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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무슨 날일까? 안타깝게도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바로 백암 박은식 선생(아래 박은식)의 서거일이다. 올해로 91주기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의 저자로 대중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박은식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 혹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한국통사>의 저자'로 기억될 뿐이다.

실제로 박은식은 <한국통사> 하나로 국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거의 노년에 쓴 책이다. <한국통사>만을 기억한다면 이는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그렇다면 박은식은 무슨 일을 했을까? '유학자'부터 '임시정부 2대 대통령'까지. 그는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언론활동에 투신한 '유학자'

박은식 선생(1859~1925).
 박은식 선생(1859~1925).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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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음력 9월 30일. 박은식은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신동으로 불렸을 만큼, 유학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이후 참봉으로 벼슬을 지내며 여러 행보를 보였다.

여기서 나는 의아스러운 부분을 찾았다. 당시 1894년,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동비(東匪)들의 반란'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갑오개혁에 대해서도 사설(邪說), 즉 그릇되고 간사한 말로 여겼다. 오히려 박은식은 조선시대에 어울릴 법한 유학자였던 셈이다.

이런 보수적인 유학자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개혁에 비판적이던 박은식도 격동하는 정세에 눈을 뜬 걸까? 청일전쟁·을미사변·아관파천 등의 위기를 겪은 후, 박은식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위정척사를 표방하던 그가 독립협회에 가입했을 만큼, 나라에 위기가 온 것이다.

독립협회 가입을 기점으로 그는 활발하게 언론활동도 병행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을 창간·보급에 힘을 쓴 것도 박은식이다.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주필이 돼 의병활동에 대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후일 박은식은 저서 <한국통사>에서 동학운동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동학당은 본래 정치사상과 혁명 성질이 포함되어 있어, 많은 것이 비적 무뢰배나 어리석고 무지한 무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처럼 난폭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잔인했던 종래의 계급관념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니 또한 개혁의 선구자라 말할 수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동학운동과 갑오개혁에 부정적이던 유학자가 이렇게나 변한 것이다.

역사책 집필과 독립운동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10만의 애국지사가 지키려고 했던 나라가, 10명도 안 되는 매국노에 의해 외세에게 넘어갔다. 나라가 없어지자 박은식은 중국으로 망명해 역사책을 집필했다.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등의 역사책이 세상에 나왔다. 가장 유명한 저서인 <한국통사>도 이 시기에 집필된 것이다.

수많은 저서 중에서 특히 <한국통사>가 유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평가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나 박은식을 단순히 '역사학자'로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를 역사학자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무렵 박은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노인동맹단은 강우규 의사를 파견해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투척 의거를 일으키기도 했다. 즉, 그는 '얌전한 샌님'이 아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해서 투쟁한 '노익장'인 셈이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큰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3·1운동으로 국외 곳곳에 임시정부가 수립했을 시기의 일이다.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한성 등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60세의 고령임에도 박은식은 임시정부 통합에 힘썼다. 그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임시정부는 통합에 성공했다. 즉 독립운동의 역량 집중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감탄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만 국한시킬 수가 없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바로 아래에 나와 있다.

위기의 임시정부를 수습한 '2대 대통령'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요원들의 단체사진.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요원들의 단체사진.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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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누구일까? 당시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박사' 이승만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석·박사 학위를 갖춘 명성보다 그의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결국 불성실한 활동과 분열을 야기한 '위임통치 청원'으로 탄핵당했다. 신채호가 이에 대해서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결국 이승만은 쫓겨났으나, 임시정부는 공중분해의 위기를 겪는다. 임시정부는 가망이 없으니 해체하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기도 했다. 이때 공중분해를 당할 임시정부를 수습한 것이 바로 박은식이다.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은 제일 먼저 개헌을 실시했다. 이승만이 고집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으로 내각책임제를 선택했다. 이후에 박은식은 뭘 했을까? 놀랍게도 스스로 대통령에서 사임했다. 국무령이 선출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것이다. 대통령에 연연해 임정에 고집을 피우던 이승만과 달리 말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에서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뭘 했을까? 제일 먼저 그가 미국에서 벌인 행동은 무엇일까? 재미교포들의 임시정부 후원을 바로 차단했다. 그리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가 벌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참으로 '졸렬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대통령을 사임한 1925년. 박은식은 이미 병색이 완연했다.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렵게 통합시킨 임시정부가, 해체의 위기를 맞이한 상황 속에서 그걸 수습하기에 분주했다. 그 때문에 병을 치료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향년 6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나는 이 점이 대단히 안타깝다. 나이든 몸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까지….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은식은 서거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의 병세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오.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어야 하오.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疎)의 별(別)이 없어야 하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 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 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겠소."

본인의 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조국독립을 염려하는 말이다. 정말로 사리사욕이 아닌, 조국독립을 위해 힘쓴 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참으로 애석한 점이 많다. 이렇듯 많은 행적을 보이고, 임시정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박은식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식의 인지도는 너무나도 낮은 게 현실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박은식을 '한국통사'의 저자로만 기억할 뿐이다. 서글픈 일이다. 이는 교과서에서 <한국통사>만을 다루고, 기타 활동은 다루지 않은 영향이 크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임정 2대 대통령'인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와는 다르게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려던 박은식을 누구도 '임정 2대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올해로 벌써 서거 91주기다. '민족반역자'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그런 민족반역자들을 옹호하는 자가 대통령까지 하는 현실이다. 현재의 이런 모습은 타국에서 눈을 감은 박은식 선생에게 떳떳할 수가 있을까? <한국통사>로만 국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영웅, 박은식.

그런 영웅에게 떳떳할 수가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 모두 '떳떳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돼야 하지 않을까.


태그:#박은식, #이승만, #임시정부, #한국통사,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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