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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꼴이 엉망이다. 이 나라는 개선이 아니라 밑동부터 다시 쌓아야 할지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세대가 앞장서야 한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오마이뉴스>는 헬조선의 현실에서도 꿈을 찾아 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펀딩을 시작한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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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 정욜
▲ 인권운동가 정욜 인권운동가 정욜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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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을 만났다.

여름 더위에 모두가 기진해 있을 때였다. 인터뷰는 차치하고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그의 팔을 끌었다. 그렇게 나는 그를 강제 퇴근(!)시켰다. 사무실에 홀로 남아 산적해 있는 일들과 씨름하고 있던 그였다. 바쁜 사람이다.

'인권재단 사람'에서 활동하는 인권활동가로,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대표로,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의 간사로 있으면서 각 단체에서 진행하는 캠페인 기획과 모금, 교육, 상담을 도맡는가 하면 언론사에서 요청해 오는 인터뷰와 기자회견에서의 발언도 그의 몫이다.

"엄마가 부탁을 했어요. 네가 이런 활동을 하며 사는 것은 괜찮지만 이름만큼은 나오게 하지 말라고. 그때 제가 펑펑 울며 화를 냈어요. 엄마, 그 기사 다 못 보셨죠? 트랜스젠더 친구가 어렵게 지내다 자살한 사건이잖아요. 우리의 삶은 이런데 엄마는 나한테 얘기한다는 게 그거 밖에 없냐고... 그렇게 화는 냈지만 죄송했어요. 제 정체성이 부모님께는 힘든 과제가 되어버린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인터뷰를 통해서 드러나는 제 삶이 저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갈등과 고민일 거라고 생각해요.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인터뷰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더라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커밍아웃을 한 지 꽤 오래 지났음에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두렵다. 인터뷰 기사로 인해 혹시라도 어머니가 또 상처받진 않을까 걱정부터 든다. 그럼에도 그는 나서기를, 말하기를,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인권운동을 하며 큰 욕심을 내본 적 없는 그이지만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만큼은 애착이 큰 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청소년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그러다 2013년 외부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욜은 망설이지 않고 기획서를 썼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 지원센터 '띵동'의 시작이었다.

또 하나의 안전한 집 '띵동'

인권운동가 정욜
▲ 인권운동가 정욜 인권운동가 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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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성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이 많아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말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친구들에게 '띵동'은 또 하나의 안전한 집 같은 곳이에요. 청소년들에겐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이 친구들을 위한 제도와 법도 마련되면 좋겠지만 우선 자기 가까운 주변에 안도감을 주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시급했어요."


'띵동'은 욜이 동인련(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시절부터 꿈꿔왔던 청소년들의 공간이다. 성정체성으로 인해 가족과 단절되고 학교에서 거부당한 청소년들을 품어 안는 곳, 그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따듯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곳,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곳이다.

욜은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크고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커밍아웃으로 인해 부모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불행은 겪지 않아도 됐고 학교도 무사히 졸업했으며 가까운 사람들의 환대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던 많은 성소수자들은 삶 자체가 상처투성이였다. 끝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소수자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 말이다.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어제 '띵동' 활동가들이 모여 회의를 했어요. '띵동'을 찾아오는 친구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밤 9시가 넘은 거예요. 안건은 아직 17페이지가 남았는데. 저는 대표라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지 상담하는 활동가들은 잠도 못잘 때도 많고 고생 진짜 많이 해요. 전화나 카카오톡을 통해 상담을 실시간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러다 위기상황이 오면 온 활동가들이 확 붙어서 의료지원이든 심리상담 연계든 당사자한테 가장 맞는 지원방법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요."

'띵동'은 단순한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가 아니다. 긴급 상담 창구를 24시간 열어놓고 체계적인 위기지원을 통해 청소년들의 신체적, 정신적 안정을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권교육,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스스로 자아존중감을 되찾는 과정도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욜은 지금 대학을 다시 다니는 중이다. 잠이 부족할 정도로 매일 매일이 버겁지만 보다 전문적인 청소년 상담을 위해 과감히 결정했다. 물론 학업에 제대로 된 시간을 내지 못하다 보니 성취목표를 소박하게 잡았다. 학기마다 딱 두 과목만 F학점 면하기다.

그리고 운명처럼 만난 HIV감염인

인권운동가 정욜
▲ 인권운동가 정욜 인권운동가 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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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인권활동가로 불리는 게 너무 부끄럽고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큰 욕심이 없었는데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정말 운명처럼 인권운동에 평생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HIV 감염인을 만났을 때에요."


욜이 '띵동'을 만들고 나서 시작했던 후원모금이 바로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 의 PL, PL은 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로 HIV/AIDS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HIV/AIDS, 에이즈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PL(피엘)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며 사용하고 있다.

사랑방 모금이었다. 말 그대로 감염인들이 모여 앉아 소식을 나누고 둘러 앉아 밥 한 끼 먹는 사랑방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획 단계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띵동'과 달리 KNP+에서 욜은 감염인 생애사 인터뷰와 인권캠프, 낙인지표연구조사 등 감염인들이 하고 싶던 활동이 가능하게끔 돕는 자리에 있다. 조력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활동을 꾸준히 오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요즘 욜은 사랑방에 끼어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듣는 중이다. 가만히 앉아 그들의 삶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다 아프다.

"아파요. 이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내뱉는 말인데 듣고 있으면 온몸이 다 아파요. 사랑방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데 대부분 가난하고 외롭고 친구도 없이 혼자 견디는 사람들이 많아요. 사람들의 편견부터 불합리한 제도까지 HIV에 대해서는 너무 화가 나는 일이 많아요. 저는 이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동료이자 친구로서 아주 공격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세상과 한번 싸워보고 싶어요."

말을 끝낸 욜이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간단한 치과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과 성소수자 인권이 HIV를 확산시킨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그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욜은 '혁명'을 꿈꾼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감능력 상실은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 인권운동처럼 혐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운동들에 던져진 과제라고 생각해요. 인권활동가는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공감능력을 사회에 넓게 퍼트리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런데 저처럼 꼭 어떤 조직에 특별하게 위치하고 있지 않아도 누구든 인권활동가가 인권옹호자로서의 지위를 받을 수 있어요. 누군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을 갖은 순간부터 그 사람은 인권옹호자인 거고, 옆 사람이 상대하고 있는 불의와 불합리에 내 목소리를 보태는 행동이 인권운동인 거죠. 우리 사회에 인권옹호자가 많아질수록 공감능력도 많아질 것 같고, 공감능력이 많아질수록 혐오에 대응하는 사회적 힘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혁명인 거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권운동가 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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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의 존재는 낯설다. 그 스스로가 성소수자인 동시에 청소년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과 함께 사회의 혐오와 차별에 맞서 혁명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휴머니스트로 남고 싶어요."

마지막 잔을 비우며 그가 남긴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 걸까? 욜이 투신하고 있는 소수자 인권운동이, 아니 그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나는 그를 통해서야 겨우 이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을 꺼내들었다. 낯선 쪽은 그가 아니었다. 비정규직 일자리와 높은 청년 실업률, 무능한 정치와 사라진 공동체, 소수자와 약자를 겨냥한 혐오들. 내 삶을 침범하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익숙해져 인간다운 삶에 대해 질문조차 하지 못했던 내 쪽이야 말로 낯선 인간이었다.

나는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에 불편한 민낯을 들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두 계절이 지난 지금에서야, 미련하게도 이 지독한 세상을 두 계절이나 더 겪고 나서야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한다.

나 역시 당신이 꿈꾸는 혁명에 동참하겠노라고, 그리고 당신은 이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 도전하는 청년에 대한 응원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가능합니다.
* 스토리펀딩 바로가기 >>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5930

덧붙이는 글 | 이소망 기자는 소설가이자 바꿈 이사입니다.
본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으로 진행중이며 시리즈 기획입니다.



태그:#인권, #청년, #정욜,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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