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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서울 광화문일대에서 열린 '촛불의 선전포고-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6차 범국민행동'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청와대 압박하는 촛불의 바다, "박근혜 물러나라!" 3일 오후 서울 광화문일대에서 열린 '촛불의 선전포고-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6차 범국민행동'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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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을 위한 광장의 정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재 '광장의 정치를 만들고 있는 광화문의 촛불이 드러내어 보여주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 광화문의 촛불은 위대하다. 그럼, 왜 위대한가? 외신을 비롯하여 많은 언론들은 11월 12일, 11월 19일, 11월 26일 광화문 촛불의 위대함을 평화로운 시위문화와 국정농단을 해악과 풍자로 승화시킨 축제형 집회문화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광화문의 촛불이 위대한 것은, 그것이 '비폭력 평화시위'이거나 '축제형 집회문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광화문의 촛불이 진짜 위대한 이유는 시민들이 기존에 그들에게 주어진 규칙을 깨부수고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나온 그 순간, 그들은 이 나라의 주권자가 누구이며 국가권력이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권력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자리

박근혜는 11월 12일 전까지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11월 12일 백만 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나면서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게 되었다. 아울러 그의 권력도 더 이상 강력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의 권력은 매우 초라한 것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권력을 조롱하고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시간이 멈추고 '메시아'가 도래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메시아는, 바로 국가가 가진 그 거대한 권력이 사실은 우리들로부터 나왔다는 비밀이다.

진짜 권력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곧 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 바로 우리들이다. 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의 권력은 커지며 그만큼 기존의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지배자들의 권력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지배자들이 '광장의 정치'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들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직접 행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그들의 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순간, 그들의 권력은 해체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은 애초 그들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광장의 정치는 바로 이런 위임의 정치를 철회하고 시민들 스스로 권력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광장의 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출발해야 할 원칙은 '대중들의 권력' 그 자체를 확장해 가는 것이다. 보수 언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탄핵안 상정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과 개헌이라는 교란 요인, 거기에다가 보수정당들의 정치적 야합에 대해 걱정하면서 그것이 마치 박근혜 퇴진의 향방 및 경로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국회도, 검찰도, 보수야당이나 유력한 대선주자들도 아니다. 심지어 탄핵이 부결되어도 대중의 힘이 지금처럼 살아있는 이상, 그것은 오히려 혁명을 더 급진화 시킬 뿐이다. 따라서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광장으로 모여든 시민들의 힘이다. 지금 이 나라의 주인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광장의 시민들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퇴진을 위해 광장의 정치가 해야 할 것은 '권력의 주인으로서 대중들 스스로가 권력을 행사하는 시간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시간을 지속시킬 것인가? 그것은 주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시민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그들 스스로 해방의 기쁨을 성취하도록 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민주주의에서의 자기통치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평화로운 시위문화'도, '해악과 풍자로 승화시킨 축제형 집회문화'도 모두 다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통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통치에 대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런 훈련을 통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주권을 대표하는 통치자를 필요로 하게 않게 된다. 따라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 스스로 주인이 되어 국정을 논하고 민주주의에서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토론과 문화제가 기획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광장의 정치를 박근혜 퇴진에 집중시키면서 그 의제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사실, 주술에 걸린 것은 박근혜만이 아니다. 박근혜는 애초 자기가 없는 유령이었다. 그것은 박정희라는 유령이 지배하는 정치적 인격체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가 박정희의 망령이라는 주술에 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의 망령들은 청와대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기업과 공장, 대학과 시민단체, 방송국과 신문사, 군대와 검찰, 국회와 정당 등에 박근혜가 존재한다. 따라서 박근혜 퇴진 투쟁을 기업과 공장, 대학과 시민단체, 방송국과 신문사, 군대와 검찰, 국회와 정당 등에 존재하는 박근혜를 찾아내고 이것을 혁파하는 데로 발전시켜야 한다.

서울 광화문 광장 박근혜 퇴진 캠핑촌 모습
 서울 광화문 광장 박근혜 퇴진 캠핑촌 모습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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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방식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 뿐

현재 광장의 투쟁방식과 관련하여 많은 보수언론들은 이전의 폭력적 시위와 비교하여 촛불집회의 비폭력적 성격을 '높은 시민정신'으로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완전히 전도된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투쟁방식에서 폭력과 비폭력을 대립시키고 '비폭력'을 신비화시킨다는 점이다. 87년 6.10민주항쟁이 '폭력시위'였던 것은 그들이 폭력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대오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 오직 화염방사기와 짱돌로 무장한 폭력적 방식으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경찰은 최루탄과 지랄탄으로 무장하고 백골단을 투입하여 대오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무장된 폭력이 없다면 광장의 정치는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투쟁방식에서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결정하는 것 또한 현재 시민들의 힘을 더 결집시키는 방식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둘째, 대중의 힘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오류이다. 대중의 힘은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 또는 그 규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광장에 모여든 사람의 숫자가 적어도 그것이 더 조직적으로 결집되어 있다면 그 힘은 커진다. 반면 광장에 모여든 사람의 숫자가 많아도 그것이 덜 결집되어 있다면 그 힘은 더 적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중의 힘은 대중의 숫자+조직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6.10민주항쟁과 지금의 촛불집회는 서로 다르다. 지금의 촛불집회에서 대중의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은 대중의 숫자다. 내가 본 바로 지금의 시위 규모는 6.10민주항쟁 때를 능가한다.

언론에서는 6.10민주항쟁 때 300만 명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착시현상일 뿐이다. 그 당시는 전경과 대치하는 싸움을 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시민들은 길가에서 응원을 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6.10민주항쟁 때 대중의 숫자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10민주항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학생들은 조직된 대중으로, 그들의 힘이 숫자에 비해 강력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흩어져 싸웠고 전경들은 최루탄이나 사과탄을 쏘다가 떨어지면 무장해제되었다. 왜냐하면 교통이 마비되어 전경들에게 최루탄이나 사과탄을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6.10민주항쟁 당시에 폭력투쟁은 그 당시로서는 성공적인 투쟁방식으로, 현재의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비난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투쟁방식은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정세의 흐름을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현재의 단계에서 광화문의 촛불집회가 대중의 역량을 보존하고 그 힘을 극대화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현재 주어진 대중적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섣부른 급진적 투쟁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의 집회문화들을 포용함으로써 축제의 양상을 지속시켜갈 필요가 있다. 특히,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권력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대중의 힘을 스스로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포용성 위에서 보다 적극적인 조직화의 방식들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촛불집회의 대중적 자발성을 찬양한다. 하지만 그것은 조직화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대중 위에 군림하거나 계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성을 훼손할 때이다. 또한, 현재 광화문의 촛불집회는 비교적 오랫동안 진행되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장기전이 될수록 광화문에 모인 대중의 힘은 자발적인 대중보다 점점 더 조직화된 힘에 의존해가는 비중 또한 증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와 같은 대치의 국면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면 양쪽이 충돌할 가능성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광장에 모여든 대중의 분노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그럴 경우, 대중들은 국가권력의 장벽을 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6.10민주항쟁이 보여주듯이 대중의 숫자가 아니라 조직화 정도이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조직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청년조직들의 일상적 조직화 사업이 수행되어야 하며 이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가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박영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입니다.



태그:#박근혜 퇴진, #캠핑촌, #촛불, #6.10, #폭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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