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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기억의 단편들이 실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MBC PD 권성민도 내게 그런 대상이다. 나는 권성민이란 사람을 몰랐다. 그의 이름 앞에 '해직 언론인'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는 것도, 해직당하기 전 6개월의 정직이 있었다는 것도, 또 그가 '몸과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며 MBC에 발을 들여놓았었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세 개의 서로 다른 기억으로.

 <살아갑니다>
 <살아갑니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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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당시 일이다. 국민 기만을 목표로 '열일'하던 언론인들 사이로 용기 있는 언론인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던 적이 있다. MBC PD가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고 했다. 무려 제목이 "엠병신 PD입니다"란다. '엠병신 PD'는 '세월호 사건 참사'에서 MBC가 보여준 실망스러운 태도를 본인이 대신 사과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MBC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MBC가 마음에 안 드는 PD를 좌천시킨 것도 모자라, 그 PD가 개인 공간에 올린 웹툰을 핑계 삼아 아예 해직을 시켜버렸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 죄명이 '품격유지 위반'이라고 했다. 내 친구는 이 죄명이 그해 본인이 들은 말 중 가장 웃긴 말이라고 했다.

시간은 또 흘렀고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SNS를 통해 한 영상을 접했다. 유가족을 향해 피로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돈을 받았으면 이제 그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영상은 그런 목소리들을 향해 '만약, 당신의 아이가 그렇게 되었대도 지금 그 생각대로 행동할 수 있겠는지' 묻고 있었다.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볼 때마다 아찔했다. 사람들은 공감 능력을 아예 잃어버린 양 행세하고 있었다. 각박해진 세상을 나무라면서도, 나 자신이 각박해진 건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았다. 그러니 이런 영상이 만들어지고, 큰 호응도 얻는 거겠지.

'해직 언론인' 대신 '고민하는 청년' 권성민

이 책 <살아갑니다>는 '웹툰 때문에 MBC에서 쫓겨난 PD의 에세이'라는 정보 하나에 의지해 펼쳐 든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야 난 '엠병신 PD', '웹툰 PD', '영상 제작자'가 모두 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권성민 PD는 법원의 해고 무효 판결로 올해 다시 MBC 예능국으로 복귀했다. 86년생인 그의 나이는 이제 서른한 살이다.

책에는 '해직 언론인' 권성민이 있지 않았다. 대신 이제 막 서른 살이 넘은 '고민하는 청년' 권성민이 있었다. 가난을 경험한 애늙은이 초등학생 아이가 있었고,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는 고등학생 아이가 있었고, 장학금을 위해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대학생 청년이 있었고, 인생은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진지했지만 덜컥 예능국에 몸 담게 된 예능 PD가 있었다.

서른 살이 되도록 술 한 모금 마셔본 적 없고, '야동' 한 번 본 적 없다는 권성민은,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생각 많고, 고민 많은 사람이야 내 주위에도 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옳고 그름에 대해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눈 딱 감고 그냥 산다면 몰라도 세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골치가 갈려나간다. 옳고 그름의 경계가 자로 그은 선처럼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다면 세상 편할 텐데, 그게 아니니 이토록 답답스러운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옳음 자체보다는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은 하면 안 되는 일'을 더 고민하게 됐다. 그쪽이 훨씬 선명해 보였다. 덜 위험해 보였다. 영웅이 될 마음은 없지만 양아치만은 되지 말자. 그럼 부끄럽지는 않겠지. 그래서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데 모든 결정을 집중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 본문 중에서

옮고 그름 앞에서 '양아치만은 되지 않겠다'고 권성민은 다짐한다. 눈 앞의 문제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을 때에만 망설임 없이 말하고 행동하자고 마음을 다진다. '엠병신 PD'와 '웹툰 PD'는 이렇게 탄생한 거였다. 뜨거운 가슴이 아닌 차가운 고민의 결과였던 셈이다.

<살아갑니다>에 나오는 저자의 말들은 그래서 날이 서 있거나 강하지 않다. '내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건 정말 아니지 않으냐'고 말할 뿐이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선이 너무나 모호해 그 자체가 분란을 조장할 때, 저자는 그름 쪽에 바짝 붙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밥을 먹기 위해 십대 학생들이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건 '정말 아닌 것이다'. 뒤처진 사람에게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뒤처진 사람들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사람들을 떼쟁이로 모는 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 청와대와 꼰대들의 태도는 '아닌 것이다'.

질문하는 게 직업인 기자조차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건 '아닌 것이다'. 언론의 임무는 '현장을 통해 확인하고 검증하는 것'인데도 현장과 상충하는 발표만을 했을 뿐인 세월호 사건 당시의 방송국들은 '아닌 것이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통치 조직'에만 복종하는 건 '아닌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면 통치 조직에는 더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 내가 사랑하고 싶은 나라는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나라이고, 한나절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퇴근한 뒤 가족들과 저녁을 들며 영화 한 편을 즐길 수 있는 나라이며, 아이들이 햇살을 벗 삼아 양껏 뛰어놀 수 있는 나라이다." - 본문 중에서

상식에 대해 말하는 책 <살아갑니다>

직업이 PD인 사람답게 저자는 방송과 영상에 관계된 이야기도 몇 개 들려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룸 톤' 이야기였다. 적막이 흐르는 고요한 순간에도 모든 공간에는 '공기 소리' 비슷한 '스-' 하는 고유한 소음, '룸 톤'이 있다고 한다. 늘 거기에 있었기에 평소엔 인지하지 못하지만, 만약 이 소음이 사라지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된단다.

대개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거나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들은 이렇듯 사라지고 나서야 그 의미가 되새겨지는 듯하다. 공기도 그렇고, 자유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이들은 위태로운 모습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를 각성시킨다. 그러면 우리는 마이크를 대고 '룸 톤'을 녹음하듯, 손을 뻗어 이들을 다시 우리 곁으로 끌고 온다. 살아가는 중에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된다.

지금도 그런 때이다. 늘 곁에 있어줄 줄 알았던 민주주의가 저만치 멀어졌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민주주의를 우리 곁에 붙들어 두려 한다. '스-' 소리가 사라진 공간엔 몇몇 나쁜 사람들의 더러운 숨소리만 가득하다.

너무나 탐욕적이어서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그 숨소리를 없앨 수 있는 건 '아닌 건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상식의 목소리다. <살아갑니다>는 결국 상식을 말하는 책이라 생각했다. 상식이 무너진 세상이기에, 저자는 이토록 고민을 해야 했던 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살아갑니다>(권성민/오마이북/2016년 10월 19일/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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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