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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7일 오후 10시 30분 경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소속 정원스님께서 세월호 사건 1000일 집회가 끝난 직후, 광화문 광장에서 온 몸에 분신을 결행했다. 분신 직후 곧장 서울대학교 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되어 70% 이상의 2도 화상과 40% 이상의 3도 화상으로 인한 의식불명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생명을 유지하다 1월 9일 오후 7시 40분 유명을 달리했다.

정원스님의 분신항거 이후 1월 9일 저녁 7시 40분 입적하시자 장례일정과 빈소마련 등 대책토론을 위해 밤 11시부터 자정을 넘기는 시간까지 비대위와 여러 시민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1월 7일 밤부터 1월 9일까지의 경과에 대한 보고를 먼저 하는 비대위원들.
▲ 분신항거 비상대책위원회 정원스님의 분신항거 이후 1월 9일 저녁 7시 40분 입적하시자 장례일정과 빈소마련 등 대책토론을 위해 밤 11시부터 자정을 넘기는 시간까지 비대위와 여러 시민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1월 7일 밤부터 1월 9일까지의 경과에 대한 보고를 먼저 하는 비대위원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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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스님 분신항거로 1월 9일 저녁 7시 40분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비대위에서는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 비대위원들의 경과보고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민단체에 소속된 몇 몇의 성토가 뒤 따랐다. 향후 일정에 대한 논의는 1월 10일 오전과 필요시 추가 회의를 통해 결정하기로 하고 자정을 넘겨서야 토론은 끝났다.
▲ 비대위에 참석한 시민단체회원들 정원스님 분신항거로 1월 9일 저녁 7시 40분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비대위에서는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 비대위원들의 경과보고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민단체에 소속된 몇 몇의 성토가 뒤 따랐다. 향후 일정에 대한 논의는 1월 10일 오전과 필요시 추가 회의를 통해 결정하기로 하고 자정을 넘겨서야 토론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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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스님의 분신항거 비상대책위원회의 전체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안치실에 경찰들이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남기 농민의 부검을 주장하며 시신을 탈취하려던 경찰에 대한 인식을 지울 수 없는 시민단체의 회원들 상당수가 곧장 지하1층 안치실로 달려갔다. 30명가량의 경찰이 출동해 정원스님의 검안에 대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몇 명의 경찰이 비대위에 자신들의 목적과 취지를 밝히며 진행하면 될 업무를 많은 경찰을 동원하다보니 고성이 고가는 문제가 발생됐다.
▲ 검시를 위해 출동한 경찰 정원스님의 분신항거 비상대책위원회의 전체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안치실에 경찰들이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남기 농민의 부검을 주장하며 시신을 탈취하려던 경찰에 대한 인식을 지울 수 없는 시민단체의 회원들 상당수가 곧장 지하1층 안치실로 달려갔다. 30명가량의 경찰이 출동해 정원스님의 검안에 대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몇 명의 경찰이 비대위에 자신들의 목적과 취지를 밝히며 진행하면 될 업무를 많은 경찰을 동원하다보니 고성이 고가는 문제가 발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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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스님은 분신 전, 한 권의 노트에 촛불을 든 시민들에 대한 당부의 말씀을 남겨 놓았다. 그 내용은 아래 4개의 항목으로 정리된다.

① 박근혜정권의 부정선거 규명과 내란범죄 처벌
② 한­일간 위안부합의 및 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사드배치 반대 
③ 세월호 사건의 완전한 진실규명 
④ 자주 평화 통일 완성

이 네 가지로 축약될 수 있는 말씀을 남기신 정원스님의 분신항거에 대해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분신항거 비대위)는 평소 스님이 활동하던 제 단체(자주평화통일추진위원회-이하 자평통 : 대표 박교일)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었다. 그리고 1월 9일 분신항거 비대위는 정원큰스님의 유지를 계승하여 아래와 같은 입장을 천명했다.

① 우리는 정원 큰스님의 시념에 고감하는 모든 시민 및 단체와 연대해 정원 큰스님의 취지를 계승하고 실현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②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원 큰스님의 쾌유를 빌며, 만약 절명하신다면 그 책임은 박근혜 일당에게 있음을 밝히고 박근혜 구속시까지 정원 큰스님을 보내 드릴 수 없음을 천명한다.

이후 분신항거 비대위와 시민단체 및 몇몇 승려들 사이에 격론이 있었다. 그러나 분신항거 비대위와 시민단체에서는 같은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우세했다.

스님께서 오후 7시 40분 입적하시자 병원 측에서 30명 정도 정원스님과 마지막으로 대면 할 기회를 제공했다. 1차 5명 접견자로 정원스님의 모습을 확인했다.

"소신공양으로 매국노 집단이 일어나는 기회를 끊고 촛불시민에게 힘을 주기 위함이다."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신 말씀 중 하나다. 이 유지를 받들어 1월 10일 진행된 전체회의에서 장례의 상주는 유족의 위임을 받은 자평통 박교일 대표로 하고 전체 절차는 퇴진행동이 주관하기로 결정됐다.

노란 보자기를 두른 스님을 만났을 때 처음엔 “스님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슈퍼맨 복장도 갖추시고”라 했다. 스님은 빙그시 웃더니 “열심히 잘 해봅시다”라 힘주어 말씀을 남기고 어딘가로 향했다. 늘 스님은 박근혜 정권에 대해 항거의 마음을 노란 보자기에 담아 가사장삼을 대신 했다.
▲ 임시분향소 노란 보자기를 두른 스님을 만났을 때 처음엔 “스님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슈퍼맨 복장도 갖추시고”라 했다. 스님은 빙그시 웃더니 “열심히 잘 해봅시다”라 힘주어 말씀을 남기고 어딘가로 향했다. 늘 스님은 박근혜 정권에 대해 항거의 마음을 노란 보자기에 담아 가사장삼을 대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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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지하 13, 14호실로 마련되었으며 퇴진행동은 1월 10일 오후 2시 운영위와 오후 6시 장례식장에서 퇴진행동 긴급대표자회의를 거쳐서 장례절차 및 진행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2016년 1월 6일 한일 위안부합의에 대한 반발로 외교통상부에 화염병을 투척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미수에 그쳤던 사건으로 현재 2심 진행 중이시던 정원스님의 약력이다.

1977년 해인사로 출가 
1978년 사미계 수지 
1981년 비구계 수지
법주사 강원에서 공부하다 1980년 광주학살과 불교 법난에 저항하는 불교탄압 공동대책위 일원으로 활동.

1987년 6월 항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스님은 개인 수행에 몰두한 뒤 지난 2005년부터 사회운동 관심

2006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이전반대투쟁 참여
2007 동국대 신정아 사건 시 7일간 동국대-조계사 간 맨발 참회 수행
2007 12. 5 이명박 의정부 유세에 계란 투척 징역 2년 집유 3년 선고
2008년 광우병 수입소고기 반대 투쟁 참여
2009년 한명숙 구속반대 투쟁 참여
2014년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 참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원스님, #박근혜퇴진, #분신항거, #소신공양, #정원스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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