유명한 말을 했다. 베이징의 국빈관에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발언을 남긴 것이다.

그는 무엇이 1류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 콩쿠르에서 종종 나오는 '1등 없는 2등의 영예'가 기업에 돌아갔다. 그는 내심으론 '기업은 1류, 행정은 2류, 정치는 3류'란 말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후폭풍이 클 수 있으므로, 2류·3류·4류로만 순위를 매겼을 수도 있다.

이건희의 1995년 발언은 기업에 대한 행정규제와 정치인들의 권위의식을 비판하기 위해 나온 말이다. 기업 활동에 대한 장애가 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정치를 4류로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치가 4류가 아니라 재벌 기업이 4류가 될 수도 있다. 삼성 이재용, 현대 정몽구, SK 최태원, LG 구본무, 롯데 신동빈 등이 최순실 청문회에 불려나오고,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문제가 국내외적 관심을 끌 정도가 됐다고 해서 그들을 4류로 평가하는 게 아니다. 지난 2, 3백년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치 분야보다도 재벌 기업이 4류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인류의 정치·경제를 지배했던 왕실과 귀족 중심의 봉건적인 사회체제는 1776년 이후의 미국 독립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유럽에서부터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전인 20세기 초중반에는 전 세계적 범위에서 거의 다 와해되었다. 이로 인해 인류 사회에서는 왕실과 귀족계급이 이제는 사실상의 유물로 되어버렸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쪽은 정치 분야다. 예전에는 정치 분야가 지금의 재벌기업처럼 운영되었다. 왕실과 귀족이 권력을 독과점하는 게 당연시됐고, 일반 대중의 참여는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또 왕실 권력과 귀족 권력의 세습도 당연하게 인식됐다.

그랬던 정치 분야에서 일반 대중의 참여가 점진적으로 허용되었다. 이것은 주로 선거권 확대를 통해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부동산 소유자에게 의회선거 선거권이 주어지고, 나중에는 동산 소유자에게도 그것이 주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왕족이나 귀족뿐 아니라 납세자도 나라의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갔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공장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고, 좀 더 뒤에는 농업 노동자에게도 그것이 부여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선거권 획득을 목표로 노동자들이 벌인 차티스트(인민헌장) 운동이 이런 성과를 낳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차티스트운동.
 차티스트운동.
ⓒ 위키백과 영문판(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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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귀족 가문'처럼 운영되는 기업들

그러다가 1900년 전후에는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고, 1920년대 이후에는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중반부터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보통선거가 일반적인 정치 현상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1948년 5월 10일에는 한국에서도 보통선거에 입각한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나랏일에 관여할 수 없었던 일반 대중은, 이런 과정을 거쳐 국가 운영에 제한적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지난 250년간 정치권에서 꾸준히 전개된 혁신으로 인해, 이제는 유권자의 자격만 가지면 지위의 고하와 재산의 다소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1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부자의 1표와 빈자의 1표에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누구나 다 1표를 갖는 세상이 되었다. 왕실과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정치권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기업 분야, 경제 분야의 혁신은 매우 형편없다. 지난 수백 년간 기업의 공공성은 훨씬 더 커졌다. 재벌들이 소유하는 대기업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수많은 소액주주들이 돈을 내고 국민 세금에 기초한 특혜가 제공된다는 점에서, 재벌 대기업은 최대 주주의 소유물도 아니고 전체 주주들만의 소유물도 아니다. 국민 세금이 들어가므로, 국민 공공의 소유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재벌 대기업은 여전히 예전의 귀족 가문처럼 운영되고 있다. 옛날 한국의 양반 지주나 유럽의 귀족 지주들이 농업을 경영했을 때처럼, 상당히 봉건적으로 재벌 대기업이 경영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법과 경제법 등에 의해 외부의 견제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총수 가문이 기업을 사유물처럼 취급하고 부자간의 2대·3대 세습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재벌 기업은 왕실이나 귀족 가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대중은 국가에 대해 세금을 내고 병역의무를 이행한다. 이것도 대단한 희생이지만, 대중이 기업에 바치는 희생 역시 결코 만만치 않다. 어쩌면 기업에 대한 희생이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대중은 일주일에 하루 이틀을 뺀 나머지를 기업을 위해 일한다. 자신과 가족이 죽지 않고 계속 일하는 데 필요한 돈을 봉급으로 받기는 하지만, 자신이 피땀 흘려 일한 것에 비하면 그 대가는 너무나 형편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기업으로부터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기업에서 발생한 이윤을 공정하게 분배받아야 하고, 기업의 의사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정확히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일터에서 벌어지는 의사 결정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봉급을 모아 자기 회사의 주식을 산다 해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주식을 사서 자기 회사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럴 바에야 재벌 총수의 손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는 게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공공화된 재벌 기업에서 내부 민주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이 분야가 여전히 귀족 가문처럼 운영되기 때문이다.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 보통선거로 실시된 선거다.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 보통선거로 실시된 선거다.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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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2류이고 기업은 4류

지난 250년간 정치 분야에서는 선거권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비록 형식상으로나마 대중의 의사결정 참여가 보장되고 있는 반면에, 이처럼 기업과 경제 분야에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혁신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정치가 4류이고 기업이 2류가 아니라, 정치는 2류이고 기업은 4류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재벌들이 최순실에게 돈을 주고 무언가를 얻으면서 대한민국을 일대 혼란에 빠뜨린 것은, 사실상 국민의 것이나 마찬가지인 재벌 기업들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어 총수들의 전횡과 범법을 견제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이 조성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이후로 왕실과 귀족의 봉건체제에 대한 도전을 주도한 것은 자본가 계급이었다. 자본가 계급은 예전에는 왕실과 귀족의 경제적 독과점 속에서 푼돈 밖에 벌지 못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 왕실과 귀족에 맞설 만한 경제력을 축적하게 되자, 자본가 계급이 앞장서서 구체제에 대한 도전을 주도했다.

그런데 자본가 계급은 정치 분야를 상대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기업 및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개혁세력이 정치 분야의 민주화를 주로 요구하고 경제 분야에는 침묵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경제 민주화의 발달을 저해한 근원적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의 생존에 보다 더 직결되는 것은 정치보다는 경제이기 때문에, 촛불 집회는 도심 거리나 광장에서뿐만 아니라 재벌 기업의 로비에서도 정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봉건체제에 대한 도전을 주도한 자본가 계급이 정치 분야의 민주화만 요구하고 경제 분야의 민주화에는 침묵하도록 지난 250년간 대중을 '의식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재벌 기업을 4류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태그:#재벌, #이재용, #이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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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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