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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고 몸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이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지어다"

오희옥 지사가 쓴 붓글씨 작품
▲ 붓글씨 오희옥 지사가 쓴 붓글씨 작품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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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안중근 의사가 의병을 이끌 때 쓴 시로 월호(月湖) 오희옥(吳姬玉, 1926~) 지사가 붓글씨로 쓴 글이다. 오희옥 지사는 여성독립운동가로 올해 91살의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독립운동 시절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주는가 하면 여가시간을 활용해 붓글씨를 틈틈이 써 지난 10월에는 전시회도 열었다.

가끔 안부를 여쭐 겸 전화를 드리는데 마침 붓글씨 전시회를 한다고 하기에 지난 10월 12일 수요일 오후, 오희옥 지사에게 달려갔다. 전시회는 '제16회 보훈가족 서예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오희옥 지사가 사는 보훈복지타운 내 복지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에서 고운 한복차림으로 기자를 맞이한 오희옥 지사는 붓글씨 동호회 회원들과 지난 1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붓글씨는 78살에 시작했어요. 무릎이 아파서 활동 폭이 줄어들어 복지관에서 하는 붓글씨 강좌에 나가기 시작한 거지."

올해로 12년째 묵향 속에 살고 있는 오희옥 지사는 평범한 할머니 같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분으로 생존해 계시는 몇 안 남은 여성독립운동가다. 

91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한복 차림으로 자신의 서예작품 앞에선 오희옥 지사
▲ 오희옥 지사 91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한복 차림으로 자신의 서예작품 앞에선 오희옥 지사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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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보훈가족 서예전시회’에 출품한 회원들과 오희옥 지사(가운데)
▲ 풀품자들 ‘제16회 보훈가족 서예전시회’에 출품한 회원들과 오희옥 지사(가운데)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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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토교에서는 아주 어려운 생활을 했지. 아버지가 북경 감옥에 갇혀 계신 탓에 어머니가 삼남매를 길러야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임시정부가 중경에 있을 때 임시정부 요원들의 가족들은 중경에서 가까운 토교라는 곳에서 신한촌을 일궈 살았다. 청화중학과 지척인 거리에 있던 신한촌은 기자가 찾아갔던 몇 해 전에는 화탄계(청계천 같은 큰 냇가) 건너편에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토교에서 정씨(정현숙 애국지사로 오희옥 지사의 어머니)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중략) 영걸 어머니(정현숙 애국지사)는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열걸 어머니에 정을 쏟고 희영이나(큰따님) 희옥에게(작은 따님) 좀 더 잘해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 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그 대신 그 집 삼남매의 옷가지 손질이며 이부자리 등 주로 바느질일을 도왔다."

이 말은 정정화 애국지사의 <장강일기>에 나오는 오희옥 지사의 어머니 정현숙 애국지사에 대한 이야기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타향살이가 오죽하련만 특히 오희옥 지사의 경우에는 아버지 오광선 장군과 떨어져 사는 바람에 고생이 더욱 컸다. 오광선(1896-1967) 장군은 조선의 광복을 찾는다는 뜻에서 오성묵에서 광선(光鮮)으로 이름을 바꿀 정도로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오광선 장군은 이청천 장군과 함께 만주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광복군을 양성하면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중대장으로 맹활약을 한 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0년 1월 북경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등 오희옥 지사의 가족과 만나지 못한 채 10여 년간 생사를 모르고 살다가 광복 뒤 귀국하여 만나게 된다.

아버지 오광선 장군과 어머니 정현숙 지사 모두 독립운동가다
▲ 오광선 아버지 오광선 장군과 어머니 정현숙 지사 모두 독립운동가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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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희옥 지사 일가는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했다.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1867-1935)은 용인·안성·여주 일대에서는 그의 솜씨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친일단체 일진회의 밀고로 그만 8년형의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이후 1920년 겨울 만주 통화현 합리화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아들 오광선을 찾아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정현숙(일명, 정정산, 1900-1992) 역시 만주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를 수행했으며,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한편 언니 오희영(1924-1969)과 형부 신송식 역시 민족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제1과에 소속되어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활약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일본놈들 글을 배우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한글 공부를 시켰지요. 만주에서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일본교과서를 보시고는 학교를 중단시켰지요. 그 뒤 북경에서 겨우 1학년을 마치고는 천진, 남경, 광동, 기강, 유주, 토교 등지로 임시정부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 제대로 학교 공부를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기강에서 5학년을 겨우 끝내고 토교로 와서 6학년을 마쳤습니다."

어머니 정현숙 지사의 친정집 용인에서 기자와 함께 선 오희옥 지사
▲ 오희옥과 이윤옥 어머니 정현숙 지사의 친정집 용인에서 기자와 함께 선 오희옥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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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옥 지사처럼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녀들은 망국의 설움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타국에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았음은 굳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청화중학에서는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었지요. 수영대회에 나가서 상장을 타왔더니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아무렴 왜 아니 기쁘지 않겠는가?

오희옥 지사는 1939년 4월 중국 유주에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독립군을 모으고, 연극·무용 등을 통한 독립군들을 위문하는 활동을 했다. 그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다. 공작대의 활동은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第5支隊)로 편입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토교에서 광복을 맞았지요. 그러나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근 1년이 지난 뒤에 상해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인천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산으로 들어 온 것은 당시 장티푸스가 창궐하여 질병 관리 차원에서였던 것으로 압니다."

해방된 조국 서울에서 오희옥 지사는 꿈에 그리던 어버지를 만났다. 그리고는 중국의 학적을 인정받아 진명여고 4학년에 편입한 뒤 졸업 후 수원의 매산초등학교에서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줄곧 교단에서 어린 꿈나무들을 가르치다가 정년을 맞았다. 30년 전 일이다.

"진명에 다닐 때는 성적이 우수했지요. 중국어를 잘하는데다가 중국에서 배운 영어 실력도 만만치 않았으며 광복 후를 대비하여 중국에서 역사와 한글 교육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당시 이시영 선생께서 조선의 역사를 가르쳐 주셨지요. 한글은 읽고, 쓰고, 말하기를 철저히 공부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오희옥 지사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다행히 한국의 역사와 한국말을 제대로 공부했기에 곧바로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오희옥 지사는 31살 때 당시로서는 혼기가 지난 나이로 결혼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지금은 복지타운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산다.

이제는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아픈 곳이 많고 특히 무릎이 안 좋아 바닥에 앉기가 힘들 정도라고 하는데도 기자와의 대담 내내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가끔 찾아 뵐 때마다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 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틈틈이 붓글씨를 써 전시회를 여는 오희옥 지사의 모습에서 독립운동 당당한 모습을 엿보는 느낌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오희옥, #여성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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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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