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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연금을 본인 승계 문제를 위해 사용했다는 의원들의 지적이 이어지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연금을 본인 승계 문제를 위해 사용했다는 의원들의 지적이 이어지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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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공 청문회' 이후 28년 만에 9명의 재벌 총수들이 청문회에 출석한 지난 6일 오전 8시, 국회의사당 로비에는 이른 시간부터 총수의 동선 확인 등 의전을 위해 출동한 기업 직원들과 시위대, 취재진들 100여 명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높은 관심 탓에 청문회장 내 취재는 각 사별 국회출입기자 1명으로 제한됐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역사적인 현장에서 9명의 재벌 총수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뒤로 하고 이날 하룻동안 국회 정론관 <오마이뉴스> 정치팀 부스에서 중계화면과 씨름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불똥은 정치팀으로 먼저 튀었다는 사실을 이날 하루 정치팀과 함께 호흡하면서 알 수 있었다.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차분히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시기, 매일 터져나오는 단독 보도와 특종 경쟁 그리고 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삿거리가 되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정치부 기자들에겐 초과근무가 일상이 돼버렸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겠다며 들뜬 기자에게 며칠째 이어진 야근으로 초췌한 정치팀의 한 선배 기자는 "우리는 매일매일이 역사적인 날"이라면서 건조하게 답했다.

오전 9시 30분쯤 국회의사당 로비에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비롯 총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자 긴장감이 고조됐다. 항의시위는 더욱 격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이 총수들을 향해 시위 중인 시민들의 입을 막거나 힘으로 제압하면서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뒤늦게 이들이 현대자동차 수행원으로 알려지면서 오후 청문회가 속개됐을 때 손혜원 위원이 정몽구 회장에게 사과를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 회장님이 험한 소리 듣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직원들의 충성심은 28년 전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질문 70%가 이재용에 집중 포화... "최순실 언제 알았나" 23번 질문

오전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 이날 청문회는 사실상 '삼성 청문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별 걸 다 분석한다 싶겠지만 <조선일보>는 7일 객관적 수치로 그 근거를 제시했다.

<조선일보>의 분석에 따르면 총수들의 총 답변시간 1시간 9분 3초 중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답변 시간이 39분 9초로 가장 길었고, 오전 청문회 질문의 70%가 이 부회장에게 쏠렸다. 18명의 의원이 총수 9명에게 한 질문 수는 총 712개이고 그 중 436회가 이 부회장을 향했다.

이 부회장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최순실 정유라를 언제 알았느냐'였다. 6명의 위원으로부터 23번이나 받았던 질문이다. 이만희 위원은 "삼성전자 사장이 승마협회장을 맡아 승마 발전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마장마술 560등 하는 망나니 정유라에게 10억이 넘는 말을 사준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거듭해서 질문하며 이 부회장을 몰아붙였다.

'삼성 저격수' 박영선 위원은 이부회장의 증여세 문제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손혜원 위원은 미래전략실의 역할에 대해 집중 공격했다. 

이 부회장의 반응은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로 김빠졌다. 법적 문제가 될 만한 민감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 부회장은 "어... 저... 의원님 제가 진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확인을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와 같은 답변을 되풀이했다. 마치 설정한 듯한 이 부회장의 '어리바리 답변'이 나올 때마다 기자실 안에서는 조롱 섞인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한국 최고기업의 CEO는 국민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영혼 없이 송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철저하게 이날 하루 '바보 연기'를 하겠다고 작심하고 나온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간간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한 발언도 있었다. "제 대답이 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 사람의 운명이 달린 일이기에..." "정유라에게 금품을 제공했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다" 등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다섯번째)을 비롯해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총수들이 6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에서 증인선서를 위해 일어나 있다. 오른쪽부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손경식 CJ 회장.
▲ 청문회 출석한 재벌총수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다섯번째)을 비롯해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총수들이 6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에서 증인선서를 위해 일어나 있다. 오른쪽부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손경식 CJ 회장.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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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의 세 가지 선언 "전경련 탈퇴, 미전실 해체, 언론통제 중단"

속개된 오후 청문회장에서도 질의는 이 부회장에게 집중됐다. 비슷한 질문에 송구하다는 답변만 반복되던 가운데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하태경 위원의 다그침 속에 이 부회장은 떠밀리듯 세 가지 선언을 했다. '광고로 언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과 '미래전략실 해체' '전경련 탈퇴' 등을 약속했다. '검찰이나 특검 조사를 통해 법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자신이 직접 책임지겠다'고도 단언했다.

이 부회장은 과연 '법적 책임'을 지게 될까. 2001년 출간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김용철 변호사는 "비리가 언론에 공개되어도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쌓이면서 삼성은 더 뻔뻔해졌다"라고 기술했다. 이날 참고인으로 출석한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역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정경유착에 대해 "이번 사건은 누군가 감옥에 가지 않고는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 가지 선언은 향후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전경련 탈퇴는 재벌들의 사회적 역할을 재정립할 계기가 될 것이다. 미래전략실 해체는 삼성의 조직문화에 변화를 가져올 만한 일이다. 마지막 약속인 언론통제 중단은 우리 사회 미칠 파장이 꽤 클 것 같다. 지난 수십 년간 삼성은 돈으로 언론권력을 좌우해왔고 그로 인한 폐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삼성 오너 일가에 대한 비판 기사 한 줄 사이트에 걸지 못하던 경제지 편집기자 시절이 떠올랐다. 한 데스크는 우리가 받는 월급이 삼성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후배 기자들에게 공공연하게 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스탠스는 그 조직 속에 DNA처럼 박혀 있었다. 재벌기업 오너 일가 기사에는 토씨 한 글자라도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신경 쓰며 기자들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렸다.

힘들지만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 청년들을 취재하면서 삼성에 입사했다가 뛰쳐나온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입을 모아 삼성의 조직문화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타트업 삼성'이란 구호로 흉내만 내지말고 최고 결정권자들부터 '진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경련 역시 권력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창구가 아닌 한국사회 미래 먹거리를 위해 지혜를 모으는 씽크탱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부회장이 이 세 가지 약속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겠다.


태그:#최순실 게이트, #재벌총수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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