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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민중총궐기대회 현장의 ‘단두대’ 설치미술
▲ 민중총궐기 11월 12일 민중총궐기대회 현장의 ‘단두대’ 설치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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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창피하다."

지난 11월 12일, 가수 이승환은 심하게 자책하고 자조했다.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범국민행동문화제 무대에 오른 그는 "그래서 요즘 분발하고 있다"고 각오를 거듭 다졌다. 그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본인의 사옥인 드림팩토리 외벽에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현수막을 내거는 등 특단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럼에도 끝내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며 치졸한 정부를 마음껏 조롱한 것이다.

나는 가수 이승환이 그토록 희망하는, 부러워하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정부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인하는 1만여 명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당당히 포함된 것이다. 비로소 정부에서도 공인으로 인정받은 우쭐한 기분이다. 기분 나쁘거나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영광스럽고 영예스럽다.

사실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일은 그리 대단한 사고나 업적이 아니다. 그저 지난 대선에 소속된 작가 단체를 통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명단에 이름을 빌려준 게 전부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번거로운 일도 아니라서 전혀 주저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지지하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사실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뒤늦게 정부가 대단한 행위로 인정해주니 당혹스럽다, 하지만 고맙다. 가수 이승환도 부러워하는 리스트가 아닌가. 

지난 11월 12일 민중총궐기 대회장은 한마디로 문화제를 방불케 했다. 특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문화융성'이라는 흑마술을 부리는 사이비 문화예술인 '차은택', 그리고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에게 문화예술계를 봉헌한 박근혜 정부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목소리, 몸짓, 난장판이 광장에 난무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농민회, 녹색당 등의 거리 풍물패, 그리고 '단두대' 설치미술은 단연 압권이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는 현 정권 유치함의 물증 

 11월 12일 민중총궐기대회 현장에서 녹색당 풍물패의 최혁봉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녹색당 11월 12일 민중총궐기대회 현장에서 녹색당 풍물패의 최혁봉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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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난 국정감사를 통해 알려진 대로 이른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역시 청와대의 작품으로 의심받고 있다.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2014년에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문화예술계 검열 대상자 1만여 명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특정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하거나 세월호 시국선언 등에 참여한 문화예술인이다.이 명단은 교육문화수석실을 통해 문화체육관광부로 하달됐다고 한다. 당시 정무수석은 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문제는 상대 후보 지지자 등이 포함된 이 어처구니없는 명단이 실제 지원사업 심사에 판단자료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청와대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예술위원회로 내려보낸 이 명단을 지원사업 선정에 반영했을지 모른다. 즉,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문화예술인은 관련 문화예술사업 지원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 초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의 심사가 지연된 업무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다. <한겨레>의 보도를 통해 "윗선에서 재심의를 요구해 그동안 완성한 심의 결과를 원점으로 돌리고 다시 평가심의위원들을 설득해 재심의 작업을 벌여야 했다"는 관계 공무원의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통상 늦어도 매년 1월 초 심의 결과를 확정발표하는데 블랙리스트에 있는 심의 대상에서 배제할 예술인 명단을 반영하느라 3월 말에야 전체 지원 대상을 확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실린 문서가 2014년 연말께 예술위에 전달, 시각예술, 공연예술, 문학 등 3개 영역에 걸쳐 20여 쪽 분량으로 500여 개의 단체·개인명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조윤선 장관 등 관련자들은 전면 부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말의 의심과 심증이 없지 않다. 올해 초 문화체육관광부 출판 관련 지원사업에 신청한 적이 있다. 나도, 출판사도 가능성도 있다고 봤고 나름 선정되리라는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물론 탈락사유가 2014년말에 상부의 모처에서 하달된 블랙리스트 때문이라는 물증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술은 상부나 외부 멋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음악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영화예술자원 ‘사운드오브뮤직’으로 먹고 산다.
▲ 잘츠부르크 음악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영화예술자원 ‘사운드오브뮤직’으로 먹고 산다.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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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든 아니든 나는 문화예술인이다. 등단한 시인이고 작가단체 회원이다. 이번에 블랙리스트에도 어엿한 문학인으로 출신 성분이 분류되어 있다. 법적으로 문화예술인의 한 사람이니 한국 문화예술계에 한 표의 발언권은 갖고 있는 셈이다. 마침 발언권을 행사하자면, 나는 우리 문화예술계를 다소 삐딱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변방의 비주류 또는 하류 무명시인의 주제인 처지를 애써 변명하거나 위장하려는 속셈으로 들려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요즘 난무하는 일부 문인사회의 성폭력, 등단부정 등 추문을 들추지 않더라도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는 문제가 있다. 오로지 정부 같은 상부나 외부 환경뿐 아니라 내부의 구조적 문제도 고질적이고 만성적이다. 심지어 문화예술인 사이의 미풍양속으로 통용되는 문화예술계 전반의 풍조와 관습도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게 적지 않다. 새삼스럽지만 정치계, 경제계나, 교육계, 법조계 못지않게 비정상적인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 동네에도 전통적 제도권이나 보수 기득권층으로 불리는 극히 일부 불순한 세력들의 독과점적 리그가 작동해 그런 건 아닐까 염려할 뿐이다.

살면서 화려한 관문이나 무대가 부러울 때마다, 샘이 날 때마다 그런 의심과 오해를 몇 차례 해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신춘문예나 유명문예지에서 몇 번 낙선한 직후에 주로 들었던 사감 섞인 편견이라 설득력은 좀 떨어질 수 있겠다. 어쨌든 문화예술도 사람이 하는 일일인지라, 객관보다는 주관, 이성보다는 감성, 품질보다는 연고가 좌우하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물증이나 증인은 따로 확보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문화예술 현장에서는, 생활하는 마을공동체와 지역사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문화예술을 하면 안 된다. 현장 속에서, 마을 안에서까지 문화예술인의 완장을 차고 행세하는 건 좀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자칫 유치하고 경박하게 보인다. 그깟 등단이나 당선이라는 제도나 규격이나 자격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고 폼도 나지 않는 곳이 작업의 현장, 삶의 현장이다.

삶과 일, 놀이가 하나 되는 마을이 '진짜 예술현장' 

양평 논바닥에 종이박스로 가설한 마을영화 전용 ‘마을예술극장’
▲ 마을영화 양평 논바닥에 종이박스로 가설한 마을영화 전용 ‘마을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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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진짜 예술'은 삶과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서사적이면서 서정적인 마을공동체같은 생활공간에서 벌어져야 마땅하다. 마을에서 문화란 곧 삶 자체이고 일 자체다. 문화적인 요소를 빼놓고 마을을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문화가 없는 마을은 무미건조하다. 생활이 무의미하다. 삶과 일과 놀이가 완전무결하게 합체되는 문화적 영역과 예술적 공간이 곧 마을인 것이다. 사람은 '밥이나 빵'만으로 잘 살 수 없다.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란 문화적인 마을에 다름 아니다. 마을공동체라는 생활공간은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의 에너지와 종자로 채워져야 마땅하다.

더욱이 마을 밖으로 나가 다른 마을 주민들과 지역사회의 광장에서 어울리자면 문화 말고 더 좋은 연결고리가 없다. 문화의 연결고리 없이 지역사회의 공동체는 유지되거나 지속가능할 수 없다. 가령 교육, 농업, 생태, 문화 전문도서관으로서 마을도서관이 그렇다. 마을과 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인간 유물을 전시하는 마을박물관이 그렇다.

또 영화, 음악, 미술, 문학 학교, 그리고 공연과 전시를 아우르는 종합 문화예술관 위상의 마을극장이 그렇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마을사, 마을소식지 등을 짓고 펴내고 알리는 마을출판사와 마을신문사 등도 물론이다. 모두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건강하고 활력있는 지역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보석 같은 마을공동체 자산들이다. 

가령 제주도의 이른바 '문화예술 이주민' 현상은 주목된다. 제주도의 농촌지역에는 서울 등 도시의 청장년들의 자발적 이주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제주시 등 도시지역보다는 서귀포시, 애월, 조천, 성산 등 도시의 외곽, 농산어촌 지역으로 터를 잡았다. 개인 작업실, 공방 등을 비롯해 갤러리,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을 열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생활과 생업의 공간을 동일시하는 현지 정착모델을 제시했다. 젊은 청년 문화예술인들이 플리(Plea)마켓과 프리(Free)마켓을 곳곳에서 주도, 장터와 작품전시회와 공연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문화축제의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

지인 중에 유목민처럼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마을영화만 찍고 사는 '마을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삶과 일과 놀이가 하나되는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도구이자 무기로 '영화예술'을 하고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 '먹고 사는 공포나 불안감'에 방해받지 않고 어떻게 예술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지 볼 때마다 걱정이 든다. 그때마다 저렇게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예술가는 정부나 사회 같은 공공(Pubic)에서 마땅히 보상하고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지난 겨울 양평 용문면의 텅 빈 논바닥에 가설한 '종이박스 극장'에 마주 앉아 그를 쳐다보며 나는 또 하염없이 걱정했다. 부디 먹고 사는 일의 불편함과 성가심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주도록, 부디 용기 있는 지혜를 그에게 주도록, 그 전에 국가와 정부가 그의 소중한 마을영화를 지켜주도록.

거듭 기도하고 기원한다. 마을영화를 하는 신지승 감독 처럼 '진짜 문화예술인'들이 자본의 방해나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유치한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않고, 사람 사는 마을의 모습이나 세상의 풍경 같은 장엄하고 거룩한 미장센(mise-en-scene)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 불행사회, 한국 : 한국인은 불행하다. 한국인은 태어나고 자라고 먹고사는 조국에서 사는 게 불안하고 불쾌하다. 위험하다. 주관적인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처해있는 현실이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자살률은 부동의 1위다.
한국인은 서로 믿지 않는다. 협동하거나 공유하지 않는다. 사회적, 정치적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가 자꾸 편을 가른다. 남과 북, 경상도와 전라도, 강남과 강북이 자꾸 금을 긋고 벽을 쌓는다. 사용자와 노동자, 선생과 학생, 갑과 을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한다. 그래야 겨우 나 혼자라도 먹고살 수 있다.
그렇게 살다보니 한국인은 힘들 때 의지할 친구나 동료 하나 없다. 국가와 정부의 책임과 의무는 개인과 가계가 온통 짊어지고 있다. 대의정치와 민주주의는 조롱당하고 능멸당하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불법과 반칙이 얼마든지 승소한다. 조폭도 언론과 방송을 소유하고 활용한다. 전문가와 현자는 없고 사이비와 양아치만 난무한다. 친일파와 독재자의 후손이 되려 도덕과 정의를 정의하고 노래한다. 거짓말과 모함도 우기면 진실로 인정된다.
한국 사회에서 정신은 잿빛으로 타락하고 물질만 금빛 찬란하다. 공공성과 공동체는 소멸하고 이기주의와 패거리만 득세한다. 무기력증과 모멸감과 복수심이 일상을 지배한다.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완전무결한 표본이다. 불량한 한국은‘불행사회’다. 참‘나쁜 나라’다. 한국, 한국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않다. 공멸 직전이다.



태그:#문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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