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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나까프'에서 '나까프'는 '나쁜X 까발리기 프로젝트'를 줄인 말입니다. 여기서 'X'는 '놈'일 수도 있고, '짓'일 수도 있습니다. '나까프'의 대상은 공인 중의 공인인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급 공직자들입니다. 나아가 무력을 가진 군과, 공권력을 가진 이른바 4대 권력기관(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 그리고 갈수록 힘이 세지는 대기업 회장들도 당연히 '나까프'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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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김기춘의 세 번째 운명적 만남과 3년전 오늘, 한홍구의'김기춘뎐'

2013년 8월 박근혜는 팔순을 앞둔 김기춘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김기춘과 박근혜의 세 번째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정확히 3년 전 오늘, <한겨레>'토요판'에 '한홍구 교수의 김기춘뎐(傳)'이 실렸다. 한홍구 교수가 기고한 <법 주무르며 누린 '기춘대원군'의 40년 권력>이란 제목의 인물탐구 기사였다. 40년 권력의 전비(前非)가 얼마나 많았던지 100매 분량으로 쓴 것을 60매로 줄였다고 한다. 한 교수는 2015년 4월에 출간한 <역사와 책임>(한겨레출판사)의 4장에 '김기춘뎐'을 담았다. 이 책의 부제는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였다.

한홍구는 이 책에서 김기춘에 대해 몇 가지 레테르를 붙였다. 유신헌법의 초안 작성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박정희 체제를 지탱한 유신본당, 초원복국 식당에서 "우리가 남이가"를외친 지역감정의 화신, 남에게는 엄격한 법 집행을 강조하면서 자신에겐 법의 면죄부를 발부받은 법비(法匪) 중의 법비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법으로 무장한 비적을 지칭하는 '법비'라는 레테르가 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앞서의 70년대 장목항 풍경과 '청운의꿈' 이야기는 2013년8월 '법률 좀비 김기춘'이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컴백했을 때, 거제도 출신의 삼성그룹 임원한테서 들은 얘기다. 물론 그도 70년대 10대 시절 '제2의 김기춘 검사'를 꿈꾼 거제도 청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근혜와의 세 번째 운명적 만남은 비극적 결말을 잉태하고 있었다.

'소년 급제'로 꽃길만 밟은 그에게도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 정신-물질적 후견인이었던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신군부의 사직 압박, 92년 12월 대선 당시 부산 초원복국집에서 기관장들에게 관권선거 및 지역감정을 조장해 선거법을 위반한 혐의('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로 불구속 기소된 일, 그리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것이 그것이다.

김기춘은 위기가 닥칠 때면 실세 후배에게 구명을 부탁하거나 때로는 온갖 법률지식을 총동원하고, 아니면 세간의 이목을 피해 사건이 흐지부지되기를 기다려 법망을 빠져나왔다. 그에게 '불사조'니 '법률 미꾸라지'니 하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법꾸라지 김기춘'이 어떻게 법망을 빠져나갔는지는 다음 편에 다룬다).

'법꾸라지' 김기춘에게 찾아온 네 번째 위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도중 기침하고 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도중 기침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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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네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많은 거제도 학생들과 예비 법조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김기춘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회의원들로부터 '법꾸라지'(12월7일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라고 조롱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26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자택을 압수수색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검의 칼끝이 그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김기춘은 "최순실을 모른다"며 부인했다. 그러나 박헌영 K스포츠재단 과장이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최순실과의 관계는 의미심장하다. 그에 따르면 최순실은 김기춘을 '늙은 너구리'라고 경계하면서도 자기가 필요할 땐 김씨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기춘은 최씨의 존재에 대해 나름 눈치를 챘고, 최씨가 시키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들어줬다고 보는 게 맞다"면서 김기춘의 처지에선 최씨를 '건드려선 안 되는 인물'로 여겼을 것이라고도 했다. 김기춘이 최순실의 존재와 국정농단을 알았으면서도 모른 체했을 것이라는 점은 주군을 받드는 그의 처세술에 비추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특검은 김기춘의 서울시 평창동 자택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업무일지) 사본을 입수해 보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춘은 특검팀에 앞서 이미 검찰 특별수사본부 수사 단계에서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피의자였다. 2014년 10월 문화체육관광부1급 공무원 6명의 사표를 받도록 했다는 '문체부학살'(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을 지시했다는 혐의다.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물증이 고(故) 김영한 수석의 업무일지다.

지난 8월 25일 간암으로 사망한 김영한 전 수석은 민정수석 재임(2014. 6~2015. 1)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이 주재한 수석회의를 비롯한 관련 업무를 160쪽에 걸쳐 꼼꼼히 기록했다. 비망록에 따르면, 청와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탄압하고 재갈을 물렸다. 예를 들어 업무일지(2014년 7월4일)에는 문체부 사표 종용을 앞두고 김기춘 실장이 '주요부처 실국장 동향파악-충성심확인'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온다.

이외에도 언론과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청와대는 세월호 때의 청와대 대응이나 유가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 정부에 비판적인 판사의 업무 배제, 비선 의혹을 제기한 야당 국회의원에 대한 응징, 통합진보당 해산 관련 조처 등 대통령과 정부에 비판적인 모든 일에 대해 응징-보복하는 식으로 대응한 듯 보인다. 마치 청와대가 공안 당국의 지휘소와 같았다. 이런 70년대식 충성심과 조직문화에 기대어 응징공작을 지휘한 청와대 사령탑이 바로 김기춘이었다.

특검팀은 김기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휴대전화를 확보한 데 이어, 28일 재판 과정에서 김영한 비망록이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유가족을 설득해 원본을 확보하는 등의 보완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비망록을 법정 증거로 채택하려면 증거능력(기록의 사실성)과 증명력(내용의 신빙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원본 확보는 그 첫 번째 수순이다.

김기춘에게 비수가 된 검찰 후배 김영한의 비망록

지난 2일 오전 서울 중구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 중 청와대의 언론통제, 문화검열 주요 내용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언론노조, 고 김영한 민정수석 비망록 분석 결과 발표 지난 2일 오전 서울 중구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 중 청와대의 언론통제, 문화검열 주요 내용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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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청문회에 출석해 비망록 내용에 대해 "작성한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이 가미된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비망록이 법적 증거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비쳤다. 하지만 언론에 공개된 상당 부분이 객관적 사실들과 부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법정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법조계에서도 김기춘의 지시사항을 꼼꼼히 기록한 비망록과 김기춘의 휴대폰 통화 내역을 대조해 청와대의 지시가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확인되면 이번에는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다.

설령 그가 법망을 빠져나가더라도 그는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다. 그는 이미 세월호 7시간 의혹과 관련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 집무실이 본관, 비서동, 관저, 영빈관에 산재해 있어 사실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해도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면서 "여성 대통령에게(시술 의혹을) 묻는 건 결례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른바 '정윤회 문건'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일주일에 한 번도 못 보거나 대통령의 위치를 몰랐다면 이는 직무유기를 자인한 것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0여 년의 공직생활이 하루아침에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되고, 거짓말쟁이가 돼서 정말 참담한 심경이다"고 했다. 1964년 검사로 임용된 이후 후배들이 선망하는 꽃길에 몸담았던 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역사학자 한홍구는 일찍이 박근혜 대통령의 정체성을 '유신공주'라는 별명으로 규정한 바 있다. 김종필은 '유신잔당'이라는 비판에 자신은 '잔당'이 아니라 '본당'이라고 반박했다지만, 김기춘은 1972년부터 지속되어온 유신체제 설계도의 초안을 작성해 '본당 이상으로 주목을 받은 잔당'이었다.

한홍구가 작명한 '유신공주'의 정체성은 봉건왕조에서 곧바로 이어진 식민지배를 우리 힘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주어진 전근대 국가의 공주를 의미했다. 그 시절 노인들은 박근혜가 나타나면 "공주님 오셨다"며 엎드려 큰절을 올리곤 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모습이지만 당시 20대 중반의 박근혜 새마음봉사단(구국봉사단) 총재는 최태민이 인도한 대로 70~80 먹은 노인들 앞에서 충효를 강의하곤 했다. 김기춘은 79년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유신공주'를 지켜봤다.

그로부터 30여년 뒤에 오랜 '자폐' 끝에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김기춘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2013년 8월 '유신공주' 박근혜가 '유신헌법 초안자'이자 '어머니 원수를 갚아준 고마운 사람' 김기춘을 도승지로 임명했을 때 보여준 '90도 폴더 인사'에서 예고되었다. 세월호가 뒤집혀 침몰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대통령 심기만 살피는 비서실장에게 '직언'은 기대난망이었다. 그는 비서실장 취임후 처음 가진 공식 브리핑에서도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고 말해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언행은 그들의 인식과 정체성이 70년대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런 박근혜의 정체성과 사법기술자 김기춘의 흑역사를 짚은 한홍구의 혜안은 최순실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연재의 부제를, 저널리스트가 할 일을 대신해 준 한홍구 교수에 대한 오마주(hommage)로서 '신(新) 김기춘뎐'으로 이름붙인 배경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국가정보원 대외비 자료와 직원 인터뷰를 토대로 '국정원 흑역사'를 파헤친 <시크릿파일 국정원>(메디치미디어, 2016)의 저자로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본부장(편집국장)을 지냈다.



태그:#박근혜, #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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