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의 조건이 까다로웠다. 함께 여행을 하는 20여 명이 다들 직업 전선에 있다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 일정은 3박 4일 정도여야 했다. 또 소란스럽고 화려한 도심 여행지보다는 자연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했다.

게다가 가을 정취까지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가 어디 없겠냐고, 전 세계 여행지를 꿰고 있는 지인에게 물었더니 '쿠로베 협곡열차'를 타러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인터넷을 뒤져 정보를 찾아보기 전부터 왠지 시적으로 들리는 '협곡열차'라는 단어가 마음을 확 끌어당겼다.

쿠로베 협곡을 상징하는 빨간 다리 야마비코
▲ 쿠로베 협곡 쿠로베 협곡을 상징하는 빨간 다리 야마비코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협곡을 달리는 열차라니... 게다가 해발 3천 미터의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어 일본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알펜루트도 함께 감상할 수도 있단다. 또 10월이면 단풍이 절정이라고 한다. 일정도 3박 4일이면 충분하다니 우리의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기에 더할 나위없다. 10월 20일 출발, 3박 4일 일정을 확정지었다.

일본이 얼마나 가까운 나라인지는 비행기를 타 보면 실감이 난다. 이번에도 비행기를 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온다. 부산에서 나고야까지 1시간 반, 그야말로 코앞이다.

첫날 목적지는 나고야공항에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게로 온천마을. 일본 3대 온천중 하나로 꼽힐 만큼 물이 좋고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막상 이름난 온천도시에 도착해 보니 화려한 관광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마을 전체가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히다산맥'이 마을 전체를 가슴에 품은 듯 빙 둘러싸고 그 앞을 제법 큰 규모의 '히다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히다강' 곳곳에는 온천수가 흘러나와 노천온천탕이 만들어져 있다.

온천마을 게로 전경
 온천마을 게로 전경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게로마을 히다강 옆 노천온천탕에서는 목욕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게로마을 히다강 옆 노천온천탕에서는 목욕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마을 중심에는 긴 회랑을 지닌 나지막한 목조지붕의 작은 기차역이 서 있다. 마치 간이역 같은 운치를 풍기는 곳이어서 실제 기차가 운행을 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들어가 보았더니 매표소며, 대기실을 다 갖추고 있다. 지금도 게로 온천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역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최신식으로 다시 짓지 않고 이렇게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

게로마을 중심에 있는 게로역
 게로마을 중심에 있는 게로역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게로역 내부
 게로역 내부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마을 곳곳에는 세월을 느끼게 하는 오래된 목조건물의 료칸들이 있어 마을 전체가 시대극을 촬영하는 영화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름만 났다 하면 기존 건물들을 깡그리 부수고, 화려한 고층빌딩들로 획일적인 화장을 하는 우리나라 관광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오래된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해 왔기에, 도시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오래된 정취가 그리운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을 찾는다. 만약 이 온천마을이 신식건물들과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번쩍인다면 과연 지금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온천마을 게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온천수였다. 이날 숙소는 전통적인 료칸이었는데, 료칸 안에 자그마한 온천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실망스러울 만큼 작고 오래돼 보이는 시설이었지만 물에 몸을 담그자 사람들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청록빛을 띨 정도로 푸른 물에 마치 질 좋은 비누라도 푼 듯 물이 매끈매끈했다. 그동안 일본 온천 몇 곳을 가 봤지만 이런 촉감의 물은 처음이다.

게로온천의 오래된 전통 료칸 길천관
 게로온천의 오래된 전통 료칸 길천관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게로 마을 풍경
 게로 마을 풍경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게로온천 물은 100% 천연온천으로 일년 내내 온천수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알칼리 성질이 강해 피부미용에 특히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누구나 피부 미인이 된다고 한다. 비누도 사용하지 않고 몸을 담갔다가 나오자 마치 몸에 올리브유라도 바른 듯 피부에 반지르르 윤기가 흐른다. 신기하게도 오랫동안 양손가락에 계속 있던 관절통도 이날만큼은 사라져 놀랄 정도였다.

몸도 마음도 힐링이 되는 온천마을 게로에서 며칠 더 묵고 싶었지만 일정상 다음날 아침 일찍 나서야 한다. 길을 나서기 전, 새벽에 다시 온천을 찾아 몸을 푹 담그고, 배터리 충전이라도 하듯 온몸에 '게로 온천수'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길을 나섰다.

'쿠로베 협곡 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곳은 우나츠키역, 일본 최대의 V자 협곡이라고 하는 '쿠로베' 협곡을 오르기 위해 타야할 기차는 '토롯코 열차', 귀여운 이름만큼 불과 80cm폭의 좁은 선로를 달리는 작은 협궤열차다.

쿠로베 협곡을 달리는 협궤열차
 쿠로베 협곡을 달리는 협궤열차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협곡열차의 선로, 폭이 80cm에 불과하다
 협곡열차의 선로, 폭이 80cm에 불과하다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쿠로베 협곡열차를 탄 일행들
 쿠로베 협곡열차를 탄 일행들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마치 장난감 기차처럼 보이는 이 협궤열차를 타고 해발 224m인 우나즈키 역을 출발해 해발 599m인 사사다이라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1시간 10분 정도, 기차는 시속 18km 속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

열차에는 유리창이 있는 칸과 유리창이 없이 뚫려있는 칸이 있는데, 요금이 다르단다. 말하자면 1등칸과 2등칸인 셈인데, 우리 일행은 유리창이 없는 2등칸에 옹기종기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땡,땡,땡' 역무원의 신호와 함께 협궤열차가 출발한다. 뻥 뚫린 유리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계곡 하나를 구비 돌자 갑자기 아름다운 쿠로베강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쿠로베강은 3000m 표고의 다테야마의 만년설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86km를 흘러내리며 곳곳에 강을 만든다. 에메랄드 그린의 강물빛이 막 물들어가는 주변 단풍과 어울려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

그린 에메랄드 빛을 띤 쿠로베 호수
 그린 에메랄드 빛을 띤 쿠로베 호수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토롯코 열차는 옛날 쿠로베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사람과 자재를 운반할 때 사용되던 것인데 1971년 관광철도로 다시 개통을 했다고 한다. 열차가 달리는 양편으로 마치 도끼로 산 중간 부분을 날카롭게 파낸 듯한 계곡은 거의 90도 각도로 깎아지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산세다. V자 계곡 위를 달리는 열차에 고개를 내밀어 보면 수십미터 밑으로 떨어질 듯 아찔하다.

열차는 크고 작은 46개의 터널과 26개의 다리를 지나면서 점점 위로 올라간다. 다들 초겨울 패딩을 미리 꺼내 입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서늘하다. 입을 열어 숨을 크게 내쉬었더니 입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참 달다. 입을 더 크게 벌리고 바람을 마신다. 도시에서 품고 온 근심과 걱정, 욕심을 버리고 신선한 자연의 공기를 오장육부 가득 채워 가고 싶다.     

위로 올라갈수록 소리도 오직 기차소리 외에는 어떤 인위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콸콸 흘러내리는 쿠로베 계곡의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웅장한 자연의 교향악을 연주할 뿐이다.

쿠로베 협곡을 물들이는 단풍
 쿠로베 협곡을 물들이는 단풍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토롯코열차의 종착지인 게야카다이라역까지는 가지 않고 3분의 2쯤에 있는 '사사다이라' 역에 내렸다. 원래 이곳에서는 사계절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봉우리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기후변화로 여름이면 눈이 녹아 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기후의 변화는 이제 지구 구석구석 어디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모양이다.

사사다이라역에서 잠시 서성이자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졌다. 바람은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5시 반에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주변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올라갈 때는 주변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느라고 30여 분의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내려오는 길은 그게 아니었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기차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소란스러운데, 창이 없는 2등칸에 앉은 우리 일행은 추위를 견디느라 스카프로 온 얼굴을 꽁꽁 싸매고 몸을 웅크리고 앉아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야, 뒤에서 보니까 전부 다 죄짓고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죄수들 같다야!"

그 소리에 모두들 잠깐 추위를 잊고 소리 내 웃었다. 비록 내려오는 길은 시베리아 유형열차처럼 힘들었어도 '쿠로베 협곡열차'는 아름다운 가을엽서 한 장으로 가슴에 남았다.

하산하는 쿠로베 협곡열차
 하산하는 쿠로베 협곡열차
ⓒ 추미전

관련사진보기




태그:#쿠로베 협곡 , #협곡열차, #게로 온천마을, #일본 나고야, #단풍 명소 쿠로베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