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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국가가 당신을 스파이로 지목한다면 억울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강압적인 수사관들은 당신에게 죄상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고하라는데, 그대는 말할 것도 적을 것도 없다. 만일 여기서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국가보안법에 따라 중형을 받게 된다. 회유와 협박이 교묘하게 뒤섞인 취조 과정이 반복. 지칠 대로 지친 당신이 기댈 곳은 변호인뿐이다. 얼른 연필을 들어 편지를 쓰고 싶다. '나는 죄가 없다고.'

'팜므파탈'이라 불렸던 마타 하리. 자유로운 여자에게 붙은 악명일까?
 '팜므파탈'이라 불렸던 마타 하리. 자유로운 여자에게 붙은 악명일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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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스파이>는 어떤 간첩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프롤로그를 펼치면 1917년 10월 15일에 집행된 섬뜩한 사형 장면이 소개된다. 막 동이 틀 무렵, 파리 외곽 뱅센의 병영으로 '마타 하리'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출신 무희가 끌려온다.

독일군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그녀는 총구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든다. 탕! 탕! 어지러운 총성이 울리고 마침내 마타 하리는 쓰러진다. 죽는 순간까지 정면을 응시했다. 눈을 감지 못할 만큼 서러웠던 탓이리라. 과연 그녀는 총살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것일까?

소설은 마타 하리가 자신의 변호사인 클뤼네씨에게 쓰는 편지 양식으로 진행된다.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쓴 편지는 절박하고 애잔하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섬세한 언어로 적어 내려간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결백해요! 누군가 나를 갖고 장난치는 모양인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첩보부가 뭔가 요구할 때마다 내가 일해주었을 뿐이에요." - p190.

결단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피고인. 그러나 수사기관의 입장은 다르다. 당시 사건의 주요 책임자였던 앙드레 모르네 검사는 마타 하리를 "독일인들에게 우리 군인들의 머리를 갖다 바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던 이 시대의 살로메"라고 지칭한다. 흥미로운 건 고발장의 내용인데 두 대목을 살펴보자. 괄호 안의 내용은 마타 하리의 변호를 맡은 클뤼네 변호사의 의견이다.

1) 전쟁 발발 후 두 차례 프랑스 방문. 이는 적국에 제공할 정보 취득을 목적으로 상부의 지령에 따랐음이 확실함(마타 하리는 하루 24시간 라두 대위의 부하들한테 미행당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2) 두 번째 방문에서 프랑스 첩보부를 위해 일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사실은 나중에 드러난 것처럼 스파이 활동 중 모든 것을 독일과 공유(두 가지 오류가 있음 : 마타 하리는 헤이그에서 전화를 걸어 라두와 만날 약속을 했고, 그와의 만남은 첫 번째 방문 때였음. 또한 독일 정보부와 비밀을 '공유'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밝혀진 바 없음). - p184.

시대를 앞서나간 페미니스트이자 무희였던 마타하리
 시대를 앞서나간 페미니스트이자 무희였던 마타하리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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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장은 사실과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거짓말로 뒤섞여 있다. 정부 측 고발자들은 피고의 소지품에서 범죄를 입증할 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증거가 부족하자 담당 검사는 편견과 억측에 기반하여 무리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젤러(마타 하리의 본명)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위험한 타입의 여성이다. 특히 유창한 프랑스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 구사 능력, 모든 영역에 걸친 다양한 인간관계, 사회집단으로 교묘하게 파고드는 재능, 우아한 기품, 뛰어난 지능, 부도덕함 등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잠재적인 피의자로 보이게 한다. - p194.

빈약한 증거, 수사기관의 사실 왜곡. 파울로 코엘료는 이러한 점을 반복 서술함으로써 사건 처리의 의혹을 부추긴다. 프랑스 법원은 마타 하리가 독일에 빼돌린 군사 기밀로 인해 연합군 5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명시하였으나 마타 하리가 기밀 정보를 적국에게 넘겼다는 증거는 한 건도 제출되지 않았다.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비단 100년 전 프랑스만의 문제일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국가 주도의 조작 사건들이 숱하다. <스파이>에서 묘사된 재판 과정을 보며 인민혁명당, 민청학련, 동백림 사건이 떠올랐다. 정의롭지 못한 정권에서 자행되는 악랄한 범죄 조작 사건은 왜 끊이지 않는 것일까?

헌법 제27조 4항에 따르면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피고인이 법률에 따라 유죄로 확정되려면 반드시 증거가 필요하다. 증거를 바탕으로 범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다. 그런데 마타 하리는 죽음을 선고받는다. 석연치 않은 판결 뒤에는 구린내 나는 사정이 있었다.

마타 하리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이자 사교계의 스타였다. 자유롭고 매혹적인 이혼녀였던 마타 하리와 관계한 이들은 꽤 많았는데 거의가 프랑스의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점잖은 체하는 그들은 나라의 주요 공직자이자, 집의 가장이었기에 부끄러움을 감추어야만 했다. 켕기는 게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입을 열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것이었으리라.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 중이었으므로 국내 문제로 시끄러워지길 원치 않았다. 힘없는 마타 하리는 처리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내부자들의 추문을 하루빨리 덮고 싶었던 프랑스 당국은 전시상황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형집행을 서두른다.

전쟁통의 어수선함 속에서 속전속결로 처형된 마타 하리의 주검은 해부용 시신으로 처리된다. 유럽 전역에 퍼졌던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너무도 허망한 최후였다. 1999년에 공개된 영국 정보부의 '마타 하리 보고서'는 마타 하리가 군사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고 밝힌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우리가 확보한 증거는 고양이 한 마리 벌 줄 만큼도 되지 못한다." - 앙드레 모르네(마타 하리 사건 담당 검사) p216.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죄인가? 아니면 진짜 기밀을 쥐도 새도 모르게 빼돌린 것인가? 만에 하나, 그녀가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 스파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마타 하리는 무죄다. 프랑스 사법부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시대 남성들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는 괘씸죄가 추가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은 기득권에 저항하고 관습에 젖어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박하다. 오늘날에도 무수한 마타 하리들이 꺾여 나간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자유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데,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무엇이든 스스로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법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윤리적이지 못한 정권 하에서라면, 누구나 '마타 하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국가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마타 하리와 같은 희생자를 만드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소설 <스파이>는 백 년 전의 기록임과 동시에 현재 사람들에게 파울로 코엘료가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문학동네(2016)


태그:#스파이, #파울로코엘료, #간첩, #국가보안법, #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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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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