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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 이충부공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충모각
 고하도 이충부공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충모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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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교에 차를 얹은 뒤 3km 가량 달리면 큰 네거리가 나온다. 네거리가 있는 곳은, 대교를 건너며 바다를 보지 않았으면 고하도가 섬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광활한 평지 한복판이다. 이충무공기념비가 있는 목포시 고하도길 175로 가려면 이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야 한다.

고하도 지도에 가장 크게 박혀 있는 지명은 용머리와 선착장이다. 용머리는 고하도의 가장 북쪽, 즉 목포대교가 고하도에 닿는 일대를 가리킨다. 고하도의 생김새로 보아서는 용꼬리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릴 법한데, 맨 위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더 이상 섬이 아닌 고하도, 육지면 최초 재배지

고하도 선착장은 섬의 동남쪽 바닷가에 있다. 더 큰 지도를 펼치니 서산초등학교 충무분교, 고하도 복지회관, 이충무공유적지가 섬 동쪽으로 가는 좁은 도로 위에 차례차례 떠오른다. 섬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고하도 목화밭' 글자가 보인다.

고하도는 우리나라에서 육지면(미국의 조숙형 목화)이 처음 재배된 곳이다. 목포시는 고하도 목화밭에 '고하도는 1904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육지면을 재배하여 전국으로 보급한 역사적인 곳이다'로 시작되는 안내판을 세워 두었다.

안내판은 '고하도의 육지면 재배 성공으로 목포항은 면화 물동량이 급증하여 전국 3대항, 6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달동 780-18번지(이충무공 유적지 주변)에는 육지면 재배를 기념하여 1936년에 세운 朝鮮 陸地棉 發祥之碑(조선육지면발상지비)가 있으며, 고하도의 역사자원과 함께 청소년들의 체험 학습장으로 활용하고자 여기에 목화밭을 조성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지(이충무공기념비)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 아래도 삼문 충모문이 보인다.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지(이충무공기념비)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 아래도 삼문 충모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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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길이 이상하다. 유명한 이충무공기념비를 찾아가는 길답지 않게 도로는 좁고 고불고불하다. 인가도 드물고, 따라서 인적도 거의 없다. 어째서 이순신 장군의 5대손 이봉상은 이토록 구석진 곳에 이충무공기념비를 건립했을까? 혹시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문화재청 누리집의 '전라남도 기념물 10호 고하도이충무공기념비(高下島李忠武公紀念碑)' 부분을 읽어본다. 

'(고하도 이충무공 기념비는) 목포시에 속한 고하도라는 섬에 서 있는 비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을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장군은 승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량을 저장해두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고, 군사적 요충지인 이 섬에다 양식을 비축하여 두었다 한다.

비를 세우는 공사는 통제사 오중주에 의해 시작되어, 17 22년(경종 2) 8월 공의 5대손인 이봉상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남구만이 비문을 짓고, 조태구가 글씨를 썼으며, 지금은 커다란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에는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답변이 없다. 그런데 의문을 풀어주는 뜻밖의 존재가 선착장 주변에 서 있다. 목포대교 탓에 지금은 배로 목포와 고하도를 오가는 사람이 끊겼지만, 제대로 선착장 기능을 하던 시절을 상징하는 그 무엇이 현장에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충무공기념비로 가는 길의 오른쪽은 바다, 왼쪽은 산비탈이다. 선착장 입구는 더 이상 왼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느낌을 완강하게 풍겨준다. 게다가 이충무공 유적지로 안내하는 안내판까지 산비탈에 서 있으니 이제 주차를 할 시점이다.

목포대교 개통 이후 이용자가 거의 없는 고하도 선착장에는 배에서 내리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고하도 GOHADO'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오른쪽에 충무공유적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가까운 곳에 이충무공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목포대교 개통 이후 이용자가 거의 없는 고하도 선착장에는 배에서 내리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고하도 GOHADO'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오른쪽에 충무공유적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가까운 곳에 이충무공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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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십 년 전에 세운 듯 보이는 '고하도 GOHADO' 입간판이 유적지 안내판 오른쪽에 서 있다. 배에서 내릴 때 정면으로 보이는 바로 그 지점이다. 흰 바탕 양철에 시퍼렇고 굵은 글씨로 '고하도 GOHADO'를 써 두었다. 여기가 바로 고하도라는, 1960년대식 자부심이 한껏 묻어 있는 입간판이다.

목포대교 개통 이전까지 이곳은 고하도에서 가장 사람이 북적댄 곳이었다. 그래서 바로 이곳에 이충무공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인파가 흐르는 이곳, 많은 이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도 선착장 인근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다만 목포대교에 죄가 있을 뿐...... 유적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고하도는 보화도, 비하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서남해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영산강의 빗장 역할을 하는 지리적 특성이 있다.

이 유적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전략지로 활용하여 왜적의 침투를 막아낸 곳이다. 충무공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인 1597년 10월 29일 이곳에서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108일간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섬 둘레가 불과 2km밖에 되지 않지만 이곳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 지대를 흐르는 영산강을 왜구에게 내어주는 셈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진성(鎭城) 터가 남아 있는데, <난중일기>에 그 축조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목포 사람들은 이충무공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해마다 4월 28일이면 이곳에서 공의 정신을 추모하는 탄신제를 치르고 있다.'

영산강 하구를 지키는 고하도는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한참 동안 주둔하면서 전력을 재정비하고, 군량미도 비축했던 곳이라는 것이 안내판 해설의 핵심이다.

이이화는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에서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역풍이 불고 물결이 세차게 일어 전선을 일단 당사도(암태도 소속)로 옮겨놓았다. 다음날 어외도로 나오니 피란해온 선박 300여 척이 몰려들어 전승을 축하하고 쌀과 고기 등을 가져와 위문했다. 그 뒤 칠산바다 법성포, 선유도 일대를 순찰했으나 적선이 출몰하지 않아 보화도에 군진을 쳤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서남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빗장의 군사 요지, 고하도

이제 이순신이 고하도에 진지를 차린 까닭은 대략 이해되었다. 다만 안내판의 '지금도 이곳(고하도)에는 (당시 수군 본부인) 진성 터가 남아 있는데, <난중일기>에 그 축조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라는 대목이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한다.

<난중일기> 중 고하도에서 집 지은 일을 기록한 부분은 모두 12곳이다. 특히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해서 고하도에 진지를 차렸다는 1597년 10월 29일자 기술이 가장 흥미롭다. 

'사경(새벽 2시경)에 첫 나팔을 불고 배를 출발했다. 목포로 향하는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동풍이 약간 불었다. 목포에 갔다가 보화도로 옮겨 정박했다.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에 올라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매우 좋았으므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충모각의 뒤에서 삼문을 바라본 풍경. 삼문 밖 솔숲 아래가 바다이다.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충모각의 뒤에서 삼문을 바라본 풍경. 삼문 밖 솔숲 아래가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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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기념비로 올라가는 숲속에는 홍살문이 버티고 서서 분위기를 돋우어 준다. 기념비를 보러 가는 길이지만 흡사 사당 참배를 가는 듯 마음이 경건해진다. 경내로 들어가는 삼문에는 모충문(慕忠門) 현판이 걸려 있다. 모충은 이순신의 충성을 추모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일 터이다.

비각도 삼문처럼 모충을 당호(堂號, 집이름)로 쓰고 있다. 유적지는 기와 담장이 둘러져 있어 자못 단정한 느낌을 준다. 모충각 담장 둘레와 경내에는 소나무들이 훤칠하게 자라 있어 보기에 시원하다.    

이곳 비석의 조선 시대 공식 이름은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 故三道統制使(고삼도통제사) 贈左議政忠武李公(증좌의정충무이공) 高下島遺墟記事碑(고하도유허기사비)'이다. 긴 이름 가운데서 유명(有明)조선국(朝鮮國)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마음에 거슬린다.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속국으로 생각한 조선의 지도부

문화재청은 긴 이름을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로 줄여 사용하고 있다. 앞에 섬이름 고하도를 붙인 것은 다른 곳에도 이순신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들이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다.

이 비는 1709년(숙종 35)에 남구만(1629∼1711)이 비문을 지었고, 조태구(1660∼1723)가 글씨를 썼다. 전액(篆額, 제목)은 이광좌(1674∼1740)가 썼다. 남구만, 조태구, 이광좌 세 사람은 모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과연 이순신을 기려 세운 비석답게 당대의 거물들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남구만이 남긴 글 중 교과서에 실린 데 힘입어 거의 국민시조 반열에 오른 작품 한 편을 감상한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났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17행 48자로 구성된 비문 원문은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에 '高下島李忠武公記事碑(고하도이충무공기사비)'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비석 앞면에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고하도를 군대 주둔지로 정한 과정, 전쟁시 군량미의 중요성, 1647년(인조 25) 군대 본부가 당곶(목포시 이로동 하당)으로 이전되면서 이순신 유허가 소실 위기에 놓이자 통제사 오중주가 유허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후임 통제사로 하여금 고하도가 진터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 등이, 뒷면에는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

고하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이충무공기념비 방향의 풍경.
 고하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이충무공기념비 방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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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는 모충각의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삼문이 열려 있어 모충각을 보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비각 문이 닫혀 있는 탓에 비석은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개방되어 있으면 훼손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물론, 열려 있다 하더라도 돌에 새겨진 비문을 육안으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터, 폐문을 원망할 이는 별로 없을 터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창살 사이로 이충무공기념비를 바라보는데 비각 안이 너무 좁고 어두워 비 전체가 선명하게 사진에 담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석의 생김새야 다른 곳의 것들과 대동소이하므로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겠지만, 이 비에는 식민지 때 일본인들이 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고 들었다. 그것을 보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을 기려 세워진 비석에 일본인의 총질 흔적이라니! 장군의 비석에 뚜렷이 남아 있는 총탄 자국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아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고 싶었는데......

총을 난사한 일본인들은 비를 야산에 버렸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석을 찾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그리고 1949년 비각을 건립했고, 1973년 중수했다.

삼문에서 본 충모각
 삼문에서 본 충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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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모각 뒤로 가니 고인돌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 있다. 모충각의 뒷모습과 삼문을 함께 네모 속에 집어넣어 한 장의 사진으로 찍는다. 작아진 삼문 안으로 바다가 희미하게 들어온다. 그 풍경이 어쩐지 쓸쓸하고 슬프다. 이곳에 당도한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의 1597년 12월 5일자 내용이 떠오른다. 이순신은 그때 얼마나 쓸쓸하고 슬펐을까. 이순신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고문을 당하고, 백의종군으로 풀려나는 과정을 지켜보던 어머니 변씨가 마침내 4월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고, 10월에는 아들 면이 왜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후 이순신은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정신이 날마다 쇠약해졌다.'

선조 "나물만 먹고 어떻게 왜적과 용감히 싸울 수 있겠는가"

소문을 들은 선조가 '경은 아직도 상례(喪禮, 장례의 규칙)만 따르고 권도(權道, 특별한 상황에서 따라야 할 규칙)는 따르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 간절하지만 지금은 한창 나라가 어려운 고비 아닌가. 옛사람도 말하기를 전쟁터에서는 용기가 없는 것이 불효라 하였다. 나물만 먹어 기력이 떨어진 사람은 전쟁터에서 용기를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내 뜻에 따라 권도를 따르도록 하라'는 서신과 함께 고기 등을 보내왔다.

공은 '슬프고 감격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또 아들을 잃은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임금이 용기를 내라면서 편지와 고기 등을 보내온 것은 참으로 감격할 일이다. 거기에, 자신을 믿고 따라준 백성들 덕분에 이순신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쓸쓸하고 애통했으리라. <선묘중흥지>에 전하는 이순신의 고하도 기사를 현대문으로 번안하여 읽으며 오늘 이충무공기념비를 찾은 여행을 마칠까 한다.

여수 쪽을 보라보고 건립되어 있는 고하도 선착장에서 누군가가 새벽 낚시를 하고 있다. 이 선착장은 목포대교 개통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여수 쪽을 보라보고 건립되어 있는 고하도 선착장에서 누군가가 새벽 낚시를 하고 있다. 이 선착장은 목포대교 개통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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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드디어 보화도에 주둔하게 되었을 때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군량 부족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바닷길을 다닐 수 있는 통행첩(通行帖, 통행 허가서)을 만든 다음 "이 통행첩이 없는 배는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벌한다" 하고 선포했다.

피란선들이 모두 와서 통행첩을 받았다. 이순신은 배의 크기에 따라 적당한 쌀을 받은 다음 통행첩을 주었다. 그렇게 하니 불과 열흘 사이에 쌀 1만여 섬이 생겼다.

이번에는 군사들이 옷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이순신은 피란을 온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왜 여기까지 따라 왔느냐?" 하고 물었다. 백성들은 모두 "사또를 믿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사나워 군사들의 손가락이 얼어붙어 빠지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군사들이 적과 싸울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남는 옷이 있을 텐데 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순신의 말을 들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의복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이순신은 사람을 모아 구리와 쇠를 실어와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와 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도와 모든 것을 다 마련했다.'


태그:#고하도, #이순신,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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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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